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발 2280m 전망대 위에서 목욕
에디터 : 이호선

오늘이 12월 하고도 19일이다. 5월 7일 한국을 떠나면서 시작된 여름은 중국, 몽고, 북미, 중미, 그리고 지금의 남미를 지나는 동안 한 번도 쉬거나 다른 이름의 계절로 바뀌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아직도 나의 여름은 진행형이다.
'비의 나그네'에서 '여름 나그네'까지 되어 버렸지 뭐야!
열(熱)과는 상극(相剋)의 소양인(少陽人)인 내가 줄기차게 이어지고 있는 여름 속에서 살아 기어 나가기 위해서는 열을 좋아하는 소음인(少陰人)으로 체질개혁을 해야만 비로소 가능하다는 나의 운명이……
그게 글쎄, 동물의 털갈이, 허물 벗기가 아닌 '체질 갈이'란 말이야!!

끈기 없는 밥 위에 기름에 튀긴 감자와 구운 닭고기조각, 그리고 채 썰은 양파.
아주 상습적인 메뉴이다.


에쿠아도르는 중남미의 다른 나라들에 비해 돼지고기를 많이 먹고 있으며
내장 등을 많이 먹는다.

오늘도 여전히 쏟아져 흘러 내리는 땀방울을 운명처럼 두 손도 모자라 옷자락, 모자까지 동원해 훔쳐가며 헐레벌떡 달린 것이 고작 83km! 어제는 비포장을 하루 종일 걸어 60km!
북미 횡단 때는 하루 평균 130km-140km였어, 정말 그랬잖아!
멕시코와 중미는 그런대로 평균 100km에 +α가 있었어.
그런데 말이야, 남미의 시작 콜롬비아에서부터 도로가 아주 작정을 하고 나의 무릎과 숨통을 유린하는군. 정말 어이 없는 일은 조금 뿐이 못간 날에는 배가 더 고프고 더 먹어야 한다는 거야!
이 기묘한 사실이 나를 두 번 죽인다니까, 글쎄.

숨비(Zumbi)라는 손바닥만한 마을에 도착했는데 호스텔이 통틀어 2개뿐이라 찾고 자실 필요도 없다. 이 정도 규모의 마을이 최고로 나의 맘에 드는 곳이다.
입구에 들어서자 호스텔 앞에 2명의 이 마을 보안관이 이방인의 출현에 잠시 눈을 크게 뜬다. 항상 그래왔듯이 가볍게 잽을 날리듯 선수를 치는 나의 인사와 이 마을에 대한 찬사에 그들은 더 이상 나에게 흥미가 없는 듯 어디론가 사라졌다.
땅굴 같은 여관의 입구에 들어서서 허름한 책상 하나 달랑 놓여 있을 뿐인 사무실의 비틀어진 문짝을 밀고 들어가니,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앉아 있던 60대 초반의 사나이가 무덤덤하게 나를 반긴다. 방값은 예상한대로 5불이다.
그의 중요한 일과가 바로 손님의 명세서를 두껍고 대문짝만한 장부 위에 단 한 자의 오자나 흔들림 없이 정서(正書)하는 일 인듯하다. 이름, 국적, 전화번호, 거주지, 출발지, 행선지 등을 촘촘히 줄 쳐진 선에 맞추어 결코 서두르지 않고 인내심 있게 한 자 한 자 마른 침을 넘겨가며 적어 나간다.
수 십 달(月)치로 되어 보이는 두꺼운 장부에는 이곳을 스쳐간 외국인이란 단 한 명도 없는 것 같다.
헌데 한결같이 방값이 3불로 적혀있어 내가 그에게 그것을 따지자, 그는 자신은 사장도 아닌 일개 종업원으로 외국인인 나에게서 5불을 안 받으면 자신의 목은 이미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이 되니 더 이상 묻지 말라고 간곡히 당부를 한다.
정신 사나운 T.V도 있고 문짝에 다른 방과 다르게 래커 칠을 해 부티가 나긴 난다.
오늘 밤도 마을 한 가운데에 있는 성당에는 온 동네 사람들이 모인 대규모 미사가 열리고 있다.
이렇게 감사와 축복의 계절은 속절없이 깊어만 간다.



잰 걸음으로 등교 길을 서두르고 있는 아이들을 뚫고 마을 입구로 나와 사모라(Zamora)시(市)를 향해 페달 젖기를 계속한다. 아침 7 시경에 불과하나 주위는 이미 뜨겁게 달아 올라 있다. 내 셔츠의 지퍼는 이미 반 이상 내려져 있다.
손에 손을 잡고 학교로 향하는 많은 아이들의 발걸음이 춤추듯 경쾌하다. 뜨거운 열기의 한 복판을 뚫고 30여 km를 달리다 보니 다짜고짜 도로정면으로 사모라 시의 상징이기도 한, 아주 크고 멋있는 성당이 나타나며 사모라 시(市)에 도착했음을 공식 선언한다.
강을 끼고 있는 산골짜기의 산등성이를 따라 이루어진 사모라 시를 관통하기 위해서 경사 각이 급격하게 높아진 도로를 한참 동안 기어오른다. 내 앞길의 전망에 대해 물은 불특정 다수의 행인들로부터 나온 한결 같은 의견은 아주 불길했다.
"사모라 시부터 급격한 오르막의 길이 계속된다!"
나는 가파른 언덕을 오르면서 또 다시 마음의 준비를 한다. 시(市) 최후의 가게인 듯한 곳에서 큰 봉지의 빵과 물을 사 예비식량과 물을 확보한 후, 고요한 산골짜기의 도로로 순순히 달려 들어간다.

다음에 나타날 도시가 이 지역 최대도시인 로하(Loja)인데 60km나 떨어져 있다. 보통 20-30km에 작은 도시가 나타나곤 하는데 갑자기 인터벌이 60으로 튄다는 것은 로하 시(市)까지 무인지경의 첩첩 산중이라는 얘기가 되지 않는가?! 한 걸음이라도 빨리 지나가는 것만이 최선의 길이다. 역시 도로변엔 아무 것도 없다. 마을은커녕 집 한 채 보이지 않는다. 욕심 버리고 마음을 비운 채, 페달 질 하다가 한계에 다다르면 걷고, 다시 페달 질 하다가 걷고……



어느덧 저녁 6시경이 되자, 어둠이 늘어지게 긴 하품과 함께 기지개를 쩍지게 펴더니 가볍게 몸을 풀기 시작한다. 로하를 20여km 남겨 놓은 지점에 '생태보존지역'이란 간판이 있고, 그 간판에는 이 곳의 고도가 해발 2,280m이라고 적혀 있다.
잠시 자전거를 세워 놓고 주위를 둘러보고 있던 중, 집이 서 있기에는 전혀 터무니 없는, 낭떠러지 숲 속에 칙칙한 암적색의 큰 기와 집이 보인다.
순간, "산장의 여인"이 노래가 아닌 턱 밑의 현실이 되어 나의 온 몸을 춤추게 한다. 간판이 서 있는 뒤쪽의 숲 속으로 가늘디 가는 내리막의 오솔길이 있어, 일단 자전거를 숲 속에 뉘여 놓고 사람들이 지나 다닌 흔적이 거의 없는 좁은 오솔길을 100m정도 걸어 내려가니 뜻밖에 지방정부가 생태교육장 용으로 지은 산장이, 하지만 폐쇄 된 지 오래 된 듯 사방의 입구는 쇠창살과 함께 묵직한 자물쇠로 바퀴벌레는 커녕 개미 한 마리도 무단 침입하지 못하도록 철통같이 봉쇄된 채, 서 있었다.

나의 일곱 빛깔의 꿈은 저 산 너머로 보기 좋게 사라졌다. 유리창 너머 어렴풋이 들여다 보이는 목제 이층 침대들과 긴 가죽 카우치는 그저 그림의 떡이지만 이 곳은 이제껏 세계여행을 해오는 동안, 내가 만난 지상 최고의 야영장이다. 넓은 공간의 전망대에 서 있자니 수 많은 산들이 모두 내 발 밑에 있고 바람은 상쾌하기만 하다. 무엇보다 전망대 쪽으로 지붕이 길게 연장되어있어 하늘이 무너져내려도 루루랄라 하며 잘 수 있다.

"아이고, 내 정신 좀 보게. 제일 먼저 체크해야 할 것을 깜빡 하고 있었네!" 나는 서둘러 산장주위를 돌며 수원(水源)을 찾기 시작한다. 먹을 물은 겨우 있으나 샤워까지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수 리터(Litre)의 물을 싣고 기어올라 왔지만 수 십km를 등산하는 동안 짜디 짠 땀 방울로 바뀌어 사라졌다.
"그러면 그렇지!" 나는 수풀 속에 당당히 서 있는 수도 꼭지를 발견하고 의기양양하며 밸브를 열었는데 불행하게도 전혀 응답이 없다.
통쾌한 물소리가 아닌 '침묵의 소리'뿐!
나는 주저 없이 왔던 길을 되돌아 오솔길을 뛰어 나와 숲 속에 누워있던 자전거를 일으켜 세우고 도로를 향해 힘겨운 페달 젖기를 시작한다. 아직까지는 물인지 오줌인지 정도는 육안으로 구별이 될 정도의 가는 어둠인지라 도로변에 떨어져 있는 큰 음료수병을 주워 도로변을 따라 천천히 움직이며 물소리 듣기에 온 신경을 집중한다.
오늘 오전과 낮 동안에 지났던 지역은 물이 지천이었으나 오후가 되면서부터는 완벽하게 메마른 지역만을 지나왔다. 땀으로 떡이 되어 있는 몸으로 잠을 잔다는 것은 빗물로 절은 침낭 속에서 자는 것 만큼이나 고통스럽다.

300m정도 지나왔을까?! 도로변의 배수로를 따라 아주 가는 한 줄기 물줄기가 흐른다.
"흐흐흐, 그러면 그렇지!" 물줄기를 따라 올라 가보니 쪼개진 바위틈으로 물이 아주 힘겹게 흘러 나오고 있는데 물통을 들이대어 물을 받을 수가 없어 다시 도로를 걸어 내려와 배수로의 물이 높은 낙차로 떨어지며 콘크리트의 배수관으로 연결되는 지점에서 온 몸을 꺼꾸로 쳐 박고 물을 받는다.
주위를 돌아, 버려 진 큰 음료수 병(1.5L)을 하나 더 주워 결국 4L의 물을 받아 다시 오던 길을 되돌아 산장으로 콧노래 부르며 들어오니 나의 산장은 이미 어둠 속에 가라앉아 있었지만, 결코 두텁지 않은 구름들 사이로 둥근 달빛(오늘이 12월 20일)이 아련히 세상 위에 퍼져 포샤샤한 밤빛이 기묘하고 야릇하다.

나는 해발 2,280m의 전망대 위에 아주 시원하게 서서 천하를 발 밑에 내려다 보며 3L의 물로 이번엔 샤워가 아닌 목욕을 했다. 나는 산장의 두 기둥에 해먹을 치고 모기 장을 덮었다. 분명 밤 늦게부터 기온이 떨어지겠지만 그때는 옷을 껴입고 침낭 속으로 기어들어가면 될 것이다.
바람이 계속 불고 있어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하는 검은 놈들이 아직은 없는 것 같다. 이대로 잠자기에는 주위의 풍경과 분위기가 너무 아깝고 아쉬워 해먹에 누워 아름다운 밤 빛, 밤 내음, 그리고 밤의 소리에 흠뻑 취한 채 그저 하염없이 흔들리고 있을 뿐이다.
'맞아! 그랬지, 수 많은 동서양의 멜로 영화에는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전망대의 플로어 위에서 턱시도와 이브닝드레스를 입은 두 남녀 주인공들이 샴페인을 마시고 사랑을 속삭이고 춤을 추는 장면이 반드시 나오곤 했어.'
"어 이, 당직 병! 이제 그만 취침나발 불지?!!"

포샤샤 한 달빛 아래, 천하를 내려다보는 플로어 위에서 한 판의 '달밤의 체조'를 하며
길지 않은 밤을 보냈던 지상최고의 야영장, 폐쇄 된 생태학습용 산장.



나는 이제 오늘에 더 이상 아쉬울 것이 없네. 목욕하기 전에, 훌훌 거칠 것 전혀 없는 완벽한 자유의 몸으로 1시간 동안 천하를 내려다보면서 내 평생의 과업인 셰도우 복싱(Shadow Boxing)까지 끝마치지 않았겠냐!!
셰도우 복싱(Shadow Boxing)!
누구든 자신의 삶을 최후의 그 순간까지 끌고 밀고 가기 위해선 자신만의 원칙이 필요하지만 그 원칙이 중간에 삼천포로 빠져 후들대다가 물 속으로 침몰해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철저한 자기훈련이 필요해. 자신만의 '고독의 링'을 만들고 그 위에 홀로 서서 침묵의 순간을 응시하며 자신의 체력과 인내력의 극한까지 몰고 가며 때론 자기자신을 인정 사정없이 두들겨 패기도하면서 자기자신과의 허심탄회, 솔직 담백한 대화를 계속하는 것이지.
치열한 자신과의 일전을 벌인 후, 자신의 온 몸에 덕지덕지 붙어 있던 불신과 불 확실의 찌꺼기들은 펑펑 쏟아져 흘러내리는 땀과 함께 녹아 시원한 한 줄기 물과 함께 씻겨져 사라지며 자신의 원칙과 확신만이 더욱 단단한 결정체로 남고 말지.
결코 생각만의 그것이 아닌, 이런 치열하고 심각한 행위를 반복하는 가운데 원칙은 지켜지고 나의 생존 또한 계속되는 거야. 거울 앞에 서서, 혹은 허공에 걸어놓은 가상의 대형 거울을 마주하며 벌어지는 나 홀로의 복싱! 침묵과 고요 속에 나의 두 눈을 응시하고 나의 거친 숨소리를 들어가며 원 투를, 그리고 연타를 뻗는다.
이것은 나 자신의 통제와 나 자신과의 정직한 대화를 할 수 있는 나의 의식으로 이미 30여 년을 계속 해 왔어. 세계여행 중에서도 어김없이 거행되어 온 나의 삶, 그 자체야.
셰도우 복싱(Shadow Boxing)이 계속되는 거울 위로 세계가, 그리고 나의 삶 자체가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자연의 음향 속에 계속되고 있는 나의 독백, 가늘지만 선명한 외줄기의 질주, 그리고 쉼 없이 반복되는 고독한 셰도우 복싱.
잽, 잽, 원 투.
잽, 잽, 원 투, 좌우 훅에 이어지는 좌우 어퍼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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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도우 복싱이 계속되듯 나의 페달 젖기는 계속되고 나의 삶 또한 계속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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