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를 떠나 아프리카 대륙에 서다.
에디터 : 이호선

퍼스에 가까워오자 버스정류장의 구조물까지 눈에 띈다.
구조물의 벽에는 호주의 명물인 캥거루와
도로의 명물이며 괴물인 로드 트레인(Road Train)이 그려져 있다.

일요일 오전이라 썰렁하기만 한 퍼스 시내. '파리와 굶주림'으로 압축표현 된 41일간의 호주횡단이 드디어 막을 내렸다.
한계점까지 다다른 자전거의 상태까지 합세한 트리플펀치로 '특별한 나라', 호주에 와서 '특별한 경험'을 했다.

'파리와 굶주림'으로 압축(Zip)처리 된 41일 간의 호주 횡단이 끝났다.
시드니에서 퍼스까지 4,024km로 거리 상으론 결코 길지도, 그리고 결코 짧지도 않은 대륙이지만 터무니 없는 파리떼들과 비싼 물가, 그리고 고통의 신음과 비명을 연발하며 비틀거리고 무너져가는 자전거로 하루 하루는 인왕산 도사가 되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고행의 시험처럼 무자비하고 어렵기만 했다. 지난 41일 간을 결코 되 새기고 싶지가 않을 정도로 하루하루는 정말 잔인했다.

싼 여관을 찾아 헤매다가 나의 눈을 번쩍 뜨게 한 Barrack St & Murray St에 있는 "하이마트(Hi Mart)" 호주 이민 6년 차인 사장님의 앙증맞은 딸, '엘렌'과 똑같이 호주 이민 6년 차로 학업과 일을 병행하고 있는 믿음직스런 파트타임 캐셔인 '광연'이 바이크매거진을 통해 자랑스런 한국인 으로서의 자신들의 건재함을 세계 만방에 과시한다.
"아자, Korea!"

시드니보다는 더욱 작고 아담해 보이는 퍼스에 입성을 했으나 도시는 정말 고요하다. 일요일 아침은 이 세상의 어디에 가도 한결같이 고요하고 평화스럽다. 나를 맞이 할 그 누가 있는 것도 아니고, 또 그 누구를 기다리는 것은 더욱 아니지만 한 개 대륙이 끝날 때마다 마치 길을 잃고 헤매는 미아(迷兒), 내지는 고아(孤兒)처럼 잠시나마 미적미적대며 주위를 둘러 보고 하릴없이 헤매곤 한다.

그렇지, 내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싼 여관을 찾아내는 일이야!
나는 기합 빠져 있는 다리에 힘을 모으고 페달 질을 시작한다. 중심가라곤 하지만 그다지 크지 않기에 자전거를 끌고 걷다 보니 많지는 않지만 띄엄띄엄 계속 이어지고 있는 한국인 식당과 마트가 나를 환영한다.
노쓰브릿지(North Bridge)를 건너니 시드니처럼 특별하게 '차이나 타운'으로 지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지 않은 수의 중국인 식당과 마트가 줄을 서 있다. 노쓰브릿지의 도로변에 몇 개의 백패커(Backpacker)들을 위한 여관들이 나타나며 내가 호주에서 가야 할 최종 역에 도착했음을 알린다.

시드니에서 퍼스까지 4,024km의 여정이었다.
(파리들은 내가 노트 위에 제대로 내 생각을 적을 시간적 여유조차 주지 않는다.)
 나는 그 동안 호주의 퍼스까지 총 19,327km를 달렸다.

언제나 나와 함께 하는 세계지도는 10개월이 넘는 사이 너덜너덜 해졌고
지도의 밑 부분을 뉴욕의 중국인 숙소에 있을 때 잃었다.

한국, 일본, 타이완이 대세인 아시아인들은 이 '작은 유럽'을 잠깐 스쳐 지나가는 나그네가 되어 소리 없이 나타나 지내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간다.
이렇게 객(客) 중에 객인 아시아인들 가운데 2명의 아시안 걸이 나의 시선을 끌어 당긴다.
타이완에서 워킹 홀리데이로 이곳에 온 레이(Lei)와 치우(Chiu)는 아주 명랑하고 밝은 얼굴로 나를 즐겁게 한다.
똘망 똘망한 두 눈을 반짝이며 씩씩하게 식당을 활보하고 있는 치우(Chiu)에게
"중고생도 워킹 홀리데이로 여기에 올 수가 있는 거냐?!"
라는 나의 심각한 물음에,
"너는 나를 아주 우습게 보고 있군!"
그리고는 왕방울 같은 두 눈에 부당한 힘을 주며 위협조로 속삭인다.
"나는 올해 25살이라고!!"

내가 머물고 있는 백패커스(Backpackers Inn)에서 기거하고 있는 투숙객들은 거의가 워킹 홀리데이(Working Holiday)로 세계각지에서 몰려 온 젊은이(호주와 같은 영어권인 영국방면의 친구들과 독일, 프랑스, 그리고 이태리 쪽의 친구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들로 총원 50명 정도는 됨직한데 방값이 최고로 싼 내 방의 총원은 16명으로 가장 많다(하루 18호주달러).
식사시간이 되면 1층에 있는 대형주방은 아비규환으로 치열한 요리의 현장, 치열한 생존경쟁의 현장이 되는데 식탁 위에 올려놓은 나의 계란이나 식 자재들이 순식간에 없어지기도 한다. 많은 이들이 긴 식탁 위에 자신들의 식 자재들을 되는 대로 올려 놓고 요리를 하는 동안 혼동되어 남의 것을 본의 아니게 집어가는 것인데 냉장고안에 들어 있던 자신의 음식물들조차 종종 엉뚱한 사람의 뱃속을 채우기 일쑤이다.
성향이 거의 비슷한 유럽인들이 몰려있다 보니 이 여관은 졸지에 '작은 유럽'이 되고 저녁은 어김없이 유럽의 정신 사나운 선술집이 되어 버린다. 한국인들이 술을 엄청 사랑하고 있듯이 이들의 술 사랑 또한 대단하다. 이들의 주종(酎種)은 역시 맥주로 쉬는 날엔 오전부터 빨기 시작한다. 하기야 나도 그들 나이 때, 지금의 그들과 똑 같은 짓을 아주 태연하게 하고 있었지.

영자와 병태가 술에 취하면 개가 되듯, 톰과 쥬디 또한 술에 취하면 예외 없이 개가 된다. 동서고금,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술 앞에 장사(壯士)없다. 한국, 일본, 타이완이 대세인 아시아인들은 이 '작은 유럽'을 잠깐 스쳐 지나가는 객(客)중의 객이 되어 소리 없이 나타나 지내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간다.

3월 12일 터진 일본의 대형 쓰나미는 일본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강타했다.
나는 이 참사를 축복의 양식과 함께 감당할 수 없는 미소의 쓰나미로 나를 강타한 브래드(Brad)가족으로부터 처음 접하게 되었는데 내가 퍼스에 도착할 즈음에는 쓰나미 뿐만 아니라 원자력발전소의 핵 누출까지 더하며 최악의 국면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 곳 퍼스에서 살거나 여행하고 있는 일본인들도 조국의 아픔을 함께하며 하나가 되었다. 뮤지션들은 뮤지션대로 아티스트들은 아티스트대로 그들의 음악과 미술을 길거리에서 연출하며 조국을 위한 기금 모으기에 뛰어들었다.
"Hope for Japan"
"Help Japan"을 내건 단순한 동정의 모금운동이 아닌, 그들의 삶의 최고가치인 예술을 아낌없이 연출하고 있는 진한 삶의 현장이었기에 더욱 아름다운 감동을 관객들에게 선사했다.
나는 우리들에게 가장 가까운 나라, 일본의 재난에 마음이 무겁고 가슴이 답답한 심정으로 나의 오랜 친구들 같은 그들의 퍼포먼스를 바라다 본다.
'아자, Japan!'



내가 횡단해야 할 다음 대륙은 '아프리카'로 남아공의 '요하네스버그' 행 티켓을 예약하기 위해 여행사를 찾아 거리를 걷는다. 퍼스(Perth)는 시드니보다 규모가 작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도시의 분위기가 아담하고 조용하다.
머레이(Murray)St와 헤이(Hay)St에 형성된 쇼핑몰의 광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곳으로 호주각지와 세계각지에서 몰려 든 결코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의 퍼포먼스가 줄을 잇고 있는데, "Hope for Japan"과 "Help for Japan!"을 내걸고 대형재해를 당한 일본을 돕기 위한 성금을 모으기 위해 퍼스에 있는 일본의 젊은 뮤지션들과 아티스트들이 하나로 뭉쳤다. 그들은 단순한 동정의 모금운동이 아닌, 그들 삶의 최고가치인 예술을 아낌없이 연출하며 관객들에게 강력한 감동을 선사한다. 나는 우리들에게 가장 가까운 나라, 일본의 재난에 마음이 무겁고 가슴이 답답한 심정으로 나의 오랜 친구들 같은 그들의 퍼포먼스를 바라다 본다.

어제, 바람과 함께 차가운 비가 내렸고 오늘 하루 종일 쌀쌀한 날씨가 계속되고 있다. 오늘이 4월 10일로, 나는 분명 뭔가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직감한다. 오늘, 새벽을 달리기 위해 여관 문을 열었을 때, 차가운 공기가 나의 전신을 흔들었다. 가을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백패커스에서의 지난 2주간이 정말 꿈같이 흘러가 버렸다. 이제 떠날 때가 온 것이다. 힘겹게 나에게 다가 온 나의 계절, 가을에 결코 내키지 않는 안녕을 고하며 나는 또 뜨거운 태양과 숨막히는 여름을 향해 날아간다.

짐받이를 고정하는 부분이 모두 내려 앉아서 더 이상 여행용으로 사용이 어려워진 엘파마 1호

군데군데 철사 등으로 이어붙여 겨우 호주 횡단까지 마쳤다.

짐받이 랙을 달지 못하는 자전거는 더 이상 여행용으로 사용하기 어렵다.


'엘파마'가 19,327km를 달리는 위업을 달성하고 은퇴를 한다.
"명마, '엘파마'는 결코 죽지 않고 잠시 사라질 뿐이다!"

한국의 엘파마 제조사인 MBS는 여행을 이어갈 수 있도록 새로운 엘파마2호를
다음 목적지인 아프리카 남아공으로 보냈다.


서울 사령부에서 전문이 하달되었다.

작전명: Black Storm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수도, 요하네스버그(Johannesburg)의 북쪽근교, 프레토리아(Pretoria)에 위치한 한국대사관에서 '엘파마 2호'를 접수한 후 검은 대륙, 아프리카를 질주하라!
어떤 사고가 났다고 해도 SOS를 결코 보내지 마라. 불행하게도 우리는 너를 위해 그 어떤 구조대도 파견할 수 없으니, 알아서 기고 알아서 살아 귀환하라! 자, 이제 이 노래를 들으며 어금니 굳게 물고 눈 크게 떠라, 하지만 어깨와 다리에는 힘 빼야 스텝 나가고 펀치 나간다.
Good Luck to You, and Sayonara!"

The Ballad of Green Beret/ by Srgt. Barry Sadler

Fighting soldiers from the sky
Fearless men who jump and die
He who means just what they say
The brave men of Green Beret
………………………………………………….
………………………………………
…………………………
"거-참, 내가 이러면 안 되는데…………작전이고 나발이고 내 눈앞에는 노릇노릇 잘 부쳐진 녹두빈대떡에 잘 익은 동동주 한 사발이 뱅뱅 맴돌 뿐이야!"
꿈에 본 내 고향
"고~향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신~세,
……………….아득한 수 만리,
언제나 외로워라 타국에서 우는 몸
………………………………………
꿈~ 에 본 내 고향이 마냥 그리워!"

둔탁한 진동음과 함께 엔진의 굉음이 늦은 오후의 나른함을 산산조각 내며 Air737은 대지를 가른다. 내가 탄 말레이시안 항공기는 내 마음과 어쩜 한치도 다름없이, 주저 없이 푸른 창공으로 솟구쳐 오른다. 지난 2달 가까이 나의 숨통을 가로막고 있던 파리가 이제서야 입 밖으로 튀어 나온 듯, 지금 나는 후련하고 통쾌한 기분으로 '자유' 그 자체가 되어 푸른 창공을 비행한다. 생각 같아선, 비행기의 창문을 박차고 튀어나가 구름이. 되고 바람이 되어 푸른 창공을 훨훨 날고 싶은 심정이다.
아득히 내려다보이는, 천혜의 요새이고 절해의 고도(孤島)이며 감옥 같은 저 호주는 한 나라이면서 그대로 하나의 세계이다. 호주 인들에게 그들을 두텁게 둘러싸고 있는 넓디넓은 바다 건너에 있는 또 다른 지구촌은 결코 대수롭지도 않으며 흥미도 없다. 그들은 그들이 태어날 때부터 하늘에서 물려 받은 엄청난 재산인 지하자원으로 그들이 죽는 날까지 굶어 죽을 걱정을 할 필요가 없어 우리들처럼 '빨리빨리'를 제창(齊唱)하고 악다구니를 칠 필요가 없다. 그저 느긋한 마음으로 자연의 순리대로 자연 그 자체가 되어 자연스럽게 살아가면 된다. 불평불만을 터트리고 성급하게 구는 것은 한 마디로 잘라 말해 '악덕'으로 결코 용서될 수 없는 작태인 것이다.
내가 퍼스(Perth)에서 머물렀던 한 백패커스의 16명 룸메이트의 방에 있었던 또 한 명의 한국인인 '이 한신'군(君)- 그는 호주이민 6년 차로 호주의 한 요리학교를 나온 뒤 이 곳, 퍼스에 있는 힐튼 호텔의 양식 부에서 일하고 있는데 한국에 있는 자신의 가족(5살의 딸과 아내)과 함께 살 보금자리를 찾고 있던 중 잠시 이 곳에서 기거하고 있다.-이 수려한 영어로 유럽에서 이 곳으로 일자리를 찾아 갓 도착한 유럽 각처의 젊은이들에게 호주에서의 삶의 철학을 명쾌하게 족집게로 집어 주었듯이, 호주에서는 불평과 불만을 하면 할수록 자신의 두 손에 쥐어 질 것은 점점 적어진다. The more you complain, the less you get!
호주 인들에게 '변화나 개혁'이란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단어, 그들의 사전(辭典)에서 삭제되어야 마땅한 단어임에 틀림이 없다. 부질없는 짓임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무료하고 지루한 비행시간을 죽이기 위해 나는 'If'절을 사용해 본다. 만일 우리가 우리땅에 호주와 같은 엄청난 부(富; 막대한 지하자원)를 소유하게 되었다면, 그리고 만일 호주 땅에 지하자원은 없이 텅 비어 그저 집요하기 만한 파리떼만이 그 공허함을 채우고 있다면?!!
바야흐로 우리의 고질적인 '빨리 빨리' 철학은 개똥철학이 되어버리고, 그들의 자연주의철학 또한 개똥이 되어 버릴 것임에 틀림이 없어! 결국 나라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결코 비교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나라도, 그리고 그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모두 운명처럼 태어나 운명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이겠지만 중요한 것은 머리에 이고 등에 짊어지고, 그리고 두 손에 쥐고 있는 자신의 운명 속에서 자신만의 삶의 철학으로 최대한의 노력을 경주하고 최선을 찾으며 생존을 계속하는 것이겠지.

검은 대륙의 시작, South Africa

퍼스에서 6시간을 날아 쿠알라룸푸르(Kualalumpur)에 도착해 대합실에 쪼그리고 앉아 3시간을 기다리고, 또 다시 요하네스버그(Johannesburg)까지 열 시간 반의 비행 끝에 4월 14일 새벽 5시 반, 나는 생소하기 짝이 없는 검은 대륙의 창공에 점프한다.
"바로 이 땅이 토토(Toto)가 치열하게 열창하던 '아프리카Africa'다!"
이제 풍경은 완전히 달라져 흰색이나 노랑, 그리고 갈색이 아닌, 생소하고 난해하기까지 한 검은 세상이 되었지만 다행히도 많은 이들이 영어를 말하고 있어 그나마 한시름 놓인다.

공항 문을 밀고 나왔으나 공식적인 대중교통수단이 전혀 나의 눈길에 채이질 않는다. 택시는 터무니없이 비싸고 싼 것이라곤 서민들의 발인 밴(Van)뿐인데 행선지가 전혀 적혀 있지 않아 한 대 한 대 일일이 물어봐야 한다. 한국대사관이 있는 프레토리아(Pretoria)까지는 상당한 거리(약 40km)로 밴 속에 짐짝처럼 포개지고 접힌 채로 두 번이나 갈아타며 갔지만 정작 대사관주변에서부터 헤매기를 거듭하다가 결국은 대사관을 바로 나의 뒤통수에 두고 택시를 탈 수 밖에 없었다.
대사관에 들어가니 문화 홍보 관이며 1등 서기관인 '김 종영'씨와 그의 비서인 '신 지혜'씨가 나를 환대해 어깨춤에 이어 '아싸!'가 절로 터져 나올 정도로 기쁘다.
'아, 대한민국!'
'엘파마 2호'는 아직 도착 전으로, 나는 신지혜씨에게 싼 숙소물색을 부탁하고 그녀는 명쾌하게 한 곳을 발견해 주소와 연락처를 프린트해서 나에게 건네준다. 택시를 불러 타고 도착한 백 팩커 여관(Backpackers Inn)은 120Rans(17불)에 아주 조용하고 조반까지 딸려 있는, 나에겐 완벽한 여관이다.

남아공(South Africa)의 한국대사관의 김 종영 문화 홍보관의 가족과 함께 저녁을 함께하며 한 컷.
실로 오랜만에 한국인 가족과 한국음식을 마주하며 나는 비로소 나의 자화상을 바라보고 나의 존재를 구체적으로 확인한다.
바쁜 가운데도 초등학교 6학년의 석준군과 3학년인 다영양과 항상 대화하고, 그들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생각하고 판단을 내릴 때까지 인내심 있게 지켜보는 두 부모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저녁이 되어 여관에 있는 나에게 걸려 온 전화는 '엘파마 2 호'가 방금 대사관에 도착했다는 급보로, 결국 서기관님이 나를 위해 직접 '엘파마'를 자신의 차에 싣고 나의 여관에 나타났다. 나는 서기관님의 저녁초대까지 받아 그의 차에 올라타 여관에서 결코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그의 집으로 향한다.
문화 홍보관임과 동시에 1등 서기관인 '김 종영'씨는 원래 정보통신부 소속으로 해외주재원을 위한 공모에 선발되어 이 곳에서 3년간 주재한다고 하는데 이제 6개월째라고 한다. 행인지 불행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가 이 곳에 오자마자 많은 업무가 기다렸다는 듯이 그를 향해 사정없이 달려들었다. 올해 남아공(South Africa)의 더반(Durban)에서 벌어질 평창 올림픽개최지결정을 위한 최후의 한 판 승부를 앞 둔 한국의 홍보전략과 함께 한국드라마의 남아공진출이라는 야심 찬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그는 불철주야에 종종 주 7일 근무까지 불사하며 그가 지니고 있는 모든 것을 깡그리 불태우고 있다. 잔잔한 미소와 부드러운 말투의 소유자인 그이지만 그의 나라, 나의 나라, 그리고 우리의 나라인 대한민국에 대한 그의 사랑과 자신의 임무에 대한 불타는 열정을 얘기할 때, 결코 만만치 않은 그의 두 눈에는 섬광이 일고 운전대를 잡고 있는 그의 두 손에 고동치는 전율이 나의 전신에 메아리 쳐 나는 이미 가슴이 벅차고 숨이 가쁘다.

그의 집에 도착하자 그의 부인, '김 란희'씨와 아들 석준 군(초등6학년), 그리고 다영 양(초등3년)이 나를 반긴다. 이 두 자녀는 리버럴하고 글로벌 한 부모의 영향으로 결코 억지와 막무가내가 없는 분위기 속에서 부모와 대화를 계속하고 있으며 매사를 분석적이고 창조적인 방법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어 나를 또 한 번 감동시킨다. 한국인 모두가 뼈저리게 통감하고 있는 창의성 없는, 무모할 정도의 주입식교육의 병폐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석준과 다영의 부모들은 격무로 피곤한 몸이지만 대한민국의 내일인 그들 자식들의 바람직한 교육을 위해 두 손 두 발 다 걷어 부쳤다. 

한국대사관의 신 지혜씨가 찾아 준, 하룻밤 17불의 Backpackers Inn의 캐빈.
룸메이트가 10명이었던 시드니의, 그리고 16명이었던 퍼스의 선술집 같은 Backpackers Inn에서 정신 사나운 나날을 보내야 했던 나는, 절간 같은 고요함과 평화스러움 속에 검은 대륙에서의 첫 일주일을 보냈다.

내가 머문 Backpackers Inn의 리셉션을 담당하고 있는 짐바브웨 출신의 직원인 트리쉬(Trish).
그녀는 빼어난 용모에 상당한 교육을 받은 듯 유창한 영어를 구사한다.
South Africa에는 상당수의 짐바브웨사람들이 한 번에 4년 비자로 건너와 일을 하고 있는데 모두들 영어를 잘 이해하고 있다.
트리쉬가 '엘파마 2호'를 타고 동네 한 바퀴를 돌며 테스트 드라이브를 한 뒤, O.K 사인과 더불어 "Excellent!"를 연발한다.

대사관의 신지혜씨-선교사로 이곳에 정착한 부모님을 따라 이곳에 온 후, 이곳의 명문대학인 프레토리아 대학(Pretoria Univ.)을 졸업한 미모의 재원-가 찾아 준 백패커 여관(Backpackers Inn)의 방은 시드니에서는 10명, 그리고 퍼스에서는 16명과 함께 한 방에서 생활하며 밤마다 벌어지는 주연(酒宴)속에 터져 나오는 고함소리와 노랫소리를 효과음향으로 삼아 호주편의 스토리를 쓰고 있던 그 시절과는 완전 딴 판으로 나무로 지어진, 외진 암자와 같은 오두막의 방으로 내가 원하고 있던 평화와 고요함 그 자체였다. 이곳에서 일하고 있는 종업원들은 내가 곧 지나갈 나라인 짐바브웨에서 온 이들로 한 번에 4년 동안 이 곳에 체재하며 일을 할 수 있는 비자를 소지하고 있는데, 솔직하게 말해 거의 불필요한 인력인 그들은 그저 그렇게 우왕좌왕 왔다갔다하며 하루를 때우고 있다.

남아공(South Africa)의 비자기간은 1개월로 긴 시간을 이곳에서 지체할 수는 없지만 북아프리카까지의 긴 장정을 앞두고 나는 숨 고르기와 함께 전혀 색다른 풍경에의 적응을 위해 잠시 이 곳에서 머물기로 한다. 2010년 월드컵을 막 끝낸 남아공은 지금도 여전히 그들의 최고 쟁점인 치안과 질서유지에 전력을 치중하고 있는 듯하다. 정치군사적으론 흑인들이 장악하고 있다지만 경제적으론 역시 백인들(주로 네덜란드인, 독일인, 그리고 영국인)이 주도하고 있다. 이곳 또한 호주와 비슷하게 중요기간산업이 없이 금광을 주업으로 그저 자연주의 철학으로 살아가고 있는 듯하다. 그래도 적지 않은 생필품들을 생산하고 있는 듯, 최소한 식품의 가격만큼은 호주보다 훨씬 저렴하다.

공관 단지의 3호 청사가 한국 대사관이다.
대사관 앞에서 김 종영 문화홍보관, 그리고 신 지혜 씨와 함께 '엘파마 2호'가 포즈를 취하며 신고식을 마쳤다.
나는 바로 전 날, 여관의 주방에 있는 서슬이 시퍼런 대형가위로 대형휴지통에 머리를 쳐 박고 머리를 잘랐다.
신 지혜 씨는 전혀 정리가 안되어 어수선하기 짝이 없는 나의 뒷머리의 모습에 절망한 나머지 자신의 집에 있는 전기이발기를 가져오겠다고 하나 나는 그녀의 따뜻하고 아름다운 마음만을 내 마음속에 간직한 채, 뒤돌아 선다.
"며칠 지나면 또 자라버리는 것이 머리카락 아니더냐?!"

자전거의 앞 뒤 짐받이에 보완할 점이 있고, 호주 숲 속에서 잃어버린 나침반, 후래쉬(Flash)등을 새로 장만하기 위해 내가 며칠 동안 이 곳의 거리를 걷고 있는 동안 이곳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조금씩 구체적으로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정권이 바뀌고 흑인통치국가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이 나라 주인인 흑인들의 삶에는 예나 지금이나 거의 변함이 없는 듯하다. 경제 상권이 완벽하게 백인들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어 돈벌이가 될만한 상가, 상점들의 주인은 한결같이 백인들이고 좋은 집과 좋은 차들의 주인들 또한 백인들이다. 그나마 조금은 만만하다 싶은 작은 비즈니스는 인도인들이 어느새 빠른 동작으로 들어와 장악해 버렸다.
상가는 모두 선진국을 방불케 하는 쇼핑몰(Shopping Mall)체제로 대다수의 흑인들을 위한 노점상들이 전혀 없다. 결국 흑인들이 해 먹고 살 것이 없다는 얘기가 된다. 흑인들이 할 일이란 노동판 일, 경비를 비롯해 백인들 집의 가정부, 마당쇠, 돌쇠, 망쇠 들뿐이다.(이 일마저도 영어소통에 전혀 문제가 없는 이들에게만 해당된다.)
스탠리(Stanley)나 리빙스턴(Livingston)이 아프리카를 누비고 다니던 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은, 그들 삶의 현 주소이지만 그들의 천부적인 낙천주의(?)만큼이나 여유만만하게 즐거운 듯 살아가고 있는 그들이다.

백인들이 살고 있는 집은 한결같이 전기가 흐르는 철선(Electric fence)이 몇 겹으로 감겨져 있고 무시무시한 유럽 견들이 어슬렁대고 있는데, 백인들의 안전은 이 곳의 현지경찰보다 사설 보안업체요원들에 의해 지켜지고 있는듯하다.
호주와 뉴질랜드에 이어 남아공(South Africa)의 국기(國技)는 럭비(Rugby)이지만 이곳 남아공에서 럭비는 백인들만이 한다. 백인들만이 다니고 있는 적지 않은 수의 중 고교에는 반드시 럭비축구장이 있고 한 클래스의 체육시간임에도 두 세 명의 체육교사가 달라붙어 학생들에게 철저하게 럭비훈련을 시키고 있다. 럭비는 이 곳의 백인청소년들에게 인내력과 터프함을 심어주기 위한 정신교육의 일환으로 행해지고 있음이 틀림이 없다. 한 왜소하고 연약해 보이는 중학생소년에게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대형 중량 백(럭비나 미식축구에서 상대를 어깨로 부수며 돌파하는 기술을 훈련시키기 위한 Blocking용 대형 백)을 몇 번이고 반복해가며 확실하게 부수고 돌파하게 하는 체육교사의 집념이 나를 감동시킨다. 하지만 흑인들의 공간에서는 역시 축구가 지상최고의 스포츠다. 축구는 이들에게 최고의 놀이이자 최고의 스포츠다. 비록 공원이나 도로의 한 모퉁이에서 하는 축구이지만 이들의 몸놀림과 발 재간은 가히 천부적으로 이들은 축구를 위해 태어났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흑인 청소년들을 위한 최고의 심신단련법으로 다른 것 필요 없이 동네 곳곳에 축구를 위한 공간을 만들어주고 축구공만 제공하면 될 것 같다.

오늘이 4월 21일로 요하네스버그(Johannesburg)에 도착한 지 일주일이 되었다. 지난 일 주일 동안 날씨는 짙은 구름과 가는 비로 일관하며 나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나는 지금 출발준비가 완료된 '엘파마 2호'를 타고 한국대사관으로 달려가고 있다. 이제 아프리카대륙을 달려야 할 때가 온 것임을 본능적으로 직감하고 떠나기 전에 그들에게 인사를 드리려 함이다.
지난 일 주일 동안 나를 '대한민국!'으로 푹 절게 해 준 이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란 그저 "건강하세요!" 뿐이다. 돌아서는 나에게 그들은 역시 또 '대한민국'을 선물로 준다. 나는 이제껏 세계를 여행하는 동안 태극기를 자전거에 단 적이 없었다. 신 지혜씨가 나에게 건네주는 '대한민국'을 받는 순간, 나는 한 동안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잠시 뒤, 겨우 터지는 숨통과 함께, "아, 대한민국!"

Backpackers Inn의 사무실에는 마치 큰 바위덩어리처럼 듬직하고 의젓한 한 아가씨가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대형해머로 후려쳐도 눈도 깜짝 하지 않을 것 같은 그녀의 첫 인상이지만 긴 말 필요 없이 씨-익 웃으며 문제해결을 해주는 그녀는 진정한 천사!
그녀, Melanie,는 내가 이미 지나왔던 미국의 미주리 주(州)출신으로 미국정부의 아프리카를 돕는 프로젝트를 위해 이 곳에 와서 3년 정도 머물고 있다고 하는데 자신의 전공이 지질학(Geology)으로 미국에 돌아가면 과학교사를 할 계획이란다. 아프리카 대륙의 곳곳에는 정부, 비 정부 차원의 수 많은 아프리카 원조 단체와 단원들이 활동 중이다.

우리 한국인들에게 낯설고 생소하기 만한 아프리카대륙의 한 작은 여관에서 뜻밖에 만난, 아프리카를 홀로 배낭여행 중인 한국인 청년, '구 인섭' 군.
그는 한국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있는 대학생이나 아프리카를 여행하기 위해 대학교까지 1년 휴학했다고 하는 용감한 청년이다.
내가 그 동안 여행을 하면서 만난 배낭여행객 중 이 정도의 용기와 배짱으로 여행을 감행하고 있는 이들은 오직 일본인 청년들뿐이었다.

4월 22일, 금요일. 나는 새벽을 두들겨 깨운 뒤 또 다른 떠남을 준비한다. 새벽 5시, 긴 '이스터 홀리데이(Easter holidays)'의 시작을 알리듯 교회의 종소리가 은은하게 퍼져 나오는가 싶더니 이내 무겁고 축축한 새벽공기를 막무가내로 찢으며 불쾌하기 짝이 없는 10여 발의 A.K소총의 총성이 적지 않은 '새벽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말았다.
아침 7시부터 시작되는 아침식사를 든든히 먹고(주 메뉴가 식빵과 시리얼과 우유이고 요구르트와 과일이 후식이다.) '엘파마 2호'에 뛰어 오른다.

"엘파마야, 내가 믿을 것은 오직 너뿐이다. 자, 달려보자!"
자, 다시 한 번!
"젊음이여, 푸르름이여!
젊음이여, 뜨거움이여!
달려가자, 달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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