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
에디터 : 박규동

77번도로는 남해안의 반도와 섬을 연결하는 비경의 길이다.
반도와 섬을 연결하는 다리를 놓고, 연육교로 이으면서 육지와의 소통을 나눈다. 육지의 유행이 배보다 빠른 자동차를 타고 섬으로 전해지고, 섬에서 나는 해산물이 차를 타고 바쁘게 육지로 올라간다. 소외되었던 섬이 육지로 태어나고 육지는 섬을 얻었다. 아직 100% 완공을 하지는 않았지만 이 77번도로가 완공되면 그 길을 또 한번 자전거로 달리고 싶다.

3.1km나 되는 창선-삼천포대교

창선-삼천포대교를 지나서

바다 안개를 마시며 아침을 맞았다.
기쁘게 잠이 든 날은 아침도 상쾌하다. 방파제에 부딪히는 물결 소리도 추억처럼 아련하다.
텐트에서 잠을 자면 옆 텐트의 기침소리까지 들린다. 헝겊으로 지은 집의 특징이다. 헝겊은 시각은 가리지만 음각은 가리지 못한다. 시각 거리를 질러서 소리로 이웃이 된다. 그래서 같은 방에 있는 기분이다. 그 연장선에서는 우주가 둘이 아니다.
그래도 , 아침에는 먼 방에서 잔 것처럼 인사를나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윤구의 목소리가 더 밝다.

윤구가 끌고 온 트레일러는 곡절이 있다.
방학을 하자마자 학교에서 아이들과 헤어져 곧장 자전거여행 길에 오른 교사 김윤구는 트레일러가 평택에서 고장이 났었다. 다시 인천으로 돌아 가 새로 구입한 것이 Burley사의 Nomad였다. 몇 년 전의 형식이지만 짐을 나르기에는 장점이 많아 윤구가 신이 나 했었다. 그런데 산장지기님이 이번에 끌고 온 것이 같은 Nomad이다. 최신형인데 끌대(토잉바)의 조인트 부분이 상당히 개량되어졌다. 조인트 부분은 신소재로, 보기에도 간편하고 인장력도 좋을 뿐 아니라 용도에 맞게 잘 구부러지는 유연성도 좋다.
짐칸의 배치도 앞 뒤로 수납 공간이 나누어져 있고 벽에는 지퍼백 같은 소품도 장식되어 있다. 다만 두 바퀴가 직경이 16인치라 내 생각으로는 좀 작다는 느낌이다. 나는 20인치짜리를 쓰고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그런 느낌이 든 것 같다. 그러나, 내리막에서 시속 50~60km로 달리는 것을 보고나서 마음을 놓았다.
아내와 내가 끄는 Kool Stop이 두 대, 산장지기님과 윤구가 끄는 Nomad가 각각 두 대 그리고 트레일러 없이 가는 마찌님, 이렇게 행렬이 되어 77번도로를 따라 창선-삼천포대교를 건넜다. 멋진 다리 위로 아름다운 자전거 행렬이 달리는 모습은 보기에 좋았다.

공룡화석유적지로 가는 삼거리

사천(삼천포)을 지나 동쪽으로 달리는 77번도로는 넘어야할 고개가 고성까지 이어져 있었다.
사천시내에서 마켓에 들려 음료수와 간식거리를 샀다. 동쪽으로 5km 쯤 와서 길가 정자에서 쉬었다. 공룡화석유적이 바닷가에 있다고 했다. 날이 더운 탓에 몸을 식히기 위해 휴식이 잦다. 오르막 2km짜리 고개를 두 개 넘고 내리달리던 산장지기님이 하일에서 갑자기 자전거를 멈췄다. 영양탕집을 발견한 것이다. 무척 반가웠다. 착한 음식점 주인을 만나 맛있고 든든한 점심을 한 것이다. 바로 옆에 하일초등학교가 있었다. 용하게도 운동장 한 켠에 커다란 들마루가 두 개있었다. 낮잠 자기에 딱이었다. 낮잠을 잤다.

77번도로는 동남쪽으로 나아가며 군령포에서 끝이난다.
77번도로는 바다 건너 통영반도를 건너서 다시 이어지지만 아직까지 다리가 없다. 우리는 명산리에서 좌회전하여 58번도로를 타고 고성으로 향했다. 고개가 많아 진행이 보통 때보다 훨씬 더디다.
어느 시골 마을을 지나는데 마을 이장님이 마이크로 전달사항을 방송한다. 나누어 준 곤충퇴치기를 논에 설치하라는 내용이다.
"한 쪽에 네 개씩 여덟 개를 설치하이소! 다 끝나면 내일은 내가 막걸리를 사겠심더. 막걸리 닷 되면 먹고도 남을기라예!"
이장님 방송따라 웃느라 오르막이 힘든 줄 몰랐다. 닷 말도 아니고 닷 되란다.

어스름해서 고성에 닿았다.
고성초등학교를 찾아 갔다. 직원에게 부탁하니 혼쾌하게 야영허락을 해 주었다. 시내 한 가운데에 있는 학교라 많은 것이 열려 있었다. 밤 늦게가지 아이들이 뛰어 놀았다. 학교 공간이 유용하게 사회에 봉사하는 곳이라는 듯이 그랬었다. 고마웠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 텐트를 쳤다. 공동수도와 화장실을 이용하여 몸을 씻고 물을 얻었다. 족발에 소맥을 비벼서 뒤풀이도 했다. 호주하는 산장지기님의 술 제조기술은 사람을 반하게 하는 무엇이 있는 것 같다.
윤구는 장을 봐 오면서 우리에게 선물을 사 왔다. 나에게는 빵을, 아내에게는 바나나를, 마찌님에게는 사과를 그리고 산장지기님에게는 과자를 선물했다. 모두 좋아라 했다.

동쪽에 무지개가 뜨더니 서쪽에는 석양이 아름다웠다.
고개를 넘느라 오늘은 44km 밖에 달리지 못했다.

동쪽에는 무지개

서쪽에는 노을이 진다.

고성초등학교에서 아침

다음 날, 8월 15일 토요일, 광복절이다.
여행을 떠난지 2주일이 지나면서 이제부터는 자전거여행이 몸에 익숙해진다. 짐을 꾸리는 시간도 단축이 되고 세수하고 빨래하는 시간도 세련되어 진다. 밥 짓고 설거지 하는 시기도 적절하게 조절이 된다.
그러나, 광복절 아침에 쌀이 떨어졌다. 독립운동을 하는 건 아니지만 쌀이 떨어지면 배가 고파서 운행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윤구가 교무실로 가더니 직원한테서 쌀을 얻어 왔다. 압력밥솥이 우리의 광복절을 따뜻하게 해 주었다.

14번 도로를 타고 통영을 통과하여 거제도로 갔다.
통영 관광안내소 앞에서 좌회전하여 옛 도로로 접어들었다. 통영을 우회하면서 거제도로 갈 수 있을 뿐 아니라 차량이 한적하여 자전거로 가기에는 딱이다. 거제대교를 건너기 직전에 삼화리에서 점심을 먹었다. 한바집 같은데 백반이 맛있었다. 거제대교는 잘 만들어진 교량이다. 나는 처음으로 거제도를 들르는 것이다. 감회가 남 다르다.
거제도에 들어서서 얼마 가니 오랑성을 일부 복원한 게 보였다. 큰 느티나무가 버티고 섰다. 낮잠자기에 좋았다. 옆에는 거제관광안내소가 있었다.

통영을 얼마 남겨두고 고속도로 아래에 건빵장사가 있었다.


거제대교 위에서 건너다 보이는 구거제대교


거제에 닿는 길로 바로 포로수용소유적공원에 들렸다.
내가 여섯 살에 경험한 625 한국전쟁은 숱한 비극을 한반도에 남겼다. 그 중에서도 국군이 수용한 중공군및 인민군의 포로 17만 명의 비극은 그 이야기가 끝이 없다. 그 포로의 대다수가 이곳 거제도에 수용되어 있었던 것이다. 전쟁은 혁명이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지금의 인권은 한국전쟁이 단초가 되어 이뤄진 것이다. 그때의 사진이 많이 진열되어 있었다. 그나마 그럴듯한 것만 전시되어 있어서 그것만 보기에도 비참한데 실제로는 더 어려웠을 것이다. 먹고, 자고, 싸는 게 다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비루한 생존이 있었을 것이다.
문득 내 아버지가 생각났다.
한국전쟁에 국군장교로 출전하여 아직까지 소식이 없으시다. 들려온 소문을 어머니나 친척들에게 다시 들으면 인민군에게 포로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단다. 그렇다면,
그 추운 북한 땅에서 비루한 생존을 어떻게 견디셨을까 하는 생각에 몸서리가 쳐진다. 거제도는 따뜻하기라도 하지.
내 나이 일곱 살 이후로 아버지를 다시 볼 수 없었다.
아. 버. 지. !

전쟁과 평화는 둘이 아니고 하나다! - 거제 포로수용소공원



아.버.지!

거제고현초등학교에서 텐트를 쳤다.
직원이 수도와 화장실을 쓰게 해 주었다.
산장지기님과 마찌님은 내일 서울로 가신다. 마지막 야영을 삼겹살로 마무리 하였다. 소맥은 기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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