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만리장성에 도착하다.
에디터 : 박규동

2011년 08월 08일   月   스모그로 시야를 확보할 수 없다.
54.8km 운행.      호텔숙박 40도28'26,44+115도59'15,14

자전거를 타는 사람을 만났다. 주소를 받고 있다.




북경을 100km 남겨둔 곳에 검문소가 있었다.
검문소를 지나자마자 세상이 달라졌다. 석탄트럭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않고 공기도 다르고 도로주변의 분위기도 완전히 다른 그런 나라가 나타났다. 도로는 깨끗하고 주택들도 가지런하며 석탄가루도 날리지않았다. 공원의 초지에는 스프링쿨러가 자동으로 물을 뿌리고 있다. 북경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짐작하는 변화들이다. 더구나, 그리 멀지않은 곳에 세계최대의 관광지 "만리장성"이 있지 않은가! 우리도 내일이면 바따링 창청(八達嶺 長城)  (만리장성의 중국 명칭, 팔달령에 있는 장성이라는 뜻이다)을 통과한다.


중국 노인들의 장기놀이


베이징 100km 내에 들어서자 모든 게 바뀌었다.

길 왼쪽에는 이런 산줄기가 이어졌다.

110번도로를 타고 내내 동쪽으로만 오다가 오후부터는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오늘은 얀칭에서 자고 내일은 만리장성을 통과하여 베이징에 입성한다. 어쨌든 석탄가루와 석탄트럭을 만나지 않으니 살 것만 같다. 석탄트럭에는 석탄이 대충 60톤이나 실렸다고 한다. 트럭의 무게도 20톤이나 된다고 하니 80톤짜리 괴물을 만나지 않은 것만으로도 안심이 되는 것이다. 도로표지판이나 차선은 우리나라처럼 산뜻하지 않으나 나름으로 중국식 교통규칙이 있는 것 같다. 양보와 배려가 교통규칙을 우선하고 있는 것 같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하여 놀라 자빠질뻔 했지만 이제는 우리도 느긋하게 트럭을 피해가고 있게 되었다.



얀칭에 들어서자마자 호텔을 만나 그곳에 묵기로하였다.
외국인을 대하는 데에 경험이 부족한 프론트의 아가씨와 공용어를 나누고 있는데 젊은 지배인이 부인과 함께 나타나 영어로 우리를 도와주었다. 호텔의 식당에서 근사한 식사도 하였다. 식사가 끝나고 커피를 주문하였으나 준비가 안 돼서인지 우물쭈물한다. 젊은 부인이 어디서 구해 왔는지 네스카페 막대커피를 갖고왔다. 정말 오래만에 맛보는 한국형 믹스 커피다.

묵었던 호텔

남쪽 20km에 만리장성을 두고 있어서인지는 몰라도 얀친은 제법 큰 도시이다.
역사나 지리적으로 보아도 얀칭은 베이징에서 바따링 관문을 통하여 북쪽을 오가는 중요한 교역점이었을 것이다. 물론 군대의 이동과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곳이다. 뭉골군이 중국을 점령하기 위해서도 이 길을 갔을 것이며, 다시 중국이 북방을 제압하기 위해서도 이 도시를 거점으로 거쳤을 것이다.

내일은 우리가 자전거를 타고 팔달령 만리장성을 넘어서 베이징에 들어가는 날이다.
여러가지 의미들이 아내와 나를 설레게 한다. 아내는 베이징이 초행이기도 하다. 1980년대에 나는 중국과 정식으로 수교가 되기 전인데도 중국을 다녀갔던 경험이 있다. 그때에 내가 다짐을 한 것 중에 하나가 언젠가는 아내를 위한 여행으로 베이징을 다녀가야겠다는 것이었다. 드디어 그때가 온 것이다.

다친 손목과 식중독으로 인한 소화기 기능이 완전하지는 않으나 많이 편해졌다.
우려되는 것은 뒷브레이크가 고장난 상태에서 왼손으로 작동하는 앞브레이크를 미세하게 조정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왼손을 쓰는 데 아직도 불편한 게 많아서다. 속도를 줄여서 안전우선으로 운행하는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아내와 마주보고 웃는 것보다 더 행복한 게 있을까?
아내의 따뜻한 말 한 마디에는 부부가 통채로 들어있다. 사랑과 존경이 손끝 하나에 묻어나고, 웃음 한 자락에 우리의 인연이 새롭게 만들어진다. 말 한 마디에 길이 생기고, 눈빛만으로도 희망이 일어난다는 걸 알게된 여행이다.
나는 아내를 위해 길이 되고 싶다.



2011년 08월 09일   火   맑음, 습도 높은 스모그형 날씨의 연속.
45.2km 운행.      빈관에서 숙박 40도13'22,58+116도11'44,34

밥이 먹고 싶어서 호텔을 나와 도로 옆 나무그늘에서 취사를 하였다.
큰길 가에 인공으로 만든 작은 개울이 흐르고 있었다. 아침을 먹으며 출근하는 보통사람들의 움직임을 보는 것도 나그네에게는 심심찮은 일이다. 버스와 택시로 가는 사람도 있지만 오토바이에 자전거, 인력거까지 사람들을 실어나르는 갖가지 풍경은 보기에도 역동적인 느낌을 주었다. 우리를 구경하러온 사람들까지.
도시란 이런 것이다.


취사장을 찾아온 친구와 한컷

바따링을 자전거로 아내와 함께 오르는 건 나의 오랜 소망 중에 하나였다.
오늘은 그 소망을 이루는 날이다. 그것도 단순히 바따링 창청만을 오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울란바타르에서부터 고비사막을 건너 먼길을 온 게 아닌가! 베이징의 왕조들이 그렇게도 두려워하던 북방의 몽골기마군단이 있었던 그 흉노의 땅을 출발하여 우리는 여기까지 온 것이다.
나도 덩달아 역사적 상상이 멈추지 않는다.

잘 정돈된 시가지

시내에서 천사들과 기념사진, 왼쪽이 西陵


얀칭시내를 벗어나기 위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야 했다.
그때 우연히 자전거를 타는 세 명의 청년을 만났다. 그들도 마침 바따링 창청을 오르는 길이란다. 시내만이라도 벗어나는 길을 알 수 있다면 쉬울 것 같아 그들의 뒤를 부지런히 따라 붙었다. 그들 중에서도 키가 크고 예의바른 시링(西陵)이라는 친구가 영어를 햇다. 나는 시링에게 우리의 속도가 느리니 큰길을 만나면 먼저 가도 좋다고 하였지만 시링은 속도가 느려도 괜찮으니 함께 만리장성까지 가자고 하였다. 그러다가 도중에는 아예 자기와 자전거를 바꿔타고 가자고 하여 그러자고 했다. 나는 그의 도로용 싸이클을 타고 아내는 그의 친구의 산악자전거로 바꿔 탔다. 우리의 트레일러를 끌면서 청년들은 20km의 오르막 길을 쉽게 올랐다. 올라가는 길도 자전거 타는 사람들만 알고 있는 조용하고 착한 길을 골라 갈 수 있어 더 좋았다.
또 다른 천사를 만난 것이다.

만리장성 꼭대기에서

만리장성, 萬里長城, Great Wall of China. 중국인들은 그냥 창청(長城)이라 부른다.
인류가 만든 토목건축물 중에서 가장 크다는 중국의 유적이다. 그 성벽의 길이가 지도상으로 2700km이며 중간에 이어진 지선을 합치면 자그마치 5000km에 이른다고 한다. 우주선에서 눈으로 식별이 가능한 인공 구조물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우리나라 동해에서 오징어잡이 배들이 밝히는 집어등이고, 또 하나는 만리장성이라고 한다. 그 크기가 알만하지 않은가!


오래 전부터 중국의 왕조들이 북방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만든 군용 성벽인 만리장성, 그 중에서도 바따링의 구간 성벽은 베이징과의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만리장성 전체구간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곳이다.







바따링 창청(八達嶺 長城)은 베이징(北京) 북서쪽 70km에 있다.
몽골을 출발하여 자전거를 타고 우리가 이 곳까지 온 것처럼 몽골의 기마군도 같은 길을 따라 이 고개를 넘어 베이징으로 진격했을 것이다. 그래서 바따링 창청은 전략적으로도 요충지인 것이다. 바따링의 북쪽은 베이징에 비해 고원지대이다. 북쪽에서는 고개를 오르기에 짧고 쉬울뿐 아니라 바따링을 넘으면 긴 계곡의 내리막을 지나 베이징까지 평원을 달린다. 그래서 바따링 남쪽의 계곡은 여러 겹의 성벽이 겹겹이 쌓여 있다. 이 계곡에서 적군을 막지 못하면 베이징도 수비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진법에 따라 겹겹이 쌓인 성벽은 요새처럼 굳건하게 보였다. 그러나 징기스 칸은 "성벽의 크기보다 성벽을 지키는 군사들의 군기가 더 중요하다"라며 이 거대한 성벽을 넘었다.
이 구간은 명나라 대에 축조된 것이다. 그러다가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서고 나서 관광을 위해 1950년과 1980년에 대대적으로 다시 축성하였다고 한다.


바따링 수관 부근에서 청년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헤어졌다.
시링은 헤어지면서 그들만이 알고 있는 샛길을 알려주었다. 옛날에 군사들이 걸어서 넘었을 것 같은 그런 길이었다.
바따링창청의 진면목을 보고 만지면서 긴 내리막을 내려왔다. 브레이크 고장 때문에 속도를 낼 수도 없었다.
북경 외곽에서 빈관을 찾아 여장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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