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메리카에서 만나는 우리 드라마
에디터 : 이호선

결코 변함이 없는 고요한 시골길을 달려 마카스(Macas)를 지나고, 수쿠아(Sucua), 로그로니오(Logroño)를 지나 멘데스(Mendez de Santiago)에 들어 섰으나 국경으로 가는 길이 끊긴 막다른 길의 마을이다. 6불의 호스텔에서 하루를 끝맺는다.
나의 방 바로 아래에 있는 부엌에서 이 호스텔의 주인이며 총 대장인 할머니의 부산하게 덜그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또 하루가 시작된 듯하다. 80이 훌쩍 넘었음에도 여전히 꼬장꼬장하고 기백이 넘치는 할머니는 수 십 명의 가족과 함께 이곳에서 살고 있는데 이 대형가족의 모든 식사준비를 자신이 직접 주도한다고 한다. 당당하게 노년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할머니 또한 한 폭의 장대한 자연의 풍경임에 틀림이 없다.

각 마을마다 마을 한 복판에는 이렇게 설치 된 대형 생철지붕이 반드시 있다.
이 지붕아래서 마을의 행사나 운동, 그리고 남녀의 데이트, 주민들의 휴식공간이 된다.

아무리 두메산골이라고 해도 학교는 모두에게 성지(聖地)요, 교육은 최고의 가치다.

왔던 길을 되돌아 5km를 달려 리몬(Limon)행 도로로 갈아 탄다. 한 마을이라야 십여 채의 집이 고작인 완전 두메산골의 길이 아주 가파르게 진행된다. 산후앙 보스코(San juan Bosco)를 10여km 남기고 본격적으로 시작된 비포장의 오르막과 트럭이 지날 때 마다 인정사정 없이 전신에 얻어 맞은 먼지세례로 나는 이미 초 죽음.
오래 전 넘었던 히말라야의 산길(굵은 자갈 길에 중간 중간 히말라야의 물에 잠겨버려 끊겨진 도로)과 정확하게 같은 길, 아니 더욱 심각한 길로 마치 내가 지금 악몽을 꾸고 있는 듯 하다.
내가 "에쿠아도르 팜(Ecuador Farm)"의 벽에 붙어 있던 대형 에쿠아도르 지도에서 내 앞길의 도로전망을 수 차례에 걸쳐 확인하는 동안 모든 구간은 같은 색의 명료한 직선으로 일괄처리 되어 있었는데,………

'산 후앙 보스코'에 다가오자 겨우 아스팔트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동네의 한 바이커가 나를 지겹게 따라 붙더니 씩씩대며 심각하게 나에게 묻는다,
"도대체 느그 자전거 얼마짜리야?!"
나는 대답할 기력조차 없어 못 알아들은 척 하고 그냥 그를 지나쳤다. 질문은 간단하지만 대답을 위해 계산해야 할 것이 아주 복잡하다.

아무리 세월이 흘렀어도 '체 게바라'는 중 남미의 어디에도 여전히 살아 있다.

마을 중앙에 서 있는 큰 성당 옆에 두 개의 호스텔이 모두로 7불이다. 오늘이 12월 16일 금요일 밤이다. 성탄 절이 다가오며 성당에는 연일 미사다.
성당의 미사가 한창인데 성당 건너편의 공터에선 열을 지어 늘어 선 많은 플라스틱 의자들 앞에 목사의 엄청난 볼륨의 마이크로폰 설교가 한창이다.
호스텔에 들어가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앉아 T.V를 틀자 ECTV(Ecuador TV)에서는 '김 남주와 오 지호' 주연의 드라마, "아내들의…….(제목이 스페인어로 바뀌어 나옴에 아내들까지만 해석가능)"가, 그리고 또 다른 채널에선 '윤 은혜(?!)' 주연으로 현대와 이조 말을 왕래하며 연기하는 드라마(제목 모름)가 나를 경악시킨다.
시계를 보니 7시 반으로 그야말로 황금시간 대이다. 새까맣게 잊고 있었던 전설을 청천하늘에 벼락맞듯이 번쩍 생각해 냈다. 2년 전 이란을 지날 때에는 이란에서 '대장금'과 '소 지섭', '장 혁'이 경찰관으로 나오는 드라마를 보았는데……

세계여행을 할 때마다 뼈에 사무치도록 느끼는 일이지만, 내가 한국을 떠나는 순간부터 나는 '이 호선'에 훨씬 앞서 나의 조국, 코리아(Korea)와 코리아의 세계에 미치는 영향력과 이미지라는 객관적이고 공평한 잣대에 의해 1차 검증된다.
가래침 뱉듯이 '치노'를 연발하던 이들이 "나는 코레아노(Coreano)!"를 외침과 동시에 무분별하게 돌아가던 입의 빗 장을 굳게 걸어 잠그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국력은 '나'뿐만 아니고 '우리 모두'의 모아 진 힘이다.
우리는 힘을 모아 세계 최고의 차, 가전제품, 휴대폰, 컴퓨터, 비행기… 뿐만 아니고 가장 고농축 상품인 우수한 문화상품들을 더욱 많이 만들어 이들을 감동시킬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의 그 누구도 지금 당장 양복과 넥타이, 그리고 깨꾸 일랑 다 벗어 버리고 목에 건 기관, 기업의 I.D를 자신의 책상서랍에 쳐 놓고 여권 하나 달랑 들고 달랑 반 바지에 T셔츠, 그리고 샌달 신고 자전거에 올라 탄 채 더도 말고 열흘만 중남미제국(齊國)을 여행해 봐!
페달 저으며 동양무지(東洋無知), 세계무지(世界無知)의 바다를 항해하는 동안, 우리 대한민국에 대한 고마움이 뼈에 사무치고 이내 유치찬란 할 정도의 애국자가 되어버리지.
나는 50 나이로 세계여행을 하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내가 50이 될 때까지 '코리아'는 정말 무섭게 커졌고 강해졌으며 한국은 세계라는 거울에 한 점 거짓없이 '작은 거인'으로 투영되고 있기 때문이지.
나는 이제껏 세계를 달리며 세계를 여행하고 있는 중국인 바이커는 한 명도 보지 못했고, 그 누구도 중국인 바이커를 본 적이 없다는군. 중국대륙에서조차도 만나기 힘든 장거리 바이커들을 세계에서 만나는 일은 결코 없을 거야.
좌우지간 만약 어떤 대담한 중국인 바이커가 중남미를 여행하려 한다면 과연 몇 일을 버티다 집어치울까?!
중국인은 대국인 기질이 있어 유연자약 하다지만 결코 모를 일이지. 힘들고 어려운 일은 끈질기게 달라붙어 결국은 그것을 이겨내곤 하는 것이 인간이지만 아니꼬운 일, 특히 자신의 조국과 자신이 땅바닥에 가래침처럼 내 뱉어지는 상황을 견디기란 실제로 당하지 않고는 상상조차 못할 정도로 뼈가 부딪치고 살이 떨리는 경험임에 틀림 없어.
자신의 최고, 그리고 세계 최고를 향해 경주한다는 것은 우리들 삶의 최고의 가치지.
어차피 때가 되면 죽는 것이 인간이고 죽는 그 순간까지 자신의 최고를 향해 자신의 모든 것을 갈고 닦는 것이 인생이야.
최고로 가는 동안 겪어야 하는 많은 시행착오에서 오는 좌절, 절망, 스트레스조차도 당연히 우리자신이 감싸 안고 가야 할 우리들 삶의 중요한 가치잖아.
좌절과 절망, 그리고 압박감이 두려우면 그저 죽은 듯이 살다가 죽어가면 될 뿐으로 입에 거품 물며 논 할 '인생'도 '나라'도 없어.
Vamos Corea!!(가자, 가자, 코리아!)

"까마귀 모여있는 곳엔, 백로든 왜가리든 그 누구도 가지 말거라! 지독한 악취와 썩어가고 있는 고기만 있을 뿐이다."
도로를 달리다 보면 결코 보고 싶지 않은 눔 스키들이지만 수 없이 봐야 한다. 도로 변에는 수 많은 개 스키들의 사체가 있고, 그 것들이 있는 곳엔 또 하늘의 하이에나, 흉측한 까마귀가 있다.


중남미, 특히 콜롬비아와 에쿠아도르에서 제일 많이 보게 되는 도로 표지판.

은은한 그것이 아닌 자지러지는 성당의 종소리에 침대를 튀어 올라 앉는다. 새벽 5시다. 6시경 여관을 나와 사람들에게 묻고 물으며 내 앞 길의 운수를 점친다. 모두 한결같이 길어야 10km정도만 비포장을 참고 견디면 그 다음부터는 콧노래 부르며 달리는 아스팔트가 펼쳐질 것이라는 아주 희망적인 점(占)쾌만을 집어 든다.
어제도 그랬듯이 오르막 길 10km, 더군다나 비포장 자갈 길의 그것이란 결코 만만치 않은 험난한 '구도(求道)의 길'이다. 어제의 끔찍함이 되살아나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으나 몇 번의 심호흡을 거듭하는 가운데 나는 이미 구도(求道)의 길을 걷고 있었다.
많은 이들이 명쾌하게 집어 들었던 행운의 점(占)쾌는 불행하게도 많은 오차로 빗나가며 나를, 그리고 나의 의지를 마비시킨다. 눈 앞이 캄캄할 뿐이다. 나는 산 송장이 되어 걷고 또 걸었다.
내가 그 동안 세계여행을 하면서 결코 경험하지 못한 길, 지상 최악의 길이 바로 여기, 에쿠아도르의 산 속에 있었다. 온갖 크기의 자갈들이 도로 위에 박혀 있는 지옥으로 가는 길(The road to Hell) 앞에 나는 그저 절망 할 뿐이다.
완벽한 모래의 바다를 건너기 위해 덜그럭거리며 철길 위를 걸었던 고비사막의 악몽이 또 다시 현실로 재현되고 있다. 자전거를 끌고 내려 가야 하니 내리막 길이 더욱 끔찍스럽다.
부러져 철사로 간신히 얽어 매 놓은 자전거 뒤 짐받이대가 끊임없이 덜그럭대는 자전거의 충동으로 이미 내려 앉아 버렸고 멕시코로 오기 바로 전, 뉴욕에서 새로 갈은 타이어는 자갈에 부르트고 끝내 허물이 벗겨지기 시작한다. 정말 다 집어 치우고 싶은 심정이다.
수 많은 빈 픽업트럭들이 무심히 나를 지나친다. 오후 4 시경 픽업트럭 한 대가 꿈같이 내 앞에 선다. 나는 이미 자전거를 들 기력조차 없어 그들 두 명이 나의 자전거를 픽업트럭의 짐칸에 올려놓고 나는 그저 짐칸에 올라 자전거를 잡고 앉아있다.
덜그럭 거리며 불과 200-300백m나 갔을까 말까 갑자기 내가 탄 픽업트럭이 비단같이 부드러운 주단의 길 위를 달리기 시작한다.

"어라, 이게 도대체 무슨 개 같은 경우냐고?!"
기가 막혀 혀를 차고 있는 사이, 트럭은 약 2km에 달하는 새로 깔아놓은 아스팔트의 내리막 길을 달려 구알라퀴사(Gualaquiza)시의 한 복판에 나를 내려 놓는다.

나를 산송장으로 만들었던 총 80여 km의 지상 최악의 비포장 도로.
철사로 간신히 얽어 매어 놓은 부러진 짐받이 대는 또 다시 무너져 내렸고 타이어는 부르트다 못해 허물이 벗겨지기 시작했다. 몇 일을 덜거덕거리며 걸어야 했다.



결국 자갈길 60km의 길은 오늘 내가 짊어져야 할 운명의 과업이었던 거야!
길어야 10km정도로 끝날 것이라던 비포장의 자갈 길은 결국 60km로 연장되었고 이 지옥의 길을 아침 6시 반부터 4시가 지날 때까지 걷고 또 걸었다.
나의 체력도 의지력도 너덜너덜한 걸레쪼가리가 된 채, 터덜터덜 거리를 걷다가 작은 슈퍼에 들러 차디 찬 콜라 한 병을 산다. 헌데 주인 아줌마의 환한 미소가 지칠 대로 지친 나를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그녀, 쿠만다(Cumanda)의 환한 미소 한 방에 오늘 하루의 지옥의 행군은 그저 또 한 장의 추억의 사진으로 기억될 뿐으로 나는 이제껏 모든 것을 까맣게 잊은 채, 차디찬 콜라 한 병에 온 몸을 떤다. 그녀의 가게를 스쳐 지나가는 사람마다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다.
'한 미소'가 밝은 등불이 되어 한 주위, 한 동네를 밝히고 끝내 먼 이국 땅에서 온 나그네까지 감동시킨다.
나는 내려앉은 자전거의 뒤 짐받이 대를 수리할 생각으로 서둘러 호스텔을 찾아 언덕을 오르고 있는데 조금 전 그 슈퍼 앞에서 보았던 꼬마가 숨을 헐떡거리며 나를 쫓아 달려온다. 그는 나에게 슈퍼 아줌마의 명령이라며 오렌지 주스 한 통을 나에게 건네주고는 쏜살같이 가게를 향해 달려간다.
"참, 참, 이렇게 고마울 수가 있나…"

죽음같은 긴 비포장도로의 행진 후, 결코 길지 않은 두 다리와 허리 쭉 펴고
하룻밤의 휴식을 취했던 구아라퀴사(Gualaquiza)시(市)의 5불 호스텔과 시내


'한 미소'가 밝은 등불이 되어 한 거리, 한 마을을 밝히고, 끝내 이역만리서 온
지칠 대로 지친 한 나그네까지…
구아라퀴사(Gualaquiza)시(市)의 '한 미소'와 따스한 마음의 주인공, 쿠만다(Cumanda)와 태권도에 만취되어 있는 그녀의 아들, 14세의 아르놀드(Arnold).
그 또한 '한 미소'의 주인공이다.


몇 분도 안 지나 호스텔(5불)을 발견하고 그대로 방바닥에 주저 앉아 짐받이 받침대수리에 들어간다. 2 시간 가까이 새 철사로 또 다시 대강 얽어 매 매달아 놓았다.
또 가는 데까지 가보자꾸나! 그 길로 방을 나와 그녀에게 고마움을 전하려고 슈퍼로 내려 가니 아까 보지 못한 소년이 카운터에 서 있다. 얼굴이 희고 아주 잘 생겼는데 슈퍼 아줌마와 붕어빵이다.
그녀의 아들이구만! 그는 아르놀드(Arnold)로 14살이라고 하는데 대형트럭을 몰며 가게에서 취급하는 생필품들을 직접 조달하며 엄마와 함께 강력한 사업파트너로 맹활약을 하고 있는데 좋아하는 운동도 태권도, 하고 싶은 운동도 오로지 태권도로 태권도에 푹 빠져 있는 소년이다.
그들은 산골 마을에 있는 대부분의 시골 소년, 시골 아줌마들과는 완전히 다르게 그들 자신의 홈페이지를 갖고 있을 정도로 세계를 인식하고 글로벌시대를 확실하게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었다. 나는 내일 아침 7시경에 카메라를 갖고 다시 오마 하고 그들과 작별을 한 뒤 여관으로 돌아온다.

은은한 성당의 종소리에 눈을 뜬다. 새벽 6시. 잠시 눈을 감고 뭉그적대고 있는 데 또 한 번의 강력한 종소리에 화들짝 일어난다.
"총 병사 떠나!" 7시를 10분쯤 지나 슈퍼에 도착해 있자니 흰색 대형트럭이 헐레벌떡 나를 향해 달려와 선다. 허어, 정말 운전석에는 아르놀드가 앉아 있고 옆에 그의 엄마, 쿠만다가 앉아 있다.
가게 문을 열고 대강의 작업이 끝나자, 나는 그들과 한 장의 기념사진을 만들고 그것을 간직한 채 그들을 뒤로 한다. 쿠만다는 뒤돌아서는 나를 잡고 냉장고를 열더니 두 손에 잡히는 대로 음료수를 건네주는데 하나같이 비싼 것들이다. 모두는 너무 무거워 가져갈 수 없다며 제일 비싸 보이는 아이스크림 하나를 골라 그 자리에서 먹어 치우고 나의 길을 재촉한다. 피부색이 다르고, 말이 다르고, 그리고 나라가 달라도 마음은 하나다.

험난한 비포장 길을 구른 후, 허물이 벗겨져 버린 타이어

내려 앉은 짐받이 대를 철사로 다시 엮어 걸어 놓았다.

구알라퀴사 시(市)를 나서자 평탄한 아스팔트길이 느긋하게 나를 기다리고 있다. 조용한 시골 길을 어슬렁거리며 달려간다. 지독한 '깡촌'같은데 간혹 만나는 사람들로부터 "하퐁(Japon)?-Japan" "하포네사(Japonesa)?-Japanese"라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그렇다면 이 길을 언젠가 일본인 바이커가 지나갔다는 얘기가 되는가?!
한 동안 계속되던 평화스런 평지의 길이 내리막 길로 바뀌기 시작한다. 그저께 오후부터 어제 하루 종일 기어 올라왔으니 이제 내려 갈 때도 되었지. 내리막 길에서 노란 영업용 택시 한 대가 나와 경주하자는 듯이 천천히 달리다가 나와 가까워지면 빨리 달리기를 반복하면서 나를 오락가락하게 만든다.
나는 브레이크를 전혀 안 잡은 채 그 택시와 잡힐 듯 말 듯한 거리를 유지하며 숨 가뿐 경주를 거듭하던 중, 완벽한 90도 커브에 걸려 버렸다. 철제(鐵製)가드레일이 하얗게 질려 "No!"를 연발하며 두 손을 가로 젓지만 나는 이미 그를 향해 맹렬한 속도로 돌진하고 있다.
나의 가슴은 이미 질린 정도가 아니라 꽁꽁 얼어 붙어 있다. 가드레일과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 브레이크를 잡는 것만으로는 충돌을 면할 길이 없다. 핸들을 계속 틀고 커브를 돌며 브레이크를 잡는 필살 기(必殺技)가 간신히 먹히며 죽음의 그림자를 살짝 비껴 정지한다.
"휴-우! 엘 파마, 하마터면 우리 둘, 뼈도 못 추릴 뻔 했어!"
순간, 그 동안 도로를 달려오며 지나친 도로변의 무수한 십자가들과 똑 같은 두 개의 십자가가 나의 눈을 스치듯 지나간다.
'아닌 백주(白晝)에 도깨비'같은 그 노란 택시는 흔적도 없이 바람과 함께 사라진 지 오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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