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로 찾아가는 서울 미래유산 #2
에디터 : 김수기 기자
서울을 빛내고 있는 숨어 있는 보석, 근현대 서울을 보존하는 미래유산을 자전거로 찾아가 보는 2번째 이야기를 시작한다. 뜨거운 화덕과 모루로 쇠가 도구로 바뀌는 불광대장간, 서민의 애환이 깃든 피맛골, 소극장 운동의 효시 삼일로 창고극장, 100년 전통의 이문설렁탕, 추억의 대중목용탕, 사직터널과 딜쿠샤, 두꺼비하우징 프로젝트로 탈바꿈된 산새마을이 주인공이다.


불광대장간

불광역 대조시장을 지나 서부버스터미널 방향으로 가다보면 불광대장간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불광대장간의 박정원 옹이 소학교 시절 신갈에서 대장간 심부름을 시작하면서 배우게 된 대장간일이 벌써 60년이 지났다.
박정원 옹은 아직까지 아들인 박상범 씨와 함께 화덕의 불을 피워 달군 쇳덩이를 모루에서 두들겨 낫, 곡괭이, 쇠스랑, 부엌칼 등을 만들고 있으며, 단골이 심심찮게 대장간을 찾아 오고 있다.

불광대장간의 박정원 옹(왼쪽)과 박상범 씨(오른쪽) (위치보기)

이곳에 가게를 연 것은 45년 정도 됐지만 박정원 옹은 신갈, 돈암동 등에서 기술을 배우며 대장간일을 한 것이 60년이 넘었다.

좁은 작업공간이지만 뚝딱뚝딱하면 쇳덩어리가 낫이 되고, 부엌칼이 되고, 곡괭이가 된다.





대중목욕탕

대중목욕탕은 아버지 따라 목욕탕 가서 바나나우유를 마시며 나온 기억을 가진 세대에게 추억의 장소이지만 이제 보기가 어려워진 장소 중의 하나다. 대중목용탕의 높다란 굴뚝이 하나둘 없어지고, 사우나와 찜질방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그래도 용강동 신석탕(1962년)과 원효로 원삼탕(1966년), 계동 중앙탕(1969년) 등 1960년대 문을 연 대중목욕탕이 터줏대감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다.

원효로3가에 위치한 원삼탕은 TV에 자주 소개되는 곳이다. (위치보기)

중구 계동에 있는 중앙탕 (위치보기)

중앙탕 인근은 북촌한옥마을이 있어 함께 둘러보는 것도 좋다.


피맛골, 삼일로 창고극장, 이문설렁탕

종로의 피맛골은 조선시대 고관들의 말을 피하는 길, 피마(避馬)에서 유래한 곳으로, 서민들이 다니던 골목이라 선술집, 식당 등이 밀집한 곳이다.
청진동에서 종로6가까지 이어져 있었으나 청진동 지역은 재개발로 사라졌고, 개발에 대한 비판이 재기되어 종로2가에서 6가까지는 보존된다.

100년이 넘는 전통의 이문설렁탕은 종로 공평동에 있었으나 개발로 인해 견지동으로 옮겨져 운영 중인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식당이다. 담백한 국물과 파, 깍두기, 김치 만으로도 훌륭한 맛을 내 김두한의 단골 식당이었다고 한다.

피맛골은 세사람이 나란히 걷기에 좁은 골목이지만 술집과 식당이 즐비한 종로의 명소다.

100년이 넘는 전통을 가진 이문설렁탕 (위치보기)



이문설렁탕은 인사동 골목과 붙어 있다.

안국역사거리에서 한남초교까지 이어진 4.8km 구간을 삼일대로라고 한다. 삼일운동을 기념해 1966년 삼일로라고 부르기 시작했으며, 삼일이라는 글자는 삼일로 창고극장, 삼일빌딩, 삼일교 등 도로, 건물, 다리, 극장 등에 붙여졌다.
명동성당 근처 낮은 언덕에 위치한 삼일로 창고극장(1975년)은 오래된 민간소극장으로 수많은 연극인이 무대를 빛냈던 소극장운동의 성지다.
대학로에 소극장이 우후죽순 생기며, 삼일로 창고극장은 폐관과 재개관을 거듭하며 존폐에 기로에 섰지만 기업 후원으로 재개관해 운영 중에 있다.

소극장 운동의 효시인 삼일로 창고극장 (위치보기)


삼일로 창고극장에서 종로 방면으로 가면 청계천변에 있는 삼일빌딩과 삼일교를 볼 수 있다.


사직터널과 딜쿠샤

사직터널(1967년)은 서울에서 가장 먼저 생긴 도로터널로, 종로구 사직동과 행촌동을 연결하는 136m 길이의 터널이다.
사직터널 위는 행주대첩의 공을 세운 조선 무관 권율 장군의 집터로 알려진 행촌동이며 아직도 권율 장군이 심은 것으로 알려진 은행나무가 있다. 수령이 400년이 넘은 은행나무 앞에는 붉은 벽돌로 지어진 2층 양옥 '딜쿠샤'가 있다.
딜쿠샤는 힌디어로 '희망의 궁정, 이상향' 등의 뜻을 말하며, 인도의 딜쿠샤 궁정에서 이름을 따왔다. 일제시대 앨버트 테일러가 추방당할 때(1942년)까지 기거한 딜쿠샤는 현재 저소득 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엘버트 테일러는 삼일운동을 해외에 알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으며, 유언에 따라 현재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안장되어 있다.

사직동에서 바라본 사직터널

사직터널에는 보행자를 위한 인도와 방음벽이 있지만 좁기 때문에 보행자가 있으면 걸어서 가자.
외벽에는 무수한 핸들바와 어깨 자국이 남아 있다.

행촌동에서 본 사직터널. 딜쿠샤를 가려면 사진 오른쪽에 있는 언덕길을 올라가야 한다.

큰 은행나무를 찾아가다 보면 막다른 길에 딜쿠샤를 찾을 수 있다.

권율 장군이 심은 것으로 알려진 은행나무.

딜쿠샤 (위치보기)

DILKUSHA 1923 이라는 집의 이름과 건축연도, 성경 구절 ‘PSALM CXXVII-I’(시편 127장 1절)이 새겨진 추춧돌이 거주민의 잡동사니에 가려져 제대로 볼 수 없다. 

강북삼성병원에 있는 경교장은 딜쿠샤와 멀지 않아 들려보는 것도 좋다. (위치보기)

백범 김구 선생의 집무실은 안두희의 흉탄을 맞은 곳이다.

백범 김구 선생이 입었던 옷과 데드마스크


은평구 신사동 산새마을

은평구의 신사동 '산새마을'은 재개발로 전면 철거될 위기에 있었으나 주민 반대로 철거 대신 노후 주택을 개보수하는 '두꺼비하우징'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뚜꺼비하우징은 재개발로 인해 지역 주민이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떠나는 기존 개발방식을 벗어나 개보수하고, 주민 편의시설을 제공하는 지역개발 사업이다.
산새마을의 공동 텃밭은 원래 개도축장으로 쓰여졌던 곳으로 4주 동안 20여 명의 주민이 4톤 트럭 30대 양인 30톤의 쓰레기를 치웠다. 이런 주민의 열정으로 텃밭에는 채소와 꽃이 피기 시작했고, 각종 매스컴을 타 산새마을이 알려지게 됐고, 방문객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6호선 새절역에서 상신초교 방향으로 가면 산새마을로 가는 언덕을 볼 수 있다.

산새마을은 개발부담금으로 인해 재개발 후 원주민이 돌아올 수 없는 기존 개발방식을 개선해 노후주택을 개보수하고, 편의시설을 제공하는 두꺼비하우징 프로젝트 시범지역이다.

개도축장으로 쓰여진 공터는 마을주민의 힘으로 쓰레기를 치워 텃밭으로 활용되고 있다. 산새마을의 텃밭은 각종 매스컴을 통해 소개되어 방문객이 많이 찾고 있다.




근현대의 삶이 남아 있는 미래유산

서울시의 미래유산은 국보, 보물, 문화재 등으로 등재되지 않았지만 우리의 삶을 보여주는 근현대
자료다. 일상적이고 문화재적 가치가 없는 것들이라도 몇십년, 몇백년이 지나면 이것 또한 문화재가 될 수 있다. 특히 근대 이전의 것보다 근대 이후와 현대의 것들은 현재 그 가치를 느끼지 못해 보존의 필요성을 덜 느끼게 되어 사라지기 쉽상이다.
창고나 서랍 구석에 팽개쳐진 물건을 다시 볼아보게 된다.

사직터널 바로 옆 교남동 재개발 지역을 보면서 산새마을이 생각나는 건 왜일까?

청진동 피맛골은 신축건물이 들어서 있고, 개발하면서 발굴한 건물터가 보존되어 있다.

서울시 미래유산은 후세에 알려줄 우리의 삶을 담은 타임캡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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