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란바타르, 막다른 길에 놓이다.
에디터 : 이호선

무지개식당의 몽골인 종업원들

그저 허전함을 달래려고 이곳 저곳으로 달려보다가 뜻밖에 눈에 들어오는 한국식당 간판. 어쨌거나 한국식당을 가야 그 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한국음식도 먹을 수 있고 민박집이라던가 여러 정보를 얻기 쉽다. 지난 3주 동안 나는 야채, 과일을 전혀 못 먹었기에 자나깨나 내 눈 앞에서 아른거리는 것은 야채가 듬쁙 들어간 우리의 비빔밥이다.
식당의 이름이 '무지개'로 전라도 나주 분이 하고 계신 식당이다. 한국의 식당에 올 정도면 몽골의 중산층으로 이곳의 한국식당은 고급식당에 속한다. 한국음식은 반찬도 많고 과정도 많아 일이 많다. 종업원이 30명이나 될 정도로 규모가 크다.
홀에서 서빙을 하고 있는 예쁜 아가씨들은 모두 몽골인들로 대부분이 한국어를 구사한다. 손님들은 모두가 몽골인과 주 몽골 외국인으로 야채가 거의 없는 몽골에서 야채가 듬쁙 들어 있는 한국음식은 그야말로 축복의 음식이다.

오랜만에 한국에 돌아와 그 동안 겪었던 불통의 비통함조차 일순에 날려 버리고 느긋한 시간을 보낸 후, 한인록에서 '통나무 게스트하우스'를 찾아낸다. 곧 한국말을 태연하게 잘하는 몽골청년이 차를 끌고 찾아오고 나는 또 안도의 한 숨을 내 쉰다.
이곳의 홍사장님은 몽골의 거의 터줏대감으로 몽골한인타운의 산 증인 같은 분인데 부인이 꼭 한국인 같은 몽골인으로 한국 말 뿐 아니라 한국의 음식까지 완벽하게 소화하고 있었다. 최근에 홍사장님은 아주 잘 생긴 늦둥이를 득남해서 샘 날 정도로 행복해 보였다. 이 게스트 하우스에는 '몽골사랑'이라는 몽골전문카페를 열고 있는 김 兄이 거주하고 있는데 그는 오랫동안 이곳에 거주하며 몽골여행전문가로 이미 많은 카페회원을 보유하고 있다.

치열했던 고비가시와의 전투에서 입은 상흔

뒤 랙의 고정 볼트가 짐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부러지고 말았다.
어쩔 수 없는 임시변통으로 5mm 육각렌치를 끼워 고정했다.

뚜렷한 기간산업과 경제기반이 없어 거의 대부분을 외국에 의존하고 있는 몽고에선
특히 생필품의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이들의 생필품 시장은 거의 한국과 중국의
치열한 각축장이다.

몽골의 만두는 기가 막힌다. 만두 속이 완벽하게 고기다.(98%고기,2%양파)
특별한 맛도 없는, 그저 다진 고기 익힌 것을 씹고 있을 뿐이다.

몽골 한인회

하지만 나는 이곳에 도착해 비로소 내가 함정에 빠져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원래 나의 계획은 울란바타르에서 서쪽으로 횡단을 해서 러시아를 거쳐 카자흐스탄으로 넘어 가는 것이었으나 서쪽 국경은 외국인에게는 봉쇄되어 있단다.
즉 울란바타르를 중심으로 북으로 올라가 러시아나, 남으로 내려가 중국으로(나는 이 길을 따라 고비를 넘었다) 가는 통로만이 외국인의 공식루트이다. 문제는 내가 북으로 올라가 러시아로 나가도 카자흐스탄까지 1개월 비자로는 통과불능이다.
또 다른 유일한 선택은 중국을 통해서 가는 길로 북경에서 다통, 란조우, 유멘,그리고 우룸치를 거쳐 카자흐스탄으로 넘어 가는 것이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1달 비자로는 도저히 넘을 수가 없다. 이곳에서 오랫동안 사업을 해 온 몽골의 교민들은 모두 러시아를 비롯한 구 소련 국가들에서의 여행의 어려움을 치를 떨며 토로한다.
나는 그 동안 여러 나라를 여행해 오면서 여태껏 살아 온 내 방식대로 두 눈 질끈 감고 어금니 꽉 깨물고 뛰어 들었고, 넘었고, 행진을 거듭해 왔다. 그러나 이번에 나는 뜨거운 태양아래 때 아닌 엿, 그것도 물이 되어 녹아 내리는 엿을 하염없이 먹어야 했다.

내가 도보나 자전거로 아무도 넘지 못하는 고비사막을 넘었다는 것으로 만족하자!
결국 나는 앞으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북경에서 정 반대의 방향으로 몸을 돌려 북아메리카로 날아가 처음 계획의 역순으로 하기로 최종 합의를 본다. 합의를 본 이상 빨리 이곳을 나가야 한다. 이곳의 물가는 너무 비싸기 때문에 오래 머무를수록 나에게는 아픔이다.
기차역으로 가서 매표를 하려니까 난감하다. 내가 한 마디도 몽골어를 모르듯이 매표직원 또한 단 한 마디도 영어를 모른다. 과연 어떻게 이 난국을 헤쳐 나갈 수 있을까?!

울란바타르 역으로 가는 길에 나를 즐겁게 한 스트릿 아트(Street Art).

고비사막을 넘는 첫 번째 큰 과업을 완벽하게 마치고,
울란바타르 역의 플랫 홈에 접히고 쌓여져 얌전히 앉아 있는 엘 파마와 짐 보따리들.

갑자기 들리는 휴대폰의 벨 소리와 함께 이어지는 "어머, 오빠!!"
긴 암흑의 터널 속에 갑자기 희망의 섬광이 번쩍인다. 이어지는 그녀의 대화를 잘 들어보니 그녀는 분명 몽골 女. 한국어의 발음이 어눌하다. 그녀의 통화가 끝나기 무섭게 나는 그녀에게 들이댄다.
한국인과의 뜻하지 않은 만남에 그녀 또한 무척 기쁜 듯 나에게 무조건적인 호의를 베푼다. 그녀는 따라오라며 밖으로 나가 택시를 잡고 택시비조차 자신이 부담한다. 바로 길 건너편의 골목에 외국인 전용 매표소가 있는데 그곳의 매표원은 매표를 위한 기본 영어가 가능했고 그 몽골 女는 안심한 듯 나와 악수를 나눈 뒤 바람처럼 꿈처럼 사라졌다.
그녀는 한국에 2년 정도 체류한 적이 있다고 하는데 놀라운 미인이었다.

몽골인들의 이방인, 특히 '서동수공(한국인)'에 대한 호의는 사막에서도 도시에서도 여전하다.
깜박 잊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몽골에는 개조차도 나그네에게 관대하다. 거의 대부분의 개들이 끈에 묶이지 않은 채 어슬렁거리고 있었지만 나에게 점프를 한 개는 한 마리도 없었고 심각하게 짖지도 않았다. 경이롭게도 몽골에는 한국어를 이해하고 말하는 몽골인들이 엄청 많다. 실제로 이런 실정 모르는 한국의 관광객들이 한국말로 유유히 몽골인들을 비하하다가 큰 봉변을 당했다고 한다.
한국에서 체류한 적이 있는 몽골인들의 숫자가 많을 뿐 아니라, 몽고 경제 생활에 한국의 영향력이 워낙 커서 몽골의 젊은이들이 앞 다투어 한국어를 배우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의 T.V나 라디오를 접하고 있으면 한국을 뜻하는 '서동수'의 단어가 수도 없이 나의 귀를 때린다.
몽골인들은 우리와의 많은 동질감-닮은 얼굴과 몽고반점 등- 속에 유목민 특유의 담백, 간결성을 가지고 있다. 내가 2주 동안 고비의 사람들에게 거의 이틀에 한 번 꼴로 신세를 졌는데, 그들은 나에게 완벽한 환대를 베풀지만 그 무엇에 연연하거나 나그네에게도 그들 자신에게도 어떤 부담감도 갖거나 주려 하지 않는다. 다음 날 아침, 우리들에게는 너무도 친숙하고 일상적인 감동의 작별을 위한 최소한의 제스처나 세레머니도 필요 없이 그저 조용히 그 곳을 나와 나의 길을 가면 그 뿐이다. 그들은 긴 문장의 설명이 필요 없는 간결 담백한 삶의 철학을 가지고 있다.

이제 나는, 지난 2주 간 고비사막을 넘는 동안 나에게 흐뭇하고 정다운 고향의 향수를
느끼게 했던 짙은 녹색의 여객열차의 승객이 되어 고비를 넘고 있는 과거의 나를
가슴 저리며 바라보게 되었다.

고비를 넘는 2주간 나의 확실한 오아시스가 되어 주었던 철로 변의 집들.
이젠 '방관자로서의 나'가 되어 그저 담담하게 그것들을 바라보고 있다.

울란바타르-북경의 기차 티켓
나와 함께 몽골국경을 넘었던 커플(마스크를 쓴 아가씨와 한 청년) 몽골인. 그들은 북경으로 여행을 떠났었는데(연인관계는 아니고 각기 다른 여행 목적이 있는 것 같다) 청년이 호텔에 있는 동안 그녀 혼자 그녀의 지인을 만난 듯 한데 그녀는 정말 흉한 일을 당했다.
우리는 몽골국경을 넘은 후 헤어지기 전에 한 식당에서 식사를 같이 했다. 식사를 하기 위해 그녀가 마스크를 벗는 순간, 나는 숨이 멎을 듯 깜짝 놀랐다. 그녀의 얼굴엔 10여 개의 선이 그어져 있다. 그것은 분명 칼, 아니면 깨진 병에 의한 것이다. 남자조차도 끔찍한 일을 그녀가 당한 것이다. 더욱 놀란 것은 그녀의 태도로 그녀는 태연하고 담담했다. 이런 일을 당하면 거의 치명적인 상처로 슬픔으로 일관했어야 마땅함에도 그녀는,………
아무리 큰 재난을 당했어도 이미 지난 과거이기에, 다시 되돌릴 수 없기에 연연하여 땅을 치고 발을 구르며 울고 불고 해 봐야 변할게 결코 없으니 초연이 다음을 기약하는 배짱과 대담성이다. 이것은 나에게 주는 강력한 삶의 메시지임에 틀림이 없다. 그녀는 상당한 인텔리로 대학에서 독문학을 전공했고 짧으나마 독일인과 결혼도 경험했던 31세의 여성이다.

티켓 값이 100us달러이지만 국경을 넘기 위해 또 다시 피곤한 신경전을 해야 하는 것을 생각한다면 결코 비싼 것이 아니다.
6월 3일, 아침 7시 15분 열차를 타기 위해 나는 일찍 서두른다. 왜냐하면 자전거를 분리해 포장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완벽하게 자전거 포장을 끝내고 객차에 오르려고 하는데 객실승무원이 나를 막는다. 14개의 객차에는 각 객차마다 2명의 여자 승무원이 승차해서 승객을 서빙 한다. 자전거는 덩어리가 너무 커서 객실에 놓을 수 없다는 것이다. 열차 뒤 칸에 있는 화물칸에 화물처리를 해야 한다고 하는데,……..
기차는 이미 떠날 시간이고 화물칸은 완벽하게 짐이 채워져 봉쇄 되어 있는 상황에서 나의 가슴은 바짝바짝 타 들어간다. 순간 또 나를 구하기 위해 바람처럼 나타난-한국말을 잘 하는- 한 몽골인은 나의 상황을 금방 알아 차린 후 해결을 위해, 최종 출발 명령을 내리기 위해 필드에 나와 서 있는 여자 역장에게 달려가 선처를 호소한 끝에 나는 객실입구에 나의 자전거를 무사히 태울 수 있었다.
나로 인하여 열차는 15분 늦게 출발했다. 수 많은 고비를 넘기며 고비사막을 넘었지만, 또 다른 많은 고비가 나의 앞길에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몽골과 중국의 철로 폭은 서로 달라서 열차가 중국국경에 도착하면 곧 바로 열차 차량
정비소로 직행하여 승객과 화물 그대로의 상태로 모든 차량이 하나하나 각개 격파 되고
부양된 상태로 바퀴와 철로 폭이 조절 된다. 14개의 차량이 모두 교체되기까지는 3시간
이상이 소요된다. 좀처럼 보기 힘든 이 과정을 많은 외국관광객들은 앞 다투어 카메라에
기록하고 있다.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지난 3주간 중국을 달리고 몽골의 고비사막을 걸었던 그 길을 나는 다시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내 닫고 있는 것이다. 사막에서 홀로 행군을 거듭하는 동안, 나와 이 만치 떨어져 있는 철로 위를 달리며 나에게 간절하고 흐뭇한 고향이 되어 주었고 때론 격려의 나팔까지 불어 주었던 이 짙은 녹색의 열차를 타고, 나는 간다.
자전거를 끌고 밀며 힘겹게 걸어가고 있는 나의 모습이 시시각각으로 차창의 유리 위에 선명히 겹쳐지며 나의 가슴을 저리게 한다. 울란바타르 역을 출발한 지 13시간 만에 몽골국경에 도착한다. 몽골의 출입국 관리들이 전 객실을 돌며 여권 검사와 짐 체크를 한다. 내 방의 다른 3명의 몽골인 남자들은 약 10여 분만에 민첩하게 움직여 그들이 소지한 너 댓 개의 정체 모를 비닐봉지 꾸러미들을 감쪽같이 없던 일로 만들어 놓은 상태였다.
수거 해 갔던 우리들의 여권들을 되돌려 받고 천천히 굴러가던 열차가 마침내 다시 섰다. 이번엔 중국국경인 것이다. 헌데 열차가 이상한 곳에 들어와 있다. 기차의 차량 정비소로 많은 철로 근로자들이 우리를 잔뜩 기다리고 서 있다. 무슨 일일까?
철로 근로자들이 일제히 우리의 열차에 달려든다. 어느 새 중국의 출입국관리들이 승차해서 여권과 짐 체크를 반복한다. 밖을 내다보니 14개의 차량들이 하나하나 각개격파되어 유압식 기중기에 들려 공중부양 되어 있는 동안 가변 철로의 철로 폭이 변화되며 차량바퀴의 폭이 조절되고 있는 것이다.
약 3시간여 동안 이 작업이 계속된다. 몽골을 남북으로 달리고 있는 구 소련의 유물인 몽골의 철로와 중국의 철로의 폭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결코 쉽게 접하지 못하는 이 광경에 승객들, 특히 외국인 관광객들은 호기심 있게 그 과정을 지켜보며 카메라에 기록하기에 여념이 없다.

32시간 만에 나는 북경 역에 도착한다.
3주 전에 숨 가쁘게 이 앞을 지나쳐 북 서진(北 西進) 하지 않았던가?!

또 다시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해 또 다른 13시간여 만에 우리는 북경 역에 도착한다. 북경 시 한복판에 있는 북경 역을 나오니 수 많은 빌딩과 인파가 나를 반긴다. 이번이 벌써 세 번 째인 북경은 전혀 낯 설지 않다. 편안한 마음으로 널직한 자전거도로를 달려 시내에 살고 있는 외사촌 누나 집으로 향한다.
며칠간 여기서 머물면서 캐나다 행 비행기표를 예약하고 그 동안 못 먹었던 한국음식으로 재충전하며 또 다른 대륙질주를 위한 스트레치를 할 것이다.

한국인으로서 평생을 중국 정부 건설국에서 설계사로서 근무하다가 정년퇴직 후 조금은
한가한 은퇴인의 삶을 살고 있는 나의 자랑스런 외사촌 누나, 최 병순(69).
계획이 변경된 댓가로 나는 그녀와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녀는 내가 세계 여행을 할 때마다 나의 확실한 베이스캠프가 되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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