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짐바브웨에 들어서다.
에디터 : 이호선

여전히 도로변으로 철책이 이어지는 가운데 반가운 것이 나타난다. 그것은 바로 배수로인데 크기가 일정하지는 않지만 종종 사람 키를 훌쩍 넘는 대형 배수로가 나타난다. 이젠 야영지걱정은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되겠군!
결국 어둠이 발바닥까지 뒤덮은 저녁 6시경, 대형 배수로 앞에서 엘파마의 발걸음이 정지한다. 이제부터는 배수로 위의 도로를 달리는 차량의 소음을 자장가로 삼으면 그뿐이다. 하늘이 오랜만에 활짝 개어 호주하늘에서 보았던 은하수를 다시 감상하고 있다. 긴긴 밤이 너무도 아쉬워 나의 셰도복싱(Shadow Boxing)은 배수로 안에서도 계속된다.
이 세상에서는 사람 눈에 안 띄는 어둠 속에서 별의 별 기묘한 일이 벌어지고 있지만 이 세상의 그 어떤 운전자에게도, 설령 그가 귀신의 두 뺨을 치고 코피 터트리는 귀신 잡는 무당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차가 달리고 있는 도로 밑의 배수로 속에서 누군가가 홀랑 벗고 셰도복싱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꿈속에서도 상상 불가능한 일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도로변을 따라 끊김 없이 계속되는 철책으로 야영지확보에 애를 먹던 중,
꿈처럼 다시 나타난 도로 밑의 배수로. 천혜의 야영지이다.

저녁에 별로 추운 것 같지 않아 텐트도 안치고 달랑 침낭 하나만으로 잠을 자다가 새벽에 급강하하는 기온으로 허겁지겁 일어나, 있는 옷 다 꺼내 껴입고 자야 했다. 아침저녁으로 쌀쌀해진 덕분에 모기스키들을 안 보니, 그것 이상 즐거운 일이 없다.
해가 뜨기 전에 부산히 움직여 도로로 나와 또 하루를 시작한다. 연일 하늘이 개운치 않게 흐리며 변화무쌍하다.

마카도(Makhado)주변으로 상당한 오르막의 산길이 이어진다. 진땀을 흘리며 한참 언덕길을 오르고 있는데 반대편에서 픽업트럭이 신나게 달려오더니 나의 앞에 급정거를 한다. 픽업트럭의 문을 황급히 열고 나오는 이는 상당한 거구의 바이커 복장을 한 사나이다. 그러고 보니 픽업트럭의 짐칸에는 흙 범벅이 된 MTB가 대자(大字)로 뻗어 있다.
이 거구의 사나이, 재스퍼(Jasper)는 MTB 매니어로 한바탕 산속을 누비고 MTB와 함께 땀 범벅, 흙 범벅이 되어 마카도(Makhado)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그는 나의 긴 스토리를 주의 깊게 듣고 경의를 표한 뒤 부지런히 그의 길을 서둘러 떠났다.
오르막의 산길을 지나자 고요한 긴 내리막의 산길이 이어지며 강물 되어 흘러내리던 땀방울이 바람에 산산이 부서져 도로 위에 흩어진다. 시원한 내리막길이 끝나고 평지의 길이 막 시작될 즈음에 SUV한 대가 나를 스쳐 지나가더니 뱅글 돌아 반대편에 멈춰 선다. 차에서 내려 나를 부르며 손을 흔들어대고 있는 그들은 한 거한과 두 소년이다.
자세히 보니, 조금 전 오르막의 산길을 올라올 때 나의 앞에 급정거했던 MTB 바이커인 재스퍼와 그의 아들로 보이는 두 소년이다. 나는 정말 뭐가 뭔지, 도대체 지금 내 눈 앞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채 멍하니 서 있을 뿐이다.
결국 재스퍼의 설명으로 모든 것이 명료해진다. 재스퍼가 그의 집에 도착해 그의 두 아들에게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마자 두 아들, 존(John, 9)과 오웬(Owen, 8)은 기필코 나를 만나봐야 한다며 그들의 아버지, 재스퍼를 들볶았고 결국 재스퍼는 두 아들을 이끌고 나를 쫓아 달려 온 것이다. 정말 대단한 소년들에 대단한 아빠, 그리고 대단한 가족으로 나의 안면과 심장 위에 더블, 트리플의 감동의 연타를 작열시키며 끝내 나를 넉 아웃 시킨다.
존과 오웬과의 첫 대면에서, 나를 물끄러미 바라다 보고 있는 그들의 맑고 투명하고, 그리고 심각한 눈빛에서 나는 나의 가슴이 철렁거릴 정도로 섬뜩함을 느꼈다. 그들의 두 눈은 분명 나에게, 나를 비추는 티끌 하나 없는 완벽한 거울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두 눈에 나는 과연 어떻게 비추어 졌을까?
그들은 나를 보면서 무엇을 생각했을까?
나는 그들과 사진을 찍기 위해 그들의 두 어깨를 감싸 안고 있는 짧은 시간 동안 행복이라는 단어와 느낌이 나의 머리 속과 심장 사이를 부지런히 오갔다.
이제 사우스아프리카(South Africa)를 떠날 때가 가까워 온 것 같다. 사우스아프리카의 최후 도시인 무시나(Musina)를 20km 남긴 지점의 한 배수구에서 사우스아프리카에서의 마지막 밤을 맞는다.

아빠, 재스퍼(Jasper)에게 소문을 전해 듣고 단 숨에 달려온 존(John)과 오웬(Owen).
이 두 소년의 투명하고 심각한 눈빛 앞에 나는 마치 발가벗겨져 나의 전신이 낱낱이 드러난 듯
섬뜩함을 느낀다. 과연 그들의 두 눈에 비추어진 나의 모습은?
그들은 나를 보며 과연 무엇을 생각했을까?

짐바브웨(Zimbabwe)
오전 11시 반경, 국경을 통과한다. 짐바브웨 비자를 위해 300Rans(약 35불)을 지불했다. 국경을 지날 때마다 반드시 파리떼처럼 몰려드는 진상들이 있다. 그들은 다름아닌 환전상으로 호주파리들만큼이나 워낙 집요해서 국경을 넘을 때마다 골머리를 썩여야 한다.
헌데 주위가 너무 고요하고 평화스러워 이젠 내가 궁금해 안절부절이다. 이유인 즉, 짐바브웨의 화폐는 어마어마한 인플레로 이미 돈의 가치를 상실, 휴지조차도 안 되는 존재로 전락해버려 짐바브웨에서 실제로 통용되고 있는 돈은 미국달러와 사우스아프리카의 랜(Ran)이기 때문에 환전의 필요성이 없다는 얘기다.
홀가분하고 개운한 마음으로 그저 국경을 통과하고 짐바브웨 땅인 애기 손 바닥만한 베이트 브리지(Beit Bridge)시에 도착한다.

아프리카대륙의 상징적인 나무, 바오밥(Baobab)!

사우스아프리카에 작별을 고하고 짐바브웨의 국경도시인 베이트브리지로

한 주유소 앞에 멈춰 음료수를 한 병 사 마시며 새로운 나라의 정세파악에 들어간다.
자신의 SUV차량에서 내려 내 앞으로 다가 온, 한 백인아저씨가 짐바브웨 여행을 앞둔 나에게 심각한 경고를 한다. 그는 사우스아프리카 인으로 짐바브웨, 잠비아를 비롯 아프리카의 전역을 여러 차례에 걸쳐 여행을 해 온 이로서 짐바브웨 길의 주변정세를 환히 꿰뚫고 있다.
이곳, 베이트 브리지(Beit Bridge)에서 약 100km정도 떨어져 있는 부비(Bubi)까지 거의 무인지경이나 다름이 없는데 종종 짐바브웨의 부쉬맨(Bushman)들이 숲 속에 잠복해 사냥감을 노린다는 섬뜩한 얘기이다. 그 뿐만 아니고, 옆에서 우리들의 대화를 진지하게 듣고 있던 한 흑인 종업원까지 세력을 더하며 공포감을 고조시킨다.

부비(Bubi)까지만 가면 안전한 여관도 있고 한 시름 놓을 수 있다는 얘기인데…….
이래 저래 많은 시간이 흘러버려 오늘 해 떨어지기 전에 부비(Bubi)에 도착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렸고……
오늘밤을 이 곳에서 보내고 내일 아침 일찍 이곳을 출발해 밝은 대낮에 그 위험지대를 지나가면 된다. 싼 여관을 찾아 나섰으나 이 곳의 물가가 결코 만만치 않다.
결국 나는 캐러밴 파크(Caravan Park: 7불)를 찾아 내어, 두 나무 사이에 나의 해먹을 친다. 햇볕이 너무 좋아 나는 묵은 빨래(두툼한 방한용 재킷)를 하고, 침낭과 텐트를 펼쳐 말리며 이용객이 없어 텅 빈 캠핑장을 독차지하듯 유유자적하며 느긋한 오후를 만끽한다.
바로 길 건너의 이웃집에서 쉼 없이 북을 두드리고 노래를 부르는데 북소리와 노래 소리가 예사롭지 않은 프로 급이다. 헌데 이 북소리와 노래가 밤이 되고, 또 밤이 새도록 결코 쉼 없이 계속되어 나는 결국 잠다운 잠을 자지 못했고 아침이 되어 주인에게 물어보니 초상이 났다는 것이다.
누군가 죽으면, 악사와 가수를 불러 이틀 동안 결코 쉬지 않고 두드리며 노래하게 하는 것이 짐바브웨의 전통적인 장례의식이란다.

베이트브리지의 캐러밴 파크의 뜰에 해먹을 치고

이른 아침 6시 반, 나는 부비(Bubi)를 향해 페달을 밟는다. 도로변은 정말 고요하다. 인적이 거의 없고 지나다니는 차량들 또한 뜸해 나는 그저 즐거울 뿐이다. 도로를 따라 기기묘묘한 바오밥(Baobab) 나무가 줄 곳 나타나며 무료함을 달래준다.
간간이 집 몇 채 뿐의 작은 마을이 나타나고 구멍가게나 결코 식당 같지않은 식당이 나타나며 나의 허기를 채운다. 내가 오래 전 이미 지났던 네팔의 시골과 너무도 흡사한 모습이다.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아 T.V나 냉장고와 전혀 상관이 없는 곳이기에 콜라를 비롯한 모든 음료수는 결코 차지 않지만 집들이 초가지붕에 흙 집이라 실내가 덥지는 않아 음료수가 뜨뜻할 정도는 아니다.
먹을 수 있는 것이라야 비스킷이 고작으로 간혹 나타나는 식당은 간판이 있는 것도 아니요, 의자나 식탁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는 것도 아니기에 육안으로 식별해내기가 결코 쉽지 않다. 그저 흙 바닥 위에 냄비 몇 개 걸어놓고 나무로 불 피우고 있다면 그 곳이 바로 식당이다.

짐바브웨의 내륙을 달리기 시작하면서 만나게 되는 이들의 리얼 시골 식당과 리얼 푸드.
옥수수가루를 찐 덩어리(메이즈:Maize)에 염소고기.

우리의 주식이 쌀이라면, 사우스아프리카를 비롯해 대부분의 아프리카 흑인들의 주식은 메이즈(Maize)라고 불리는 옥수수가루로 물을 넣고 저으며 불에 익힌 후, 그 위에 소금을 뿌려 손으로 뭉쳐 먹는다. 이것은 아무 맛도 없고 밍밍하기 짝이 없어 소금조차 안 뿌리면 목구멍으로 넘기기가 힘겹다. 사우스아프리카의 백인들도 이것을 주식으로 먹고 있지만, 그들은 이 무미건조한 메이즈(Maize)위에 버터를 바르거나, 토마토가 들어간 스파게티 소스를 뿌려 먹는다.
결국 이들의 식사란 큰 접시 위에 상당량의 메이즈가 올라가고 옆에 약간의 양념으로 적당히 간을 해 삶은 닭고기나 소고기, 그리고 염소고기 몇 조각이 올라가고 우리의 열무나물과 맛과 모양이 비슷한 야채를 삶아 간단한 양념으로 살짝 무친 것이 모두이다. 보통 이 야채조차도 없이 메이즈와 고기만의 접시가 다반사다.
이들의 음식이란, 요리라는 개념이 생략된 생존을 위한 그것일 뿐이지만, 아무것도 없는 시골에서 2불 정도에 이만한 탄수화물과 단백질을 섭취 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무조건 감사, 감사다! 비스킷이나 식빵만으로는 도저히 역부족이다.

제대로 된 식탁이나 의자는 없고 아무 곳이나 적당히 앉아 적당히 먹으면 된다.
이 곳에서는 무슬림 국가들처럼 손으로 먹기 때문에 식사 전에는 항상 손을 닦도록 물이 준비된다.


또 다른 식당에서 마주한 또 한 접시의 Simple food!

아프리카대륙의 시골의 모습 또한 이미 지나 온 중남미대륙의 그것과 한 치의 다름이 없다. 한 움큼도 안 되는 작은 동네에도 어김없이 바(Bar)나 Bottle shop(술 파는 집)이 있는데, 아침부터 대형 고물 스피커로 음악을 무차별로 틀어대고 노소 불문한 주객들이 새까맣게 모여 빨아대고 삼켜댄다(역시 이곳도 맥주가 대세이다). 무엇보다도 온 몸을 찢을 듯한 고 볼륨으로 울려대는 음악소리는 진저리가 날 정도이다. 아프리카의 이들 또한 중남미 대륙의 그들만큼이나 고요함을 죽음으로 인식하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위험지대의 경계선으로 지목되었던 부비(Bubi)를 훌쩍 지나쳐 루텐가(Rutenga)를 얼마 안 남긴 지점의 숲 속에서 어둠을 맞는다. 깊은 숲 속이지만 해가 지고 한 두 시간 지나 몇 줄기의 차가운 바람이 숲 속을 여기저기 흔들어대자 간간이 들리던 사이렌소리는 나의 귀에서 완전히 잊혀진다.
모기만 없으면 숲 속은 평화와 자유로 충만한 지상최고의 안식처인데……

여행 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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