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고비사막, 드디어 해냈다.
에디터 : 박규동

2011년 07월 21일   木   맑은 후 흐림, 약간의 소나기
28.8km 운행.      자망우드 역전에서 호텔에 숙박, 43도43'04,41+111도54'21,60

아내의 눈가 주름이 섬세하다.
늙음이 이렇게 꽃다울 수가 있을까!
고비에서 우리는 하루도 구름이 아닌 적이 없었고, 바람이 아닌 적이 없었다. 모래가 아닌 적이 없었고, 늑대가 아닌 적이 없었다. 꽃이 아닌 적이 없었고, 석양이 아닌 적이 없었다. 늑대처럼 살았고, 구름처럼 사막을 뒹굴었다.
파동과 공명으로 우리를 감동시켰던 고비의 길들이 이제 끝난 것이다. 아내의 눈가에 웃음이 주름으로 포개어진다.
여보! 당신 최고야! 한국아줌마 최고!




그늘을 찾아와 쉬고 있는 도마뱀

간밤의 섬뜩했던 사건은 우습게 끝나고 새로운 아침은 활짝했다.
몽골고비의 마지막 날이라는 기대 때문인지, 아니면 호텔에 들려 샤워를 진하게 해야겠다는 희망 때문인지 몸이 가벼웠다. 어제 얻은 물이 충분하여 기분 좋게 양치질도 하였다. 이게 며칠만인지?
기차길도 점점 가까워졌다. 전주가 어느 한 방향으로 나란히 서 있다. 자동차도 자주 보인다. 국경도시 자밍우드가 가까워진 것이다.

도시가 언듯 보이기 시작하자 안도의 마음이 인다.
모래길에서 점심을 먹고 언덕을 올라갔다. 자전거의 속도가 느리지만 오르막은 끝이 있었다. 먼 데에 기차역이 보였다.
바람이 둔갑을 하더니 회오리로 변한다. 겉에 황사 옷을 갈아입더니 미친듯이 날뛰며 하늘 높이 춤을 춘다. 회오리바람으로 태어나 지랄을 하다가 거꾸로 죽어가는 과정을 샅샅이 볼 수 있다. 넋을 비우고 바라보았다. 어린 시절에 나는 그 회오리바람의 중심을 쫓아 다니며 내가 바람이 된 것처럼 미쳤던 기억이 있다. 고비의 회오리는 미처 토네이도가 되지 못 하고 주저 앉는다. 나는 바람이 살아서 술에 취한 놈처럼 지랄을 하는 게 너무 좋다. 고비니까!






마지막으로 보이는 서낭당 어워가 자동차 옆에 서 있었다.
나도 세 바퀴를 돌았다. 아름다운 이 길을 건너올 수 있도록 도와준 많은 인연들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청년 바타, 영롱한 웃음으로 나의 기운을 북돋아 준 바트체첵 양, 손을 흔들어 주던 트럭 기사들, 기차의 기관사도 기적을 울리며 손을 흔들어 주었지, 며칠만에 한번씩 받아 보았던 한국에서의 문자 편지, 그 중에서도 "사람은 마음 먹기에 달렸다!"고 하신 노을 청호님, 박언진의 나침반, 응원해 준 가족들...... 모두를 위해 기도했다.

멀리서 비구름이 동풍을 타고 다가왔다.
천둥이 치고 번개가 번쩍이는 게 소나기를 뿌리는 모양이다. 그 소나기 뒤로는 무지개가 피었다. 동풍을 탄 비구름과 우리의 진행이 맞아 떨어지며 삽시간에 소나기 세례를 받았다. 우산을 받쳐들고 10여 분 동안 소나기를 맞았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사막에서 처음으로 맞는 비다. 누군가 사막에서 비를 맞으면 10년은 재수가 좋다고 했다. 마지막 날을 축하해 주는 세례의식처럼 우리의 재수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멀리 자밍우드가 보였다.

바다가 비에 젖지 않는 것처럼 사막은 바람에 마르지 않는다.
마르고 말라서 더 마를 게 없는 곳이 고비사막이다. 내 몸 속까지 말라서 안에 있던 쓰레기같은 마음도 말라 없어져 버리면 좋겠다. 말라버린 그 빈 가슴에 사막꽃 하나 심으면 더 좋겠다.


자밍우드를 2km 남겨두고 모래길을 만났다.
1.5km는 되는 거리이다. 모래층이 워낙 두터워서 나중에는 자전거와 트레일러를 분리하여 하나씩 들어 끌고 밀면서 옮겼다. 아내의 기운이 다 빠져나가는 길이었다.
그 길의 끝에 자밍우드가 있었다. 지금부터는 포장도로가 서울까지 이어질 것이다.
먼저 바타에게 전화를 했다. 바타는 그의 친구 미스터 살론이 세관에 근무를 하고 있으니 만나보라고 하였다. 세관에 있다면 어차피 신세를 질 것 같아 연락을 미루었다. 내일 국경을 통과할 때에 세관사항이 다 끝난 다음에 전화를 할 생각이다.
자밍우드역 광장에 자전거를 세우고 기념사진도 찍고 호텔도 알아 봤다. 역광장 맞은 편에 호텔을 잡았다. 3성급 호텔이다.

신발에서 모래를 털어내는 아내 불근늑대

뒤로 무지개가 떴다.

자밍우드역 광장

샤워는 행복했다.
생전 처음으로 소나기를 맞는 그런 기분이다. 샤워를 못한 게 1주일은 된 것이다. 다친 팔목에도 물을 뿌렸다. 견뎌주어서 고맙다. 왼팔아!
욕심같아서는 자전거와 트레일러도 말끔하게 세척을 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아직도 물이 부족한 곳이 아닌가. 참자!


역광장 남쪽에 있는 서양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식당에서 가장 비싼 음식과 포도주를 주문했다. 오늘은 우리가 해냈다는 것을 자축하고 싶었다. 갈등과 긴장을 참아내며 먼길을 달려준 아내 불근늑대와 나 스스로에게 축하해 주고 싶었다.
"여보! 우리가 해냈어! 고마워요!"




2011년 07월 22일   金   맑음
13km 운행.    빈관에서 숙박

나도 육로로 국경을 넘어 보기는 처음이다.
물론 유럽에서는 거의 검문이 없이 국경을 넘기 때문에 사실 다른 나라로 국경을 넘어 간다는 느낌이 별다르게 없었다. 우리나라는 외국을 나가자면 어쨌던 비행기를 타던지 배를 타고 국경을 넘기 때문에 통관이나 출입국심사가 국제수준으로 관례화 되어 있어서 별 어려움이 없다.
몽골과 중국을 넘나드는 자밍우드에서 에렌하우터까지는 눈에 보이는 가까운 거리인데도 불구하고 아주 멀고 힘든 길이기도 하였다.

자밍우드에서 국경으로 가는 길

아침 9시에 호텔을 출발하여 국경출입국사무소로 향해 페달을 밟았다.
시내에서 출입국사무소까지는 약 3km로 최근에 포장된 근사한 길이다. 아스팔트도로에 대한 고마움이 오늘따라 하나 둘이 아니다. 한국에서는 아스팔트길에 대한 혐오같은 감정들이 다소 작용하여서 임도나 산악오솔길을 자전거로 타고 나면 무슨 청량제라도 마신 것처럼 자랑이 널렸었는데 말이다.
우선은 팔목 부상에 충격을 주지 않아서 좋다. 짐의 무게가 반으로 줄어든 만큼 자전거가 가볍게 느껴져서 좋다.
그렇게 출입국사무소로 가고 있는데 차량행렬이 한 1km나 늘어서 있다. 우리도 그 뒤에 서서 차례를 기다려야할지 망설여졌다. 그때에 출입국사무소로부터 관청 표시를 한 승용차 한 대가 달려오더니 우리 앞에 섰다.

출입국관리소의 고위직으로 보이는 그는 우리에게 영어로 말했다. "국경은 오직 자동차로만 건너갈 수 있습니다!" 라고 하면서 자기를 따라 오라고 했다. 긴 차량행렬을 다 지나쳐 세관검사장 앞까지 안내를 하면서 지나가는 한 여인을 부르더니 우리를 인계해 주었다. 40대 중반의 이 여인은 우리의 또 다른 천사였다. 세관직원들과도 꺼리낌없이 대화를 하면서 우리의 출입국수속을 도와 주었다.
이 민간인 여자가 누구일까 궁금했다. 그녀는 영어를 할 줄 몰라 우리에게 계속 몽골어로 얘기를 했고 아내와 나는 공용어로 그것을 해석했다. 자전거는 엑스레이 검색대를 거치지 않고 통관을 했지만 트레일러는 엑스레이 검색대를 거쳐야 한다고 하여 건물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우리나라 지방의 버스정류장만한 좁은 건물이었다. 통관을 기다리는 몇백 명의 대기자들은 한치라도 앞에 서려고 눈치를 보는 아주 혼잡한 지경이었다. 그리고 건물의 문은 좁아서 트레일러가 한번에 빠지지 않았다. 그런 잡다한 걱정거리를 그 여인은 모두 해결해 주었다.
문이 좁은 곳에서는 한쪽 문을 열어 주었고, 미처 준비하지 못한 출입국 서류도 잊지 않게 챙겨주었다.

바타의 친구 미스터 살론과 대화를 나눔

통관이 끝날 때에 즈음하여 바타의 친구 미스터 살론에게 전화를 했다.
영어가 통했다. 그는 바로 찾아왔다. "문제는 없느냐?"고 물었다. 나는 "아무 문제도 없다." "왜 어제 저녁에 연락하지 않았느냐?" "피곤해서 일찍 쉬었다."하면서 만남과 헤어짐을 동시에 하게 되었다.
중국으로 가는 차편은 소련제 짚차였고 그 여인은 그 차 중 한 차의 기사였다. 시장보다 더 소란스러운 풍경이지만 그 와중에도 그녀는 우리를 아주 귀하게 대하여 주었다. 살론과 헤어지면서 바타가 사 주었던 전화기를 바타에게 전해 주라고 그에게 주었다.
그 좁은 짚차에 사람을 여섯 명을 태우고 짐을 더 싣는 신기한 마술을 보았다. 내 자전거는 짚차의 지붕으로 올라갔고 내 트레일러는 짚차의 본닛 위에 올라 탔다. 아내의 자전거와 트레일러는 다른 짚차의 뒤 트렁크같은 좁은 공간에 메달았다. 그러구서 국경구역을 건넜다.
본닛 위에 올라탄 내 트레일러는 줄로 묶여진 상태도 아니여서 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조마조마 했다. 그 여인의 운전솜씨는 마술처럼 마음을 긴장시켰다. 무사히 중국 출입국관리소에 닿았다. 10분도 안 되는 거리이다.

0896 짚차와 오른쪽에 있는 여인이 우리의 천사였다.


우리를 날라다 준 고마운 짚차

자전거와 트레일러를 조립하여 중국출입국사무소로 들어갔다.
건물도 웅장하고 시설도 깨끗하다. 나무도 많이 심어져 있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 세관대 앞에 줄을 섰다. 그때 또 다른 천사가 나타났다. 우리의 행색이 워낙 남의 눈에 띄는 탓이기도 하지만 하얀 머리에 수염이 텀수룩한 노인과 할머니로 됀 자전거여행자 커플은 그 누구도 보기 힘든 장면이었을 것이다.
젊은 사관으로 보이는 이가 다가와 영어로 인사를 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시는지요?" "우리는 울란바타르에서 출발하여 베이징을 거쳐 서울로 가는 자전거여행자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요!" "네! 고맙습니다."
그는 무전기를 들고 어디론가 통화를 한다. 잠시 후에 그의 상관으로 보이는 40대 여인이 나타났다. 관복을 말쑥하게 차려입고 반듯하게 우리를 대하면서 무척 반가워한다. 함께 사진도 찍자고 하여 기념촬영도 하고.......  세관심사는 생략되고 출입국수속만 간단하게 이뤄졌다. 출입국관리소에 소문이 퍼지면서 여러 명의 직원들이 찾아와 통성명을 하고 사진도 찍었다. 환대도 이만한 환대는 없을 것이다. 딱딱하기로 소문난 중국 관리들에게 환대를 받다니 꿈같은 일이었다.
중국에 대한 그 동안의 편견이 하루 아침에 달아나 버렸다. 중국이 이렇게 변하고 있구나!
그들이 편의를 제공하여 우리는 버스편으로 에린하우터 시내까지 편하게 올수 있었다.



가운데 모자를 쓰지 않은 젊은 사관이 우리를 극진히 대해 주었다.

버스는 우리를 에린하우터 버스정류장에 내려주었다.
다시 자전거를 조립하고 마무세를 한 뒤 자전거를 타고 버스정류장을 벗어나려고 하는데 어디서 우리를 향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국경을 건네주었던 짚차의 그 여인이었다.
그녀는 차 안에 놓고온 의자 두 개와 카메라 삼각대를 들고 우리를 찾아온 것이었다. 우리는 잃어버린 것도 모르고 있었는데 말이다. 그 느낌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르겠다. 복을 받아야할 사람은 그녀가 아닐까?

수속이 끝나고 중국으로 입국하는 첫 관문이 무지개로 만들어져 있다.

중국출입국사무소 건물

중국에서 첫 식사

여기는 중국, 갑자기 배가 고팠다.
아침을 얼렁뚱땅 빵으로 때운 탓인데다 남대문시장보다 더 혼잡스런 장터를 몇 시간 헤매이다 보니 기운이 다 빠진 것이다. 길 건너 보이는 허름한 식당을 찾아갔다. 하릴없는 중국노인들이 식당을 하는 친구의 식당에 몰려 앉아 잡담을 하고 있었다.
몽골어에서 갑자기 중국어로 모드가 바꿔진 상태이다. 어쩌긴 뭘 어째 그냥 공용어 모드로 가는 거지. 나이가 들었어도 재치있는 주인장 남자는 안으로 들어가더니 노트를 한 권 들고 왔다. 노트에는 중국어 식단 아래로 영어로 자세하게 설명을 해 놓은 게 있었다. 본인도 모르는 영어를 누군가에게 부탁하여 만들어 놓은 것이다. 에린하우터는 국제도시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가지 음식을 주문하여 맛있게 먹고 잠자리를 찾았다. 여기서 이틀은 더 쉴 생각이다.

어릴때 학교에서 배운 한자가 도움이 되었다.
지금 중국에서는 간자를 쓰고 있어서 비슷하지만 정확하게 의미를 모르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간판의 반이라도 이해를 한다는 것은 여행자에게 이만자만 편리한 것이 아니다.
기차가(汽車街)에서 트윈 스탠다드를 하루에 80위안하는 빈관을 찾아 들었다. 빈관에서 체크인을 하는 과정에 다소 오해가 있었다. 3박을 예약하는데 돈은 240위안이 아니고 440위안을 내라는 것이 아닌가!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고 고개를 수도 없이 갸우뚱 된 결과 나머지 200위안은 보증금이라는 걸 알았다.
몽골에서는 호텔에 체크인을 하면 무조건 여권을 맡겨야 하는데 중국에서는 보증금을 내라는 것이다. 그렇게 돈을 지불하고나니 카운터의 여인도 활짝 웃는 게 아닌가. 하이 참! 영어 할 줄 아는 사람을 데스크에 앉혀두면 좋을 걸, 아니면 아까 식당의 노인처럼 영어로 설명서를 적어서 외국인 오면 보여주고 대화를 하든지.

중국에서 찾아든 첫 숙소



몽골에 비하면 차이가 많은 세상이었다.
물가도 싸고 헐했다. 골목시장에 가더라도 과일, 야채, 고기 없는 게 없다. 숙박비도 트윈 스탠다드가 80위안이면 우리돈 1만4천이다. 서민들이 주로 이용하는 식당에서는 두 사람이 한 끼를 먹어도 30위안으로 충분하다. 몽골에서는 어림도 없는 값이다. 철로와 육로가 동시에 좋아지면서 물량공급이 수뤌한 덕일 것이다. 중국이 그렇게 변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물을 맘껏 쓸 수 있었다. 몽골의 지방에서는 호텔이라고 하여도 어느 시간이 지나면 단수기 되기 일수였고, 전기도 어느 시간대에는 끊기고 하였었다.
샤워를 하고 아내는 빨래를 하였다.

내일, 모레까지 푹 쉬어야겠다.
그럴만한 자격이 있지 않은가!


여행 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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