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3번의 결정타로 완전 K.O.
에디터 : 이호선

어제에 이어 오늘도 하늘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신경질적으로 비를 뿌려댄다. 두 번째 다운을 당하고부터는 걷는 것조차 너무 힘겹다. 그래도 나는 링 줄에 매달리며 일어난다. 나는 일어나야 한다. 나는 경기를 계속 해야 해. 아직 타올을 던지고 싶지 않아.
나는 루즈벨트(Roosevelt) 애비뉴를 천천히 걷는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일요일이야. 멀지 않은 곳에서 교회의 종소리가 흐느끼 듯 울려 퍼진다. 여기저기 골목에서 정장을 하고 성경책을 든 예배객들의 발길이 힘차다. 축복과 감사의 일요일 아침인데,………

8년 전 신문배달로 근무했던 중앙일보
36가에는 뉴욕 중앙일보사가 있다. 내가 8년 전에 한국으로 귀국하기 전에 2년 간 새벽에 3시간 반 동안 맨해튼에서 중앙일보를 배달한 적이 있었다. 물론 낮에는 일본인 메신저 회사에서 자전거로 서류배달을 하고 있었다.
새벽 신문배달이 끝나는 8시나 8시 반이면 길거리 벤더(Vendor,거리행상)로부터 1불 세트 조반(50센트 커피+50센트 버터 베이글)을 먹고 9시부터 저녁 5시나 6시까지 메신저를 한다.
맨해튼에는 잘 알다시피 그로서리&델리, 야채과일가게, 생선가게, 꽃가게, 세탁소&옷 수선가게, 봉재 공장, 네일 가게, 액세서리&모자가게, 그리고 식당 등 많은 한인업소들이 있다. 뉴욕의 대부분의 한인들은 주6일에 하루 10-12시간씩 일을 하고 있는데, 일하는 중간중간 하는 담배와 함께 고국의 소식을 읽는 것이 거의 유일하고 즐거운 낙이 아닐 수 없다.
출근길에 어느 노점상의 가판대에도 놓여 있는 한국 신문을 사 들고 직장으로 향하는 모습은 너무도 일상적인 한인들의 풍경이다. 나는 400여부의 중앙일보를 돌렸는데 한 번에 다 자전거에 싣지 않고 밴이 지역분할 포인트가 되는 두 군데에 나누어 떨구어 주면 그것을 픽업해서 돌리고 돌린다.
맨해튼은 주행 중 헐떡일 필요가 없을 정도로 완벽한 평지다. 담당 지역은 상당히 넓은 편이지만 주택가처럼 독자가 밀집되어 있지 않고 독자업소가 뚝뚝 떨어져 있기에 계속 도로를 달려야 한다. 그래서 펑크가 나면 골치 아프다. 항상 작은 색에는 에어펌프, 기본 툴, 스페어튜브를 가지고 다녀야 한다.
맨해튼은 바둑판 식 도로로 거의 모든 도로가 일방통행이다. 그래서 신문배달을 효율적으로 빨리 끝내기 위해서는 정확한 순서대로 돌아야 한다. 뉴욕의 교통법규는 혹독해서 자전거는 차량으로 분리되어 인도를 절대 달릴 수 없으며 신호무시의 경우, 일반차량과 똑같이 티켓(벌금통지서)을 받는다.
그뿐 아니라, 헬멧 미착용이나 자전거 벨 미비의 경우에도 티켓을 받는다. 자전거가 인도를 밟는 순간, 수 많은 보행자들로부터 무차별 총격의 타깃이 되는 데 무시무시한 악담이 난무하는 가운데 조용히 잽싸게 사라지는 것이 상책이다.

굶주린 나의 배를 채워주는 싸고 맛있는 배부른 중국 도시락(4불)

뉴욕 중앙일보 역사상 배달원이 그만 둔다고 송별회는 처음이야!
맨해튼에서 바이커의 최대 천적은 바로 옐로 캡인데 옐로 캡의 운전사들은 거의 대부분이 안전이라는 개념에 다소 생소한 구 소 연방, 이슬람제국, 인도를 위시한 동남아시아, 남미에서 온 갓 이민자들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 그들의 운전은 상당히 터프하다.
시간을 걸고 달려야 하는 메신저이기에 종종 그들과 온 몸 박치기를 본의 아니게 하게 된다. 하여간 맨해튼에서의 자전거 타기는 결코 만만치 않은 일이다.
신문배달 업에 제일 끔찍한 것이 비와 눈이다. 하늘에서 무언가 떨어지면 골치 아픈 것이다. 뉴욕에는 겨울에 눈이 자주 온다, 그것도 엄청난 양이. 한 번은 평상 시 3시간 반의 과업을 8시간 걸려 끝낸 적이 있다. 눈이 엄청 쏟아져 하염없이 눈 위를 걸어 최후의 독자인 42번가& 9에비뉴의 한 식당에 도착하니 낮 한 시였다.
도중에 펑크가 나며 눈 속에서 튜브까지 교체해가며 말이다. 마침 토요일이었기에 제설차가 전혀 출동하지 않았다. 감격한 식당사장님이 나에게 아침 겸 점심을 제대로 쐈다.

나는 2년 동안 단 하루의 펑크는 물론 지각도 없이 중앙일보를 배달했다. 한국으로 귀국하기 위해 배달을 그만 두었을 때, 뉴욕 중앙일보사의 두 간부직원과 함께 플러싱의 대형 한국식당, '금강산'에서 송별회 겸 회식을 했는데, 그 중 한 분이 나에게 말했다.
"뉴욕 중앙일보 역사상 배달원이 그만 둔다고 송별회 하기는 당신이 처음이야!"

컴퓨터에 절대 손 대지 마세요!!
오늘이 일요일이지만 신문사는 월요일신문을 위해 기자님들이 출근을 한다. 나는 쏟아지는 비를 흠뻑 맞기도 하면서 오후가 될 때까지 길거리를 방황한다. 오후 3시경, 나는 간신히 열린 중앙일보사 현관문을 두드린다.
한 젊은 기자님이 내려 와 문을 여는 순간, 승용차 한 대가 현관 앞에 선다. 내리는 분은 첫 눈에도 낯이 익는다. 송별회 때의 그 분이다. 나는 너무 반가워 인사를 하고 나의 간략한 이력과 내가 처한 지금의 상황을 설명했다.
"아, 그래요?! 그래서요??!!"
전혀 감정의 움직임이 없는 무표정의 얼굴로 그는 반문한다.
"……………………………………"
결국 나는 단 한가지 부탁을 한다.
"혹시 사내에 한인록이 있으면 볼 수 있겠습니까?! 그곳에서 한국의 민박집이라도 찾을 수 있다면,…"
그분은 곧 그의 승용차를 타고 그곳을 떠났고 나는 젊은 기자님의 안내로 2층으로 올라 가 한인록을 뒤진다. 하지만 한인록에는 비싼 모텔과 호텔뿐이다.
내가 사무실에 있는 또 한 명의 여성기자님에게 민박집의 여부를 묻자,
"분명 있어요. 하지만 인터넷으로 찾아야 할 걸요!!"
그녀는 나에게 아주 명쾌한 어조로 대답한다.
"그럼, 잠깐만 인터넷 좀 사용할 수 있을까요?!"
"컴퓨터에 절대 손 대지 마세요!!"
"………………………………………"

3번 무너져 완벽한 K.O패를 당해 버렸어
'이런, 이번엔 관자놀이에 훅을 제대로 허용했어. 나는 지금 비록 눈을 뜨고 있으나 내 눈앞은 노랗다가 까맣다가 하면서 뱅뱅 돌아간다. 어지러워 구역질이 날 것 같아. 누구 옆에 없어?! 아무래도 나, 이대로 갈 것 같아! 비록 나는 그곳에 계신 어머니가 너무 보고 싶지만 아직은 때가 결코 아니야!!'

나는 숨을 쉬기 위해 부리나케 그곳을 빠져 나와 계단을 뛰어 내려 간다.
'어라, 넓은 사무실의 맨 안쪽 깊은 곳에서 보이지도 않게 앉아 있던 그 젊은 남자기자 분이 어느 새 날라 내려와 유리로 된 현관문을 활짝 열고 얼굴 가득 환한 미소와 함께 나의 무사출행(無事出行)을 기원하고 있다.'
"이렇게 고마울 때가,……"

일본에서 WBA플라이급 세계랭킹7위, 일본 밴텀급 신인왕, 자위대 소속 복서 등등,…과 많은 스파링을 했고 뉴욕에 있을 때도 맨해튼에 있는 복싱장에서 남미 선수와 스파링을 하면서 가끔 나의 뇌 운동이 정지되어 샤워장에서 물을 뒤집어 쓸데 까지도 기억이 전혀 없었던 적은 있었지만 단 한 번도 무릎이 꺾이거나 다운된 적이 결코 없었는 데 10년 살았던 뉴욕에 다시 돌아 와 3번 무너져 완벽한 K.O패를 당해 버렸어!

"'어이, '엘파마'야! 너까지 어깨 축 늘어져 있으면 어떻게 하냐?!" 천천히 걸어 가다가 나는 문득,
"맞아, 거기 가보자."
나는 한국인 주인의 지하실 방에서 살기 바로 직전, 6개월 동안 살았던 중국인 주인 여자 집에 가보기로 한다. 나는 그 집의 지하실 방에서 다른 3명의 중국인 불법체류자들과 산 적이 있었다.
또 다시 61가 우드사이드(Woodside)를 향해 걸음을 재촉한다. 가는 길에는 많은 한국인 교회가 줄을 서 있다. 나는 혹시나 하고 그 동네에서 제일 큰 한인교회에 들어가 혹시 한국인 민박집을 아는 사람이 있는가 하고 예배 객에게 물어본다.
교회에는 각양 각지의 사람들이 오가기에 많은 정보가 가고 오리라는 확신 하에. 모두들 있다는 것은 확실하나 아는 곳은 없다고 한다. 젊으신 두어 명의 예비 목사님에게 물으니 똑 같은 대답을 하고는 자신의 사무실로 잽싸게 들어가며 사정없이 문을 닫아 버린다. 무척 바쁜 모양이다. 어디 가나 불경기라고 하는데 비즈니스가 바쁘면 아주 좋은 일이지!

비가 또 쏟아진다. 제발 부탁이다. 이제 그만 하지!
"여봐요, D.J! 신청 곡 하나 받아요! 곡목은 'Games People Play' sung by Joe South(1969)인데 한국에서는 '서 유석'씨가 '세상은 요지경'이란 노래로 번안해서 불렀다오."
비가 또 쏟아 진다. 오늘 하루 종일 비에 젖고 마르고 또 젖으며 이 지역을 하염없이 뺑뺑이 치고 있다.
"야, 하늘아! 제발 부탁이다. 이제 그만 하지?!!"
나는 비가 오거나 말거나 그 집을 향해 걸어간다. 내가 그 집의 벨을 누르자 현관을 향해 나 있는 창문을 열고 나를 유심히 내다보던 70 가까이의 그 중국인 아줌마는 새까맣게 그을린 나의 얼굴을 알아 보고는 이내 환한 미소를 짓는다.
자그마치 18년 만이다. 비록 내가 8년 전, 한국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몇 번인가 길에서 무심히 스쳐 지나간 적은 있다. 그녀를 따라 나오는 이는 바로 그녀의 유일한 딸. 그녀는 남편도 없이 그녀의 유일한 딸과 함께 살고 있었다.

나를 살린 중국인 아줌마
18년 전, 그녀의 딸은 뉴욕의 영재학교인 '스타이브슨트' 고교의 졸업반이었는데, 지금 이미 30대 중반의 여자가 되어 있었다. 그녀의 딸은 보스턴의 한 대학에서 파이낸셜 마케팅을 공부한 후 맨해튼의 한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고 한다.
내가 그 중국인 아줌마에게 나의 스토리를 공개하자마자 그녀는 책상 위에 어지럽게 놓여 있던 수북한 중국신문을 가져와 그녀의 딸과 함께 내가 부탁한 대로 싼 중국인 숙소를 볼펜으로 꼼꼼히 체크하며 전화를 건다.
그 아줌마는 비록 짧은 영어를 구사 할 뿐이지만 대략의 중국어와 완벽한 영어를 구사하는 그녀의 딸의 도움으로 정확히 전화 8통째 만에 하나가 걸렸다. 퀸즈의 플러싱(Flushing)에 있는 중국인 주택이다.
61가 & 우드사이드에서 똑 같은 7번 전철을 타고 15분 정도 달리면 나타나는 종점이다. 한 방을 몇 명이 함께 쓰고 있는지는 모르나 하여간 하루 10불이라고 한다. 10은 경이로운 숫자이다.

나는 그녀의 딸이 영어로 적어 준 주소와 전화번호를 받아 들고 잰 걸음으로 우드사이드역으로 향했다. 그 중국인 집은 정말 찾기 쉬웠다. 2층의 일반주택이다. 나는 자전거에서 모든 짐을 분리해 자전거는 뒤뜰에 있는 창고에 넣고 짐을 들고 2층으로 올라가니 역시 예상했던 대로 벌거벗은 중국인들이 말 그대로 우글우글하다.
나는 이미 18년 전 지하실에서 6개월 동안 중국인들과 함께 살았고 2년 전의 세계일주 때 2달간, 그리고 이번에 2주간 중국을 여행하는 동안 중국인의 문화와 습관에 상당히 익숙해져 있어 조금도 불편을 느끼지 않는다.
하룻밤 오직 10이라는데 두말하면 개소리지. 방문을 열자, 작은 방에 2층 침대 4개. 그렇다면 2x4=8, 여덟 명이라는 얘기이군. 2층에만 작은 방 3개에 20여명의 신분불명의 중국인이 거주하고 있다. 아래층은 아래층대로 바글바글하다.
무슨 상관이냐?! 단 한 곳 비어 있는 침대의 2층에 올라가 누우니 비로소 긴 안도의 숨이 터져 나온다. 연일 비가 쏟아지고 있는 뉴욕의 하늘아래 드디어 나는 나의 보금자리를 찾았어!

플러싱의 8명이 우글대는 중국인 집의 내방

우리는 잠깐 동안 짝퉁 천사 옷을 입고 연극을 한 것뿐인데...
2층 침대에 누워 있자니 그 동안 내가 달렸던 중국, 몽고, 밴쿠버, 그리고 미국대륙에서 내가 겪었던 수 많은 이들의 모습이 어지럽게 겹친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한결같이 나를 바라보며 낄낄대고 깔깔대며 박장대소를 하기도 하고 배를 움켜지고 죽을 듯이 웃고 있지 않은가??!
"요놈아, 쌤통이다!! 너는 정말 얼빠진 놈이야. 이제서야 세상의 진실을 겨우 알았으니 말이야. 우리들은 모두 잠깐 동안 짝퉁 천사 옷을 입고 연극을 한 것뿐인데 너는 감쪽같이 속아 감동도 모자라 경이의 눈물까지 찔금 거렸으니 말이다. 어쨌거나 너는 그들에게 네가 죽는 그날까지 가슴 깊이 감사함을 느껴야 해! 이세상의 진실과 교훈을 너에게 확실하게 깨닫게 해 주었으니 말이야!!"
결국 그 중국인 아줌마가 나를 구해주었네! 그녀는 분명 인간사막에 피어 있는 찬란한 할미꽃이야!

"아, 배고프다!"
나는 이미 잘 알고 있지.
이곳 플러싱에는 중국인들도 많이 살지만 값 싼 중국인 식당들이 즐비하지.
내가 김치 깍두기 먹어 본지가 언제냐?!
하지만 앞으로도 언제 한 번 먹어 볼지 모르겠군.

나는 7월 2일 밴쿠버를 출발해 로키 산맥을 넘고, 7월 9일 아이다호(Idaho)의 포트힐 보더(Port hill border)를 넘어 미국에 들어 와 8월 21일 오후, 뉴욕의 맨해튼에 도착했다. 49일 걸려 북미를 횡단 했다.
총 거리는 5,543km(밴쿠버- 뉴욕)를 기록했다. 5월 7일, 서울의 시청 앞을 떠나 중국을 거쳐 고비사막을 넘고 다시 이곳, 뉴욕까지의 총 주행거리는 8,327km를 기록했다.

북미횡단 경로

낡은 미국 지도

그동안의 일기



여행 후원: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위의 기사는 개인적인 용도 및 비상업적인 용도의 '퍼가기'를 허용하며, 상업적인 용도의 발췌 및 사진 사용은 저작자의 허가를 받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