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젊은날의 추억과 함께 달린 일본
에디터 : 이호선

그녀(토미코)에게는 자식이 없다. 그림을 유난히 좋아하는(지금도 옛날의 내 스케치를 간직함.) 그분은 나를 친자식처럼 보살펴 주셨다.
내가 결혼을 결정하자, 그녀는 우리 둘을 위한 아파트를 얻어주셨고 내가 결혼식을 위해 한국에 들어가는 날까지, 매일 그분이 직접 마련한 이부자리를 깔아 놓으셨고, 일본식 목욕탕의 물까지 데워 놓으셨다.


'나리타(成田)공항!'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도착했던 곳이다.
1984년 9월, 멀고도 먼 나라, 일본의 도쿄행 KAL기를 타기 위해 김포공항의 출국장(出國場)에 들어선, 나를 포함한 25명의 건장한 한국 최초(!)의 '일본신문 근로 장학생(신문배달원)' 지원병들은 그들을 배웅하기 위해 모여든 그들의 부모들 앞에서 눈물을 펑펑 흘리며 울었다. 출국장 앞은 거짓말하나 안 보태고, '눈물의 바다'였다.(그때는, 오전 4시간의 '소양교육(국민정신교육)증'이 없으면 여권조차 발급받지 못했던 시절이다.)
나를 포함한 전원은 일본에 파병되는 병사들처럼 비장했으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드디어 25명의 최정예, '그린베레'를 태운 비행기는 거침없이 거칠고도 푸른 동해(東海)를 날아 멀고도 멀기만 한 나라, 일본의 '나리타(成田)'공항에 도착한다.(나리타 공항에서 입국신고서(入國申告書)를 쓰는 동안, 25명 중 많은 수의 병사들이 손을 떨어 오자(誤字)의 속출로 수없이 신고서를 구겼고, 휴지통엔 구겨져 버려진 신고서로 수북했다.) - 믿거나 말거나!!!

도쿄(東京)는 군재대 후, 다니던 대학(인하대 해양학과)을 집어치우고, 건너가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한 곳으로, 5년여 동안 갖은 잡일을 전전하며 내 염원이었던 그림공부(서양화)를 하면서 내 인생 중, 수많은 숨 가쁜 사건들과 스토리가 있었고 아주 많은 인생 공부를 한 곳이다.

일본은 이미 여러 번 자전거여행을 했다.(항상, 부산-시모노세키를 다니는 '부관(釜關)페리'를 이용했다.) 도쿄에는 친 어머니와도 같은 분이 계신다. 올해 78세인 사쿠마 토미코(作間 富子)씨이다. 일본에서의 고학시절, 나를 그녀의 친 자식처럼 대해주셨던 분이다.

나는 이미 이 세계여행을 하는 중간 중간 지나가는 나라의 그림엽서를 그녀에게 보냈다. 나는 '천황궁(皇居)'의 하나인 모또 아카사카(元 赤坂)의 모퉁이를 돌아 왕실(王室)의 자제가 다닌다는 '가쿠슈잉' 소학교(學習院 初登科)를 지나 바로 시작되는 신주쿠(新宿)區의 와카바 쬬(若葉 町)에 들어선다.

내가 1년 가까이 신혼생활을 했었던 개인주택의 사글세 아파트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5층짜리 현대식 빌라가 들어 서있다.
결혼 1년 만에 '아자부(麻布)'에 있는 한국영사관에 가서 헤어짐을 위한 '도장'을 누르기 전, '한 담배'를 피우고 오라며, 15분간의 '숙려시간'을 주신 자비로운 영사님 앞에서 우리는 서로의 '도장'을 단호하고 비장하게 눌렀다.
나의 집과 그녀를 남기고, 나는 내가 처음 일본 땅을 밟았을 때 끌고 왔던 바퀴가 달린 큰 이민용(用)가방 하나만을 든 채, 스기나미(杉並)區의 고우엔지(高円寺)에 있는 나의 소중한 친구, '박 성춘'의 아파트로 들어간다.
그의 4. 5조(粗) 다다미방(房)은 두 사람이 누우면 더 이상의 여유 공간이 없다. 둘이 자다보면 본의 아니게 서로를 밀거나 치기 일쑤다. 늦은 밤이나 새벽에 술을 한 잔 걸치고 방에 들어 올 때에 그를 밟은 것이 부지기수이다.(나는 일식집에서 일을 하다보니 항상 술에 절어 다닌다.) 하지만, 그는 술 담배를 전혀 하지 않는다.

1번 국도를 타고 달리다가, '교토 미나미'(京都 南)를 지나, 효고 현(兵庫縣)의 희메지(姬路)시(市)를 향해 지방도로372를 타고 달리다 보면 밭과 논, 그리고 높지 않은 산들이 계속된다. 마치 한국의 조용한 시골길을 달리고 있는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이혼을 한 후, 약 3개월간 나에게는 지옥과 같은 나날이 계속된다. 매일, 밤잠을 자기 위해 눈을 감으면 어둠 속에서 검은 옷과 검은 모자를 쓰고 인상이 고약한 '저승사자'들이 차례차례 나에게 다가와 손가락질을 하고 저주의 낱말과 문장을 읊어 대고 그들 중 극악무도한 분은 나의 목을 조르기도 한다. 내가 겨우 그들의 시달림에서 벗어나 눈을 뜨면 온 몸은 땀으로 흥건하다.
내가 다시 눈을 감으면, 검은 그 분들은 그들의 댁으로 돌아가지 않고 휴식을 취하며 기다리고 있다가 다시 내 앞으로 달려들며 똑같은 지랄발광을 계속하신다.
나는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그들에게 무릎을 꿇고 그들에게 이끌려서 그들이 있는 암흑의 나라에 아직은 결코, 절대로 가고 싶지 않다.
내가 꺼낸 비장의 카드는 다름 아닌, 주도(酒道)이다. 나는 이것의 단련으로 그 분들 모두를 박살낼 것이다. 검은 복장의 분들이 나타남과 동시에 나는 사력을 다해 눈을 뜨고, 새벽 2시건 3시건 개의치 않고 자전거를 타고 동네로 나가 주도(酒道) 도장(道場)인 '주가(酒家)'로 달려간다. '주도(酒道)'의 수련을 마친 후에 나는 자전거를 타고 온 동네를 휘저으며 집에 돌아온다.(나는 확실히 기억을 할 수는 없으나, 만취운전 중 수없이 쳐 박았음.)

일본은 기후가 아주 습해 바퀴벌레가 많고, 그 크기는 거의 물방개 수준이다. 일본엔 또한 까마귀가 많다. 우리에게 흔한 똑 같은 '까씨(氏)'족속인 까치는 일본에선 안 보인다.
아침에 동네나 공원주변의 휴지통엔 온통, 새까맣고 흉측한 까마귀들이 모여 들어 아우성친다. 특히, 비 오는 날 아침에 보는 까마귀는 정말 나를 우울하게 만든다. 새벽에 동네골목을 걷다 보면 많은 고양이 시체를 목격한다. 모두가 차량에 치어 죽은 것인데, 그 만큼 일본에는 고양이가 많다. 개를 키우는 집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이 고양이다.
반면에 한국엔 개가 대부분이다.
일본인은 보통 처음 만나는 사람들을 대단히 경계를 하며 쉽사리 자신의 속마음을 남의 앞에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고양이의 속성과도 비슷하다.
하지만 개는 사람을 잘 따르고 쉽게 친해진다. 한국 사람들은 처음 만난 사람이라도 한 잔술의 대화로 금방 경계의 벽을 부수어 버리고, 낱낱이 까발리며 친구가 된다.
일본인들은 솔직하고 성실하며 예의 바른 동양인으로 우리와 아주 친숙하고 가깝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고양이의 그것과도 같은 그들의 속성은 우리에게 아주 생소하고 먼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예고 없는 나의 방문, 그것도 자전거로 세계일주를 하고 돌아온 나의 방문에 도미코씨(氏)는 기뻐 어쩔 줄을 모른다. 그녀는 혼자 살고 계시기에 조그만 아파트의 이층에 살고 계신다.
벨을 누르자 그녀는 이층계단을 달려 내려온다. 영특하고 단호하며, 그리고 아주 부지런한 전형적인 일본 여인으로 나이가 드시면서 완벽하게 희어진 그녀의 머리카락과 함께 아주 현명하고, 인생을 달관한 듯한 경륜이 배어 나온다. 정말 멋있는 할머니가 되셨다.
나는, 그녀의 집에 들어서자마자 방의 정면 왼쪽 편 구석에 설치되어 있는 도미코씨(氏)의 남편인 사쿠마씨(氏)의 제단 앞에 가서 인사를 드린다.
일본의 거의 모든 가정집에는 돌아간 자신들의 부모나 가족의 제단을 조그맣게 만들어 놓고 수시로 음식물을 올리고 망자(亡者)와의 대화를 계속한다.
일본인들은 예수라든가, 알라라든가, 부처라든가 하는 특정한 우상보다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나 그들의 삶과 관련된 물건들 자체를 모두 소중하게 생각하고 정성으로 모신다.

이미 일본인들의 삶의 일부가 된, '제일동포'들의 또 하나의 삶의 터전인 '빠찡코' 가게들은 어디서든 보기 쉽다. 한류의 전설이 된 '겨울동화'는 '빠찡코'의 게임이름에 마저 등장한다.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 기본적이고 제일 중요한 일이 음식섭취이다. 잘 먹는다는 것은 음식을 어떤 타박이나 편식하지 않고 골고루 섭취하며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먹는 것을 뜻한다.

일본사람들은 오 고메'お (御) 米'-쌀, 오(御)가즈'お 菜'-반찬, 오 사카나'お 魚'-생선, 오 사케'お 酒'-술, 오 니꾸'お 肉'[-고기, 오 차'お 茶'-차 등과 같이 먹는 것에도 경어를 부친다.(お는 '어(御)'를 나타내는 경어를 위한 접두사에 해당한다.)
그리고 가족끼리도 항상 밥을 먹을 때마다 "いただきます(이따다키마스)"-잘 먹겠습니다-를, 그리고 다 먹은 후에는 "こちそうさま(코찌소우사마)"-잘 먹었습니다-를 자신에게 외친다. 나는 이 말을 군대의 신병훈련소에서만 했을 뿐이다.
일본인들은 음식을 남겨 버리는 것을 죄악시 한다. 그들은 밥그릇에 붙어있는 단 몇 개의 밥알조차 물을 넣어 완벽하게 털어 먹는다.
많은 한국인들이 항상 보약, 보신탕에 광분한다. 우리들은 이미 충분한 양과 충분한 영양가의 음식을 먹고 있다. 우리가 지금 먹고 있는 음식들이 보약이고 보신탕인데, 또 어떤 것이 더 필요하다는 말인가?!(여태껏 보약, 보신탕에 광분한 내 주위의 사람들 중 '십 중 열'이 장수는커녕, 모두 병으로 단명(短命)했다.)
일본인들은 결코 우리와 다르거나 특별한 것을 먹지 않지만 그들은 결코 보약이나 보신탕을 운운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세계 최장수국이다.
진실은 항상 단순하고 명료하다.

그녀의 책상 앞에는 내가 이미 보낸 그림엽서들이 순서대로 서있다. 그녀는 책 읽기를 좋아하고 항상 무엇인가 쓰는 것을 아주 좋아한다. 그녀는 대단한 달필(達筆)인데, 그녀의 글씨는 힘차고 대담하다. 방송국에 종종 자신의 사연과 함께 엽서를 띄운다고 한다. 많은 응모자들을 제치고 그녀는 이미 세 번이나 뽑혀 방송이 된 행운 아닌 실력을 가지고 계신다.
사쿠마씨(氏)가 생존해 계셨을 때부터 두 분은 한국의 수퍼스타인 '계 은숙'씨와 '김 연자'씨의 열렬한 팬으로 특히 '김 연자'의 디너쇼에는 반드시 참석하셨다고 한다. 그녀는 김 연자씨의 디너쇼에서 김 연자씨와 같이 찍은 사진을 보여준다. 또한 그녀는 '욘 사마'가 아닌 '이 병헌'의 열렬 팬으로 이미 수 차례에 걸쳐 한국을 방문했으며 많은 테마파크를 마스터 하시고 '김 연자'씨의 김치 담그기 강좌에도 참석하시는 등 아주 건강하고 바쁜 삶을 살아가시고 계신 것 같다.
그녀가 배달시켜 같이 먹은 교자와 '된장 생(生)라면'은 정말 맛있다.(내가 올 때마다, 유명한 '생(生)라면'집에서 배달시켜 먹는다.)구수하고 담백한 된장 생라면을 먹고 나니, 나의 몸은 불어버린 라면 발처럼 흐물댄다.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돌아서는 나에게 그녀는 외친다. "너는 내 인생 최고의 자랑이야!"

오래 전, 많은 세월 동안 나의 치열한 '삶의 현장'이었던 도쿄의 시내를 천천히 돌아보는 동안, 만감이 교차하며 나의 온몸은 경직되고, 핸들을 잡은 두 손에는 어느덧 땀이 배어있다.

도쿄시 외곽, 강호천구(江戶川區)의 서단강(西端江)에서 1년 가까이 쌀 자전거 수준의 무거운 쇠자전거로 아사히(朝日)신문을 배달하며 일본어 학교를 마친 후, 도쿄 한복판에 있는 특급호텔 '뉴 오타니(New Otani)' 호텔에서 접시닦이, 일식집에서 웨이터, 캐셔, 배달까지 하며 낮에는 '기치조오지(吉祥寺)'에 있는 아트스쿨, '무사시노 미술학교(武藏野美術學園)'에서 서양화공부를 한다.
80년대만해도 도쿄에서 한국인 보기란 '캐나다 도로변에서 쓰레기 발견하기'만큼 어려웠다. 호텔에서도, 일식집에서도 나는 항상 여러 의미의 시선을 감수해야했고, 스트레스가 쌓였다.
치열한 삶의 현장인 호텔에서 정말 많은 수의 종업원들 중 유일한 외국인으로서 나는 웨이터, 요리사, 매니저들과 수많은 격돌을 거듭하며 나의 생존게임을 계속했으며 결국, 나는 '한 한국인'하며 무적의 사나이가 되었다.

일본인들은 주먹대결을 할 때, 보통 자신이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면, 정말로 깨끗이 무릎을 꿇는다. '사꾸라(櫻)'다! 하지만, 그것이 승부의 끝은 결코 아니다. 무릎을 꿇은 자는 꿇는 순간부터 '마음의 일본도(日本刀)'를 갈기 시작하고 나중에 그 승자를 단칼에 벤다.
하지만, 한국인은 그 어떤 상황에도 절대 꿇지 않는다. 한국인은 최후의 최후까지 '개긴다'. '무궁화(無窮花)다! 쥐방울만한 우리나라가 대국들 틈에서 살아남고, 이렇게 강국이 되기 위해 끈질기게 개기는 '무궁화'가 아니었던 들  과연 가능했겠는가!
일본인들 또한 성질이 급해 주먹이 앞서지만 한국인은 그들보다 훨씬 '인내의 끈'이 짧다.

일본에서의 묘지는 동네 곳곳에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세워져 있어, 죽은 자와 산자가 함께 숨을 쉬며 살고 있다.  습한 나라답게, 묘지의 모습은 항상 우중충하고 음침하다. 죽음이란 삶의 또 한 부분으로 삶과  결코 잘라 생각할 수 없는, 삶만큼 중요 할 수 있다.


나는 매일 서너 시간 뿐의 잠을 자면서도, 틈틈이 '천왕궁(皇居)' 주위를 뛰고 일주일에 두 세 번씩 신주쿠(新宿)區의 오오쿠보(大久保)에 있는 복싱체육관(Bel Kyoei Gym; ベル協榮拳鬪ジム)에서 상대불문, 체급불문의 스파링을 했다.(한 번의 스파링을 하기위해, 나는 자전거의 페달이 부러지도록 쉴 새 없이 밟아야 한다.)
나의 스파링파트너는 초보자부터, 육상자위대 병사, 일본 신인왕, 동양챔피언, 세계 랭커(WBA플라이급 세계7위 '도모히로 기유나'-그는 전설적인 한국세계챔피언' 유 명우씨에게 도전했다가 박살났던 친구)까지 다양하다.(나는 재수생시절 동자동에 있었던 '원진 규철 체육관'에서 처음 복싱을 배웠다.)
잡거나 넘어뜨려 밟지도 않고, 오직 주먹 하나로 상대의 눈을 노려보고 상대의 눈을 읽으면서 주먹을 날린다. 정확한 각도와 타이밍이 안 맞으면 상대를 결코 맞힐 수 없고 맞힌다 해도 전혀 효과가 없다.
복싱은 동물적이고 본능적이며, 인간적이고 정직하며, 그리고 무식해 보이면서 또한 아주 과학적인 운동이다.
가장 인간적이고 솔직한 사각의 링으로 돌아오는 이 시간이 되어, 체육관에서 하루 종일 쉬지 않고 돌아가는 사이먼&가펑클(Simon& Garfunkel)의 '복서(Boxer)', 로키(Rocky)시리즈 주제곡 '아이 오브 타이거(Eye of Tiger)', '버닝 허트(Burning Heart)'등을 들으며 내 두 주먹에 붕대를 감고 있는 동안, 산란하던 내 마음은 아주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불교신자가 산속의 절을 찾아가 부처님 앞에서 참선을 하고 합장을 하듯, 서서히 나의 몸은 리듬을 타기 시작하고 스텝과 함께 잽, 그리고 원, 투가 연결된다.

호텔 일을 그만두고 '핑크'집과 술집들의 틈바구니에 있는 일식집을 전전하며 풍속업소의 건달들을 비롯, 야쿠자(Yakuza, 일본 '조폭')들과의 대결, 그리고 노상에서의 싸움이 계속된다.(나 또한 군 제대 후, 바로 건너왔기에 뵈는 게 없다.)
스기나미(杉並)구의 고우엔지(高円寺)와 '오기쿠보'의 일식집에서는, 손님으로 들어온 '친피라(야쿠자의 하급조직원)'들과 수차례에 걸친 대결로 결국 2대의 경찰차출동까지. 결국은 '스미요시 렌고우(住吉 連合)'의 지역담당 '오야붕(두목)'의 사죄까지 받는다.(세계에서 가장 큰 조직 중 하나로 가장 부유한 갱들 중 하나인 '야마구치'구미(山口 組)는 고베(神戶)에 본부를 두고, '야마구치'조(組)의 최대 라이벌은 작은 갱들의 연합체로 도쿄의 아카사카(赤坂)에 본부를 둔 '스미요시 카이'(住吉 會)혹은 '스미요시 렌고우(住吉 連合)'로서  제 2의 그룹이다.)
내가 2 년 반 동안 일식집에서 굴렀던 스기나미(杉並)구는 '스미요시 렌고우(住吉 連合)'의 사무실이 엄청 많고 많은 조직원들이 활개치고 다닌다. 일본의 총 인구 중 0.5%에 불과한 재일 한국인이지만 이 폭력단의 톱 보스들을 비롯해서 간부 등 많은 수의 한국계 단원들이 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더불어 내가 업무상 가던 많은 술집에서는 제2의 '조 용필'(실제로, 조 용필씨는 나의 고교선배- 서울의 '경동고교')로서 '한 노래'하며, 오색등불아래에서 찌릿 찌릿하고 꿈같은 시간을 갖기도 했다.(그 당시 나는 독보적인 '본토의 한국인'으로서, 내가 일하는 초밥 집에 배달이 올 때마다, 사장의 특별허가로 초밥을 주문한 '가라오케' 주점에 배달을 가서, 많은 손님 앞에서 최소 5곡 정도를 부르고(한국의 노래) 손님이 산 맥주를 마시고 어슬렁거리며 가게에 돌아오곤 했다. 주변 술집들의 사장을 비롯, 모든 남녀 종업원들이 우리가게 고객이었다.
조 용필씨는 일본에서의 한류(韓流)원조로서 가히, 메가톤급의 스타였다.(상당수의 일본인 '오빠부대'가 결성되었다.) '계 은숙'씨와 '김 연자'씨가 그의 뒤를 이었다. 내가 가라오케 주점에 갈 때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 '대전브루스', '내 마음 당신 곁으로'를 비롯한 많은 조 용필씨의 노래들과, 패티 김씨의 '이별', 남 진씨의 '가슴 아프게', 나 훈아씨의 '가지 마오',  라나에 로스포의 '사랑해'를 본토 '한국'의 가사로 수도 없이 불러재꼈다. 이 노래들은 당시,(지금 까지도) 많은 일본인들이 알고 있고, 한국을 대표하는 인기절정의 노래들이었다.
이 당시 나는 일식집의 홀에 있는 TV를 통해 일본인들이 정말 좋아하는 프로야구경기를 보며 일을 했는데, 지금 요미우리(讀賣)의 '하라(原)'감독이 요미우리 팀의 4번 홈런타자로 방방 뛰었고, 주니치(中日)팀의 오치아이(落日)감독 또한 '주니치'의 공포의 4번 타자였다.

시(市)마다 체육공원이 있다는 것은 나에겐 즐거운 일이다. 물론 초등학교를 자주 이용하지만 공원 안엔 화장실에 수도꼭지가 많아, 취사뿐 아니라 샤워와 빨래의 문제를 더 자유롭고 시원스럽게 해결한다.
1번국도상의 시마다(島田)시(市)근처에서 체육공원을 발견했다. 비가 내리는  텅 빈 공원에 홀로 앉아 내 마음은 빈 주스 병이 되고, 이내 나의 위마저 빈,......


지금 내가 향하고 있는 내 숙소는 다름 아닌 시부야(渋谷)區에 있는 요요기 공원(代々木 公園)이다. 항상 젊은이들로 바글거리는 '하라주쿠'의 역 뒤편으로 넓게 펼쳐진 요요기 공원주변에는,  주말에는 많은 신세대 음악밴드와 춤꾼들이 도로를 점령하고 그들만의 퍼포먼스를 연출하고, 그들 주위에는 그들의 팬클럽 멤버들과 많은 행인들이 크고 두터운 원을 만든다.

공원 안에, 화려한 도시의 불빛이 끊기는 지점에서부터 어김없이 '노숙자들을 위한 공간'이 나타난다.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그들은 이곳을 지키고 있다. 지붕이 있는 구조물 아래엔 어김없이 그들이 있다!
그들은 비록 '무숙자(無宿者)'로 노숙을 하고 있지만, 결코 '무정자(無情者)들은 아닌 듯하다.  '이방인 무숙자'를 위해 그들의 소중한 공간을 내 준다. 세 사나이 중, 한 명은 이미 곯아 떨어졌고, 다른 한 명은 세면도구를 가지고 가까이에 있는 화장실의 세면대로 향한다. 키가 큰 제 3의 사나이는 포도주를 마시고 있다.
그는 미소와 함께 환영의 인사를 건넨 후, 뭔가 부스럭대더니 그의 짐에서 플라스틱 컵을 하나 꺼내어 다짜고짜 나에게 포도주를 권한다. 나는 그것을 단숨에 들이킨다. 프랑스 정통와인이란다.
그는 35세로 야마나시 현(山梨 縣)출신이라 한다. 3년 전 내가 이곳에 왔을 때, 나와 노숙을 같이 했던 이는 군마 현(群馬 縣)출신으로, 잠을 잘 때 오토바이 헬멧을 쓰고 잤다. (그는 노숙 중 '악동'의 습격을 받아 다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는 나에게 식빵을 권했다.)
그는 전형적인 일본인답게 자신의 얘기를 더 이상 하지 않지만 아주 솔직하고 착한 성품의 사나이다. 이번엔, 양주(죠니 워커)를 나의 컵에 따르고는, 쿠바산 시거를 건네준다. 하나같이 '명품(!)'이다. 그는 매일 아침을 해결을 한 후, 시립도서관에 가서 책을 보며 낮 시간을 보내다가 도서관의 문이 닫히면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밤을 보낸다고 한다.
이른 아침 일어나, 출발준비를 서두른다. '무숙자' 제군들은 서둘러 하루를 시작할 필요가 없는 듯 꼼짝 않고 누워 있다. 고맙다는 얘기라도 하려고 그 젊은 친구를 깨우기도 전에 그가 먼저 일어나 나에게 잘 가라는 말과 함께 악수를 청한다. "あり-がとう(아리가또우,고마워)!"

도쿄에서부터 시모노세키까지, 1,040km의 여정은 나를 차분하게, 그리고 그 동안의 긴 세계 여정을 정리하게 한다. 3년 전에는 시모노세키에서 도쿄까지 달려 왔었는데, 이번에는 그때와 정 반대로 달리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도로는 정말 여유가 없다. 도로는 거의 완벽할 정도로 포장되어 있으나 갓길이 너무 좁고, 도로 안전시설이 너무 많고 완벽하게 만들어져 있어, 오히려 그 안전시설물들이 또 방해가 된다. 멍하니 달리다 보면 그 안전시설에 자전거가 걸려 '맨땅에 슬라이딩'하기 일쑤다. 또한 국도가 중간 중간 '블루라인'이라는 '바이패스(자동차전용의 우회로)'의 구간이 되면서 다시 국도로 갈아타기 위해서는 한참을 헤매야 한다. 이 '블루라인'은 갓길이 거의 없어 미친척하고 달려보기에는 목숨을 걸어야 할 판이다. 일본은 우리나라와 정반대로, 차가 좌측통행을 하기 때문에 처음엔 한참 얼떨떨해서 달린다.

밤늦은 시간임에도, 초중고, 중장년, 그리고 남녀노소 구분 없이 모두 대낮같이 환한 야간 라이트아래서 열심히 운동을 하고 있는 일본인들을 보면서, 또 한 번 새삼스럽게 놀란다. 그들은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운동을 하고 내일아침 일찍 일어나 학교와 직장을 향해 갈 것이다.
일본인들은 선천적으로 강골(强骨)로 태어나지 않았지만, 악착스럽고 부단한 노력이 그들을 강골로 만들고 일본을 세계 최장수국과 경제 강국으로 만들었으리라. 이들 가운데 제 2의 이치로, 마쓰자카, 마츠이가 자라고 있을 것이다.
체력은 국력이며, 강한 체력은 불굴의 노력에서 비롯된다.

일본의 도로는 조용해서 좋다. 경적은 거의 듣지 못한다.(그것을 한 번 누르기 위해 그들은 상당한 인내심을 발휘한다.) 일본의 그런 완벽에 가까운 고요와 깨끗함이 종종 사람들을 질식시킬 듯해도 그것은 분명 아주 좋은 것이다.
일본의 이런 좋은 분위기도 최근 들어선 많이 퇴색되어 가고 있는 듯, 도로를 달리다 보니, 일본은 지금 쓰레기와의 전쟁을 선포한 것 같다. 쓰레기 투기(投棄)의 의도를 꺾으려는 '일격필살(一擊必殺)'의 표어와 포스터가 투기현장 주변에 줄을 이어 서있다.

철저한 시민의식과 자존심을 가지고 있는 유럽의 많은 국가들의 도로변도 예외 없이, 창 밖으로 던져진 무수한 물병, 주스 병들과 쓰레기로 쌓여가고 있고, 일정간격을 두고 운전자의 긴급과 휴식을 위해 만들어진 주차용 공간의 나무 숲 뒤에는 단 한 곳의 예외도 없이 '인분'(人糞)과 뒤처리의 종이가 대지를 뒤 덮고 있었다. 운전자의 휴식을 위한 주차공간에 화장실은 전혀 없고, 있어도 자물쇠로 완전 봉쇄되어 있었다.

캐나다만큼은 주차공간에 간이변소를 확실하게 만들어 놓아 주차 공간 뒤의 숲 속의 어느 곳에서도 두려움도 없이 텐트를 치고 잘 수 있었다. 캐나다의 도로변은 아직도 자연 그대로였고(물론 적은 인구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끔 물병이나 주스 병, 한두 개 정도가 길가에서 목격되며 똑 다른 놀라움을 주기도 했다.
캐나다의 도로를 달리다 보면 쓰레기투기를 원천 봉쇄하려고 최하 500C$(캐나다달러)에서 최고 2,000C$의 벌금을 부과한다는 무시무시한 경고판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좋은 습관이란 원칙과 철저한 반복훈련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인간은 절대적으로 불완전하고 불확실한 존재이기에 원칙과 단련의 과정이 빠진, 그저 폼 나게 들리는'자율(自律)'이란 바람에 날아가는 담배연기처럼 공허하다.

'이와구니'(岩國)시(市)를 지나 신(新)'이와구니'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아주 맑은 강물이 흐르고 대나무 숲이 이어진다. 고요하고 아름다운 산길을 달리다보니 '구가쬬(玖珂 町)'의 산마을에서는 '마츠리'(祭り)-축제-가 막 시작된 듯하다.
산골마을의 축제답게 이름도 '산적(山賊) 마츠리(祭り)'! 신사(神社)옆에 있는 음식점건물 또한 아름답다.


오사카(大阪)로 가기 위해 오다하라(小田原)시에서 '하코네'(箱根)산을 넘는다. 온천지대를 관통하는 이 산길을 오르는 도중, 도로변의 곳곳은 끓어오르는 수증기로 앞이 안 보일 정도이다. 도로변에 늘어서있는 온천여관의 골목마다 종종걸음을 걷고 있는 온천 객들의 '게다(왜 나막신)'소리가 요란하다.
4시간여 자전거를 밀고 가파른 굽이굽이 길을 트레킹을 하고 나면 표고 '840m'의 표지판이 눈앞에 나타나고 살랑살랑 불어대는 바람 앞에 잠시 한 숨을 돌리고, 심호흡을 한 후에 20여분 간 굽이굽이 가파른 내리막길을 따라 아주 짜릿하고 숨 가쁜 활강(滑降)을 즐기게 된다.
관광객들과 온천 객들이 탄 많은 차량들이 이 산악도로를 달리고 있어 많은 차량들과 함께 좁고 가파른 2차선의 굽이 길을 내려가려면 짜릿한 맛 이외에 신(辛, 酸)맛도 봐야한다. 
중국의 티베트 접경지대에 있는 백망설산(해발5,030m)의 해발 4,000m의 도로를 넘으며 정말 환상적인 활강을 경험했지만 그 도로에는 차량이 별로 없었다. 또한 내가 우리나라를 자전거로 전국일주 했을 때 표고 1,000m의 한계령도 넘었지만 그곳도 차가 그렇게 많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은 지나가는 차량이 아주 많고 굽이굽이 길의 커브반경이 아주 짧고 급하다. 이런 길을 차와 함께, 때론 차보다도 빠른 속도로 활강을 하는 동안, 정말 오줌을 쌀 것만 같은 전율을 만끽한다.(차는 차대로, 나는 나대로 서로의 공간을 양보하지 않고 단지 일차선의 도로를 경쟁하듯 활강한다. 쌀 한 톨만큼의 오판(誤判)은 바로 나의 '깨 박살!')
내가 종종 느끼고 있는 사실이지만, '엑스터시 (Ecstasy)'는 항상 죽음과 가까운 곳에 있다.

1번 국도를 타고 달린다. '나고야'(名古屋)를 지나쳐서 '욧카이치'(四日市)市를 지난다. 나는 도로변에 있는 편의점에서 닭튀김 두 조각과 우유와 찹쌀떡을 사 가지고 나와 가게 앞의 콘크리트바닥에 앉아 그것들을 먹고 있다.
일본의 편의점이 우리나라의 그것과 다른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잡지와 만화를 위한 코너로 식품코너만큼 중요한 곳이다. 대부분의 손님들이 가게에 들어와 먼저 발길을 돌리는 곳이 이 코너로, 항상 많은 종류의 잡지와 만화가 비치되어 있다.
일본인들은 만화를 정말 사랑한다. 나이와 성별, 그리고 신분의 구분 없이 만화를 즐긴다. 전철 안에서도, 공원의 벤치에서도, 그리고 다방 안에서도 그들이 열중해서 읽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만화이다.
하지만 이 만화는 일본인들뿐만 아니라 세계인의 혼까지 빼고 있는 듯하다. 내가 지나온 유럽의 나라들뿐 아니고 이슬람국가에서도 방영되고 있던 많은 만화영화는 일본의 그것으로 현지어로 더빙을 했지만 일본어의 자막이 그대로 나오고 있었고 대부분의 컴퓨터게임도 일본어의 자막그대로였다.
이젠 '한류(韓流)'의 영향으로 이 잡지・만화의 코너에 수 종에 달하는 '한류'스타들의 잡지가 어느 편의점에 가거나 쉽게 눈에 띄게 되어 나의 마음이 흐뭇하다.

갑자기 썩을 대로 썩은 밴 한 대가 거칠게 내 앞에 와 서더니 서너 명의 땀과 먼지로 찌든 사나이들이 내린다. 모두 생고무바닥의 '쪽 발'의 작업화를 신고 있다. 건설현장에서 일을 하고 있는 친구들이다. 험상궂은 얼굴만큼이나 심한 '칸사이'(關西) 사투리와 함께 말이 거칠다.
"어디서 굴러 온 X 뼈다귀냐고?!" 그들은 다짜고짜, 솔직담백한 질문을 나에게 꽂는다.
짧지 않은 긴 문장의 나의 사연을 듣더니, 비로소 그들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고 숙연해지며 점잖은 친구들이 된다.
'한국인은 오랜 세월 동안 너희들이 아주 많이 멸시를 하고 학대를 한 민족이지만, 너희들에게 많은 두려움과 존경심을 느끼게 해준 민족 또한 한국인이 아닌가?!'
한국과 일본, 두 나라에 이어진 인연의 끈은 정말 질기고 질긴 것이 아니겠는가?!
잠시 후, 가게에서 나온 그들은 여러 개의 식료품이 든 자신들의 비닐봉지들 중에서 하나를 나에게 건네준다. 그 봉지 안을 들여다보니, 이것저것 많이 들어있다. 컵라면 2개, 빵 2개, 정어리 통조림 1개, 커피우유 1팩.
모두들 'かんばって!(간밧떼, 힘내라!)'를 외치고 손을 흔들며 사라진다.

도쿄에서 '오사카'(大阪)까지의 거리가 500km정도이다. 오사카는 도쿄와 시모노세키의 거의 정확히, 중간지점에 위치한다. 놀랍게도, 1km마다 거리 표지막대가 세워져 있다. 일본에서는 역전(驛傳)마라톤이 아주 중요한 스포츠 종목의 하나이기에 그것을 위해 이렇게 만들어 놓은 것으로 생각된다.

도로들 달리다 목격되는 수많은 한국음식점들. 80년대에도 이미 한국불고기집[야끼니꾸(燒肉)]들이 많이 있었다.(주로 조총련계가 많았다.) 지금은 한류의 영향인 듯 엄청난 숫자로 늘어 있다.


지나는 마을과 도시의 소방서마다 인근 공터에서 소방훈련이 한창이다. 곧 '불의 전쟁'이 발발할 것 같은 위기감을 느낀다. '지진 대국'의 나라, 일본에서 무시무시한 자연의 위협에도 결코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이 재난을 이기며 강국을 건설하고, 강국을 유지시키고 있는 비결이 바로 저거다! "평소에, 긴장하고 준비한다."('긴장'은 사람에게 독약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보약, 강장제이기도 하다.)
일본인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이 불이다. 일본 집들의 기본 틀은 모두 나무로, 목재는 지진에 강해서 휘며 춤추듯이 움직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블록집이나 벽돌집처럼 일순에 무너져 내리지 않는다. 나 자신 도쿄의 사글세 아파트에서 몇 번에 걸쳐 지진을 경험했다. 집이 휘청거리고 천정의 전등이 막무가내로 춤을 추지만 지진이 지나간 후, 모든 것은 정상이었다.
하지만 한 번 불이 나면 불은 순식간에 온 동네로 번진다. 일본에서 '불조심'의 표어는 어디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놀라운 것은, 오늘이 토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지나는 곳곳의 회사들이 일상과 다름없이 늦게까지 불을 켜 놓고 일을 하고 있고, 지방곳곳에 있는 많은 중소기업의 공장에서도 전혀 동요 없이 기계가 힘차게 돌아가고 있다.

도로변에서 자주 발견되는 스포츠 공원과 초등학교에서의 야영을 거듭하며 내나라, 한국에서 자전거 전국여행을 하고 있다는 착각 속에 그저 멍하니, 그리고 마음 편하게 달리다 보니 어느 덧, 나는 일본의 땅 끝 지점에 서있다.

6월 18일, 저녁 7시. 나를 태운 부관(釜關)페리는 힘차고, 긴 여운의 뱃고동을 울리며 결코 길지 않은 이별을 고한다. 나는 드디어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건너야 할 마지막 징검다리를 건너 버린 것이다. "잘 있거라, 일본! 또 올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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