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비 사막 횡단 2편, 모래 바람과의 전쟁
에디터 : 이호선

지독한 모래바람으로 텐트 속에서도 온몸이 흔들리며 밤을 지샜다.
거의 날밤을 새워 아침이 되었건만 눈도 제대로 못 떼고 비몽사몽


앞 뒤 바퀴 동시에 지뢰를 밟고 말았다.


물과 배고픔 속에 걷던 중 또 다시 엘파마가 흔들거린다. 또 다시 펑크로 바람이 빠지고 있다. 실 펑크로 천천히 바람이 빠지고 있다. 멀지 않은 곳에 집 한 채가 보인다. 철로 노동자의 집임에 틀림이 없다. 무조건 문을 두드리며 들이 댄다. 말린 소고기가 들어 간 일종의 야끼우동 두 접시를 냅다 먹어 치웠다. 이 집의 주인 아저씨는 50대 후반으로 보이는데 전직 스포츠 맨이다. 몽골정부로부터 스포츠 매스터의 칭호를 받고 훈장까지 받은 사람이다.
그는 몽고와 카자흐스탄 접경지대에 있는 수많은 4000-5000M급의 설산들을 오른 산악인이면서 몽고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마라토너, 그리고 사이클선수였는데 지금은 은퇴하고 철로 노동자로 근무하면서 부인과 단 둘이 살고 있다. 그는 나의 자전거를 유심히 관찰하다가 자전거의 펑크를 확인한다. 내가 그 동안 수 많은 펑크로 고생을 했고 이제는 지쳤다는 나의 제스처에 그는 선뜻 제안을 한다. 타이어 안에 천막 천을 대라는 것이다. 고비의 강력한 가시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내린 결론이리라. 그는 비록 헌 천막 천이지만 가위로 좁게 자른 후에 돼지본드로 타이어 안에 한 조각 한 조각씩 붙였다.
진땀을 흘리는 가운데 그의 작업은 꼼꼼하게 진행되었다. 이윽고 그의 긴 한 숨과 함께 작업은 끝이 났고, 이젠 걱정 없다는 듯 그의 두 엄지손가락을 치켜든다. 그는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지으며 통쾌하게 웃었다. 나는 그저 이것으로 펑크의 공포로부터 자유로워지길 하늘을 우러러 진심으로 염원하며 걷기 시작한다.

나에게 헌신적인 도움을 아끼지 않았던 전직 몽고의 스포츠 마스터의 전설


타이어안에 들어 갈 펑크 방지용 천막 천을 가위로 재단하고 있는 스포츠 마스터

고비사막의 몽골인들은 물이 귀하기 때문에 물 한 바가지를 이 스테인레스 세면용 용기에
붓고 밑에 있는 꼭지를 누를 때마다 떨어지는 몇 방울의 물로 세면을 한다.
물의 고마움과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끼게 하는 체험의 현장이다.


몽골 구멍가게의 간판

샤인샨드(Saynshand)를 지나고부터는 조금은 굵은 모래땅들이 나타나고 암반들이 나타나고 있어 바퀴가 굴러 가는 데는 조금 수월해진 듯 하지만 노면이 거칠기 짝이 없다. 바닥이 조금 단단한 듯해서 올라타면 수 십m도 못 가서 울퉁불퉁한 돌 바닥길이 나와서 내리고, 가는 모래밭이 나를 끌어내리고, 그리고 맞바람이 또 나를 끌어 내려 결국은 걸을 수밖에 없게 만든다.

30년 전 대학생 시절, 걸어서 전국을 방랑하던 때 내가 겪었던 많은 것들이 하나 하나 새삼스럽게 떠 오른다. 무거운 놋쇠의 석유버너와 쌀, 고추장, 그리고 작은 석유통까지 배낭에 대롱대롱 매달고 군화를 신고 구름 떠 가는 대로 발걸음 떨어 지는 대로 하루에 80리 100리를 걸었다. 때론 숲 속의 폐가에서, 때론 무덤근처의 나무아래서, 때론 몰래 담치기를 한 초등학교의 교실에서 잠을 자며, 지치고 배고파지면 시골주막에서 김치를 안주 삼아 100원에 스테인레스 대접 하나 가득 막걸리 한잔을 마시고 길가에 버려져 있던 긴 나뭇가지 하나를 지팡이 삼아 "죽장에 삿갓 쓰고 방랑 삼천리……….." 흥얼거리며 달 빛 아래 인적 없고 이름없는 시골길을 걸었었지. 아주 멀리 개 짖는 소리와 나의 발자국소리가 내가 들을 수 있었던 유일한 소리였어. 나는 지금 그때 하던 짓을 똑같이 하고 있을 뿐으로, 다만 한가지 한국에는 없는 사막 위를 걷고 있다는 것이 다를 뿐이야.

고비횡단 중, 최초로 목격한, 사막을 달리는 버스.
자세히 보니 버스에는 선명한 한글이….
몽골전역을 질주하고 있는 차량의 대부분이 한국에서 달렸던 중고차들로
한국어의 로고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고비에는 모래 뿐 아니라 이런 끔찍한 돌길도 종종 나의 앞을 가로 막는다.
엘파마도 고개를 절레 절레.

"뭐야, 또 뭔가 이상해?!!"
완벽한 자신감으로 시작했는데 또 펑크인 것 같아. 바람이 살금살금 빠져나가고 있다. 여분의 튜브도 없는데,…….. 어둠이 시시각각 주위를 삼키고 있다. 엘파마가 아직은 주저앉지는 않고 있으니 가는 수밖에 없다. 만일 어떤 집도 만날 수 없다면 사막에서 튜브를 때워야 한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물이 담길 수 있는 조금은 입이 넓은 용기를 찾는다. 물이 없으면 실 펑크의 구멍을 찾기가 결코 수월치 않다. 나는 큰 주스 병을 주워 칼로 세로로 잘랐다. 물을 담아 펑크를 찾으려고,…
펑크 때움을 미적거리며 작은 등성이를 넘으니 뜻밖에 마을이다. 마을치곤 꽤 커 보이니 아마도 시티겠어. 이 정도면 여관도 있을 것이고 여관에서 때우면 된다. 5개의 튜브를 때워야 할 판이다.

이곳의 이름이 '아이락'이라 한다. 묻고 물어 찾아 들어온 단층의 여관 홀에 3명의 남자가 우왕좌왕한다. 이미 지칠 대로 지친 나이지만 3명의 남자들에게서 이상한 자력(磁力)을 느낀다.
"혹시, 혹시 한국사람입니까??!"
"네, 이것 안 보이세요!"
그러고 보니 그들은 L.I.G건설의 로고가 선명한 작업복을 입고 있다. 나는 이런 곳에서 한국 사람을 만나리라곤 꿈에도 생각을 안 했기에,………
'고비에 웬 한국사람!'

전격전(Blitz)의 신화를 탄생시켰던 몽골기마군단의 21세기 버전.
고비사막 위의 검은 주단(아스팔트 도로)을 깔기 위해 공중 낙하한 LIG건설의
정예선발대가 떴다! 그들은 분명 자신과 자신의 가정, 그리고 대한민국의 이름을 걸고
세계를 누비고 다니는 우리시대의 진정한 영웅들이지만
나에게는 놀랍게도 인간의 탈을 쓴 천사들이었다.
(왼쪽부터 지 건용 부장님, 김 은대 대리님, 그리고 박 진호 과장님)

그들은 곧 시작되는 고비사막 180km의 도로포장공사를 위해 공중 낙하한 L.I.G건설의 선발대 3명으로 공사가 끝나는 3년 동안 이곳에서 체류한다고 한다. 자신의 가족들을 떠나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을 이런 황량한 사막에서 고군분투하는 그분들의 노고가 거대한 산이 되어 나에게 다가왔다.
우선 나는 그분들이 끓여 주신 라면 두 개(물론 계란 풀었지!!)를 깍두기와 함께 단 숨에 삼켜  버렸다. 그리고 커피까지 마시고 나니 그것은 바로 "Heaven(천국)!!!"
그렇다면 이 분들은 분명 사람의 탈을 쓴 "Angel(천사)!!!!"

만일 이 분들이 3년 전에 이곳에 오시거나, 내가 3년 후에 왔다면, 바람은 여전하겠지만 최소한 이렇게 하염없이 걷지는 않았겠지!?
나는 '감사와 고향(故鄕)'으로 빵빵 해 진 배를 두드리며 방바닥에 푹 퍼져 앉아 튜브 5개에서 9구멍을 때웠다.
아침에 일찍 눈을 떴으나 뭉그적댄다. 무엇보다 이대로 또 사막을 향해 떠 날수는 없어. 나는 그 분들이 깨어 나기를 기다리며 여유를 부린다. 결국 나는 그 분들이 지은 잡곡밥에 김치, 소시지가 듬뿍 들어간 김치찌개를 설거지하듯 먹어 치운다.
마실 수 있고 먹을 수 있을 때 꽉꽉 눌러 마시고 먹어 둬야 하는 것이 방랑자의 제일 중요한 생존철학이다. 내 방에 돌아오니 침대 위엔 소시지 캔, 비스킷 등이 들어간 선물봉지!! 나는 지금 하늘에 계신 어머니가 나를 위해 투하시킨 선물보따리같이 소중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 들고 그들을 뒤로 한다.(만일 내가 그분들과 정확하게 이틀 반만 함께 있었다면 그분들의 살림은 완전히 탕진되어 그저 맹물과 손가락으로 연명하실 뻔 했다.)
나는 잠시나마 흠뻑 취해 있었던 대한민국의 꿈속을 툭툭 털고 나와 텅 빈 '무(無)'의 공간으로 순순히 걸어 들어간다.
자, 이쯤에서 Isla Grant의 'My land(나의 조국)'를 청해 듣지요!!



대길이의 찰진 복근을 '소유'하겠다는 나의 야욕의 불은 고비사막의 배수로 안에서도
결코 꺼질 줄 모른다.

나의 생존을 책임졌던 또 다른 게르 앞에서 KIA트럭과 함께한 엘파마

바람처럼 고비를 누비는 칭키스칸의 후예.
그는 번개처럼 달려 왔다가 이 촬영이 끝나자 마자, 하늘을 우러러 아주 심각한 환호성을
고비의 하늘에 터트리더니 말 그대로 눈 깜박할 사이에 저 멀리 언덕으로 치 달았다.
그와 말의 연기는 단 한 번의 ng없이 깔끔하게 끝이 났다.

나는 그저 끝도 없이 불어대는 모래바람 앞에 인간 샌드백이 될 뿐으로,………

철로아래의 배수로도 발견하지 못한 상태에서 피곤과 어둠의 무게에 눌려 주저앉는다.
한 밤중에 때 아닌 비가 세찬 바람과 함께 나의 텐트를 덮쳐 밤새 비바람과 치열한
난타전을 벌이며 날 밤을 새웠다.

긴 행군 끝에 도착한 도시, '초이르'. 바람이 워낙 강해 거리는 텅 빈 듯 인적이 없다. 바람이 강할 때는 소나 말조차도 꼼짝 않고 웅크리고 앉아 있다. 가게에 들러 식량과 물 보급을 끝내고 시내를 빠져 나오니 신천지가 눈앞에 펼쳐진다. 아스팔트의 도로가 우리를 반긴다. 몽골국경에서 시작해서 약 500km가 되는 지점이다.
'사각사각' '뿌드득 뿌드득' '처벅 처벅' '덜컹덜컹' '쿵쾅쿵쾅', 그 동안 바람소리와 함께 나의 귀를 소란스럽게 했던 나의 발자국, 엘파마의 발자국소리는 아스팔트 도로의 등장과 함께 바람 소리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세계를 휩쓸었던 몽골평원의 강력한 바람이 본격적으로 나의 앞을 가로 막는다. 나의 전신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려는 듯 무식하게 불어 댄다.
바위 같던 나의 의지도 서해바다만큼이나 경우 없고 무자비한 몽골바람 앞에서 하염없이 부서져 내린다. 하지만 나의 의지가 두 동강나면 결코 안 된다. 질주를 하기 위해 잔뜩 벼르고 있던 나와 엘파마는 몽골 군의 거센 저항 앞에 마음을 고쳐 먹고 초심으로 돌아가기로 한다. 여태껏 그래 왔듯이 감사한 마음으로 겸손하게 걷는 것. 이런 괴력의 바람을 역으로 쳐 부수며 달릴 수 있는 강력한 엔진을 발명한 인간은 역시 위대해!

또 다른 시, '초이르' 그 동안 계속되었던 길 없는 길, 길 아닌 길,
모랫바닥이 끝나고 검은 주단이 깔리며 혁명적인 변신을 한다.

길가에 있는 작은 상점에서 컵라면과 비스킷으로 허기를 때우고 이들의 야전화장실에서 일을 보고 뒤 처리한 티슈를 밑으로 힘을 주어 낙하 시켰으나 다시 튀어 오르며 내려다보고 있던 나의 얼굴을 치고 하늘을 향해 날아간다.
"에이 참, 더러워서! 이 웬수 같은 바람!!"

이곳 사람들의 화장실(야전변소)은 보통 40-50m, 심하면70-80m가량 집에서 떨어져 있다.
만일 뱃속에 급한 이상을 가진 사람이 험한 꼴 안 당하고 제한시간 안에 무사히 일을 마치기 위해서는 말이라도 타야 할 판이다.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로 이들의 대변의 색깔은 한결같이 어두운 갈색이며 단단하다. 나 또한 몽골에 들어 온 후 약 2주간 대변의 색깔이 그렇게 변했고 큰일을 볼 때 마다 약간의 통증을 느낀다. 아마도 야채나 과일 등이 없이 그저 고기일변도의 식단에서 온 결과라고 생각된다.


고비를 넘는 동안 나를 지탱해 준 소중한 음식

꿈의 주단(아스팔트)을 밟았으나 통쾌한 질주의 기쁨은 역시 나에게는 '갈 수 없는 나라'
'건널 수 없는 강'이었다. 바람의 강도가 배 이상의 등급으로 상향조절 되며
우리의 앞길을 철저히 가로막는다. 하늘의 움직임 또한 불길하다.
그저 여태껏 해 왔던 것처럼 감사한 마음으로 걸을 뿐이다.


나에게 또 한 번의 삶의 기쁨을 선사한 게르의 한 소년.
그의 해맑은 미소는 바로 몽고의 마음, 몽고의 아름다움이다.
그 소년의 구김살 없는 순수한 미소는 이제껏 내가 습득한 그 어떤 가르침을
훌쩍 뛰어 넘는 것으로 도저히 말로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 하다.

곳곳에 보이는 파란 헝겊의 매듭. 파란색은 바로 몽골의 하늘이다.
하늘은 몽골인들이 그토록 숭배하고 있는 절대적인 대상이다.

한 사람 곁에 또 한 '엘파마'. 우리는 운명처럼 하나가 되어 운명처럼 사막을 걷는다.

고비의 거센 모래바람을 일축하며 태양은 도도히 떠 오른다.

몽고 수도, 울란바타르를 100KM 남긴 지점에서 만난 교통경찰.
그는 2m 가까이의 초 대형 人으로 악수를 하니 내 손은 완전히 그의 손안에 묻혀 버린다.
마치 칭키스칸의 근위대장같이 떡 버티고 서서 담백한 미소와 함께 고비를 넘어 온
나의 노고를 치하하며 경의를 표한다.

몽골수도, 울란바타르를 50km 남기고 몽골하늘이 드디어 나에게 마음을 활짝 열고 자비를 베푼다. 몇 단계 아래의 산들바람으로 강도를 낮추며 이방인 환대의 달인인 몽골의 체면을 간신히 지킨다.
도시에 가까워 올수록 아스팔트포장도로는 만신창이다. 나는 크랙과 크레바스에 빠지지 않으려고 눈을 부릅뜨고 안간힘을 쓴다.
높지 않은 빌딩들이 시작되고 많은 선전용 간판과 현수막이 이어진다. 한국의 식품회사, 화장품회사의 간판들이 종종 나를 반긴다. 오늘은 5월 30일로 분명 일요일인데 많은 사람들이 봉고차와 버스에 빽빽하게 타고 일터로 향하고 있는 것 같다.

초라하지만 '울란바타르'의 정문이다.

"어이, 엘파마! 자세 잡아! 대한민국의 명마답게 어깨와 허리를 곧게 펴고 눈에 적당히 힘도 주고 바람의 제국, 전광석화의 제국, 칭키스칸 제국의 수도로 당당하게 입성 하는 거야. 어떤 행진곡이 좋을까?! 차이코프스키의 '라데스키', 아니면 엘가의 '위풍당당'?! 역시 폼 나는 이름 그대로 엘가의 것이 좋겠어."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
"허, 왜 이리 썰렁해?! 너무 이른 시간이라 환영객들이 전혀 안보이네?!"
도시의 거리를 그저 이리저리 달린다. 갑자기 눈 앞이 뻥 뚫리듯 광장이 나타난다. 칭키스칸이 마치 로마의 '시저'처럼 아주 넉넉한 의자에 위엄 있게 앉아 광장을, 그리고 몽골의 파란하늘을 바라 보고 있다. 두 명의 경비병이 지키고 있는 이곳은 바로 몽골의 국회의사당.

아직도 레닌 아저씨가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그대로 서 있다.

칭키스칸이 떡 버티고 앉아 있는 국회 의사당


"엘파마, 심각하게 생각 한 건데 우리 저 칭키스칸 앞에서 시건방 춤이라도 추어야 되는 것 아니야?!"
"에이, 형님 두. 나이 값이나 하슈!!?"
고비사막을 넘어 울란바타르에 입성을 했지만 우리를 반기는 것은 뜨거운 태양과 텅 빈 광장. 누군가를, 그리고 무엇인가를 그저 막연히 기대해 보지만 역시 부질 없는 짓.
드디어 나는 대한민국의 시청 앞에서 시작해 1765KM지점, 몽골의 국회의사당 앞에서 고비사막을 넘는 1차 과업을 달성했다.
고비를 넘기 위해 나는 수많은 고비를 넘기고 넘겼지만 결국 고비를 넘고 말았다. 하지만 내가 고비를 넘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고비의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또 한 번 온몸저리게 느끼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어려움에 처한 우리가 도움을 받고 구원을 받는 것은 바로 또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이다.
나는, 인간은 결국 인간들을 벗어나 살 수 없고, 인간과 더불어 살아 갈 수 밖에 없다는 운명적인 진리를 다시 한 번 온 몸 박치기로 확인한 것이다.

서울의 시청 앞에서 달리기 시작해서 인천항, 그리고 악명 높은 서해바다를
뒤도 안 돌아보고 건너서 넘어 천진에. 천진에서 시작해서 서북 진(進)을 거듭한 끝에
몽골의 수도, 울란바타르, 그리고 국회의사당까지 미터기의 눈금은 1762KM이다.
5월7일 저녁 7시 인천항을 출항해서, 오늘이 5월30일로 24일 만이다.

중국에서의 1,000KM는 하루 평균 130여KM로 일주일 걸렸고,
700여KM에 불과한 고비사막의 몽골을 2주 동안 하루 평균 45KM로 행군을 거듭한 끝에
 (1,800리 도보행군) 고비사막횡단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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