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는 위대하다. - 이태리
에디터 : 이호선

끝없이 높낮이를 계속하며 이어지는 이태리의 해안도로는 피사(Pisa)를 지나고, 라 스페지아(La Spezia)를 지나면서, 본격적으로 경사도가 심해지며 제네바(Geneva)로 향한다. 산 하나를 넘어 마을 하나가 나온다.
많은 마을과 타운이 산꼭대기에 있다. 하지만, 길은 요리조리 잘 나있고 포장도 잘 돼있다. 지중해변을 따라 별장같이 크고 예쁜 집이 계속된다. 많은 사이클 리스트들이 줄을 잇는다.(유럽이 사이클에 강한 이유를 알 것 같다.)


그리스부터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한 가지는 북쪽의 불가리아를 뚫고 달려서 '아드리아해(海)'쪽으로 나가 아드리아해(海)를 끼고 달려 이태리로 넘어가는 길이고, 또 하나는 '에게해(海)'를 끼고 달려 '파트라'까지, 그리고 '파트라'에서 페리를 타고 에게해(海)를 건너 이태리의 장화 뒤꿈치 부분인 바리(Bari)로 가서 그곳에서 이태리를 횡단해서 나폴리로, 그리고 지중해를 끼고 달려 로마, 제네바, 그리고 프랑스, 스페인, 그리고 포르투갈로 가는 길이다. 1월 초순인 지금, 나는 조금이라도 남쪽으로 내려가는 것이 이 여행을 계속하기 위해 유리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스의 파트라항(港)(Patra)에서 페리를 타고 이태리의 장화 뒤꿈치 부분인 바리(Bari)에 도착한다. 국경을 넘었으나 그 누구도 나를 막지 않는다. 국경검문소, 여권검사, 짐 검사 등등의 단어들이 순식간에 사전에서 삭제되어버린 것이다. 유럽은 하나!

여기서부터 다시 자전거로 이태리를 횡단해 나폴리에 도착한다. 계속 비가 오락가락하는 가운데, 나는 좁은 이태리의 내륙을 횡단한다.
지방도로가 계속되고, 으르렁대는 '개(犬)사마'들의 대공 위협사격을 받아가며 굽이굽이 산길을 달린다. 겨울이기에 비어 있는 농가창고와 폐가를 숨 가쁘게 들락거리며 하늘의 심술에 맞선다. 오직 쥐들과 박쥐들만이 나를 반기지만 하늘의 뭇매를 피하기 위해 나는 필사적이다.

싼 모텔이 많이 있다는 로마시내, 피아자 빅토리오(Piazza Victorrio)의 차이나타운을 향해 달리던 중, 내 눈을 찌르는 한국어의 간판 '비원식당'. 몇 달 만에 보는 한국어와 한국식당이다. 밀고 들어가니, 손님은 단지 중년의 한국남자와 젊은 한국여자뿐. 이미 오후 4시다.
무엇을 청해도 음식이 나올 시간이 아니다. 여행사 사장님과 여행가이드인 여자 분은 정말 오랜만에 보는 '참 이슬'을 샀다. 나는 김치, 깍두기를 안주삼아 순식간에 '참 이슬' 두 병을 마셔버렸다.


빗속에서의 힘겨운 행진 끝에 도착한 나폴리는 쓰레기의 천국이 되어 악취와 불쾌함으로 나를 뜨겁게 환영한다. 2주 이상 계속된 청소국 직원들의 파업으로 세계 3대 미항의 하나인 나폴리는 세계의 추항(醜港)이 되었다.
일주일간 비는 줄기차게 내렸다. 천둥 번개를 동반한 무자비한 하늘의 폭거에 속수무책.
로마 입성의 그날도 비는 대지를 사정없이 두들겨 팼다.

로마시내를 달리다, 우연히 눈에 걸려든 한국식당(손님인 여행사 사장님이 산 2병의 '참 이슬'(한 병 20유료!!)을 깍두기와 김치를 안주로 순식간에 마시고 나는 비몽사몽. 어떻게 민박집에 자전거를 끌고 갔는지 기억이 안남.)의 소개로 중앙역(Termini) 앞에 있는 한국인의 민박집 "가고파(Gagopa)"에서 꼼짝 않고 먹고 잠만 잔다.

매일 바뀌는, 혈기왕성한 한국의 대학생 배낭 여행자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천편일률이다. '달러'보다도 강력한 '유로'를 써가며 그들이 지나가고, 보고 겪은 것은 너무도 흡사하다. 다만 움직인 순서만 조금 다를 뿐이다.
여행사나 여행정보지의 지침대로 로봇처럼 움직이고 있다. 호텔에서 자면서 여행하는 그들이건만, 웬 짐이 그리 많은지???

여행은 현실에서의 일탈이다. 인간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굴레와 짐을 지고, 짐에 치어서 살아간다. 그 끔찍한 짐들로부터 잠시나마 해방되려고, 자유스러워지려고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로마는, 중요유적지가 로마시내에 집중되어 있어 이곳저곳 먼 곳까지 찾아갈 필요가 없다. 옛날과 현재가 완벽하게 공존하는 로마시(市). 시내의 모든 곳이 유적지다. 역사를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로마시민은 축복받은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로마유적지의 큰 규모에 놀라울 뿐이다. 로마시대, 로마가 점령한 곳에서 끌려온 노예들에 의해 지어진 것이겠으나 그 시대에 이런 방대한 석조 건물들을 지은 로마제국의 영화를 한 눈에 느낄 수가 있다.


여행을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살아가면서 필요했던 거의 모든 품목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다 가지고 가려 하고, 여행 전에 완벽한 준비를 하려고 동분서주한다.
짐이 무거우면 몸은 지치고, 지친 몸의 여행은 결코 즐겁지 않을 뿐 아니라 이동이 쉽지 않기에 변칙의, 그리고 임의의 자유스런 여행이 불가능해지고, 그래서 항상 정해진 차량의 이동코스를 따라 움직이게 된다.
사전 지식 없이 간다고 해서 행선지를 못간 사람 없고, 먹을 것 못 먹어 굶어 죽은 사람 없고 길바닥에서 동사(凍死)한 사람 없잖아?! 똑같은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 궁하면 다 통하고 또 살 길이 생기지 않겠어! 비록, 잠시 애타고 고생스러운 시간을 견뎌야 할지 모르지만 진정한 인생경험, 진정한 인생 공부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배낭여행의 진정한 낱말풀이가 될 수 있겠지. 결국 여행은 없고 관광만 존재하는 것 같다.
많은 젊은이들이 아주 값진 젊음의 시간과 돈을 써가며 세계를 보고 세계를 경험하고 있다고 외쳐대고 있지만, 그들이 마치 70대 노인들처럼 보이고 느껴지는 것은 왜 일까?!

주인집 아주머니의 맛있는 음식과 따뜻한 마음은 오랜 여정으로 지친 나의 몸과 마음에 최고의 보양식이 된다. 나의 식욕은 무자비하다. 20대 대학생 배낭 족들이 대부분인 투숙객들의 똥그란 눈과 함박 벌어진 입들을 무시하고, 나는 초연하고 의연하게 밥과 반찬의 최후의 한 톨과 한 조각까지 싹쓸이를 하며 매 끼니를 전전한다.
나의 인생관은 이 여행을 시작한 후, 완전하게 바뀌어 버린 것이다.
"나는 오직 먹기 위해서 산다!!!"

로마시(市)에 있는 모든 민박집은 중국동포들이 한다. 오래전, 중국 마피아가 이곳에서 한국인 상대로 식당과 여관업을 시작했는데, 그들이 중국동포들을 데려와 일을 했고, 마피아가 이곳을 떠난 뒤엔 그곳에서 일 하던 중국동포들이 그 식당과 여관을 인수받아 영업을 하기 시작했다고 함. 한국음식에 굶주린 나를 비롯한 많은 한국의 여행객들을 위해 정말 따스한 마음으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대접한다. 민박집 '가고파'의 주인아주머니에게 다시 한번 고마운 마음을,......


민박집에 쳐 박혀, 그 동안 밀린 이-메일을 보내고 또한 내 어머니를 비롯한 많은 나라의 친구들에게 모두 12장의 엽서를 쓴다. 엽서는 그들을 위한 나의 선물이다. 요즘 세상에 엽서를 써 보내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쓸 때는 아주 귀찮고 시간 걸리는 일이지만, 받을 때는 정 반대로 몇 배의 기쁨이 된다. 지난 5개월 동안 나는 거의 2주에 한 번씩 엽서를 써서 보냈다. 내가 통과한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들은 결코 컴퓨터가 일반화되지 않은 나라들이었고, 비록 대도시를 통과하기도 했지만 인터넷 카페를 찾는 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다.

라디오에서는 미국의 팝뮤직을 선두로 '칸초네'와 '샹송(Chanson)' 그리고 라틴 뮤직이 흘러나온다. 어디를 가도 미국의 팝 뮤직이 세계를 주도하고 있다.

겨우 비가 그쳐, 나와 본 로마의 거리에서 나는 온몸으로 역사의 실체를 느끼고 있다. 로마제국을 느끼기 위해 특별히 원행(遠行)을 할 필요가 없는 것 같다. 그저 로마시내를 천천히 걸어 돌다보니 나는 어느덧 로마가 되어 있었다.
로마의 과거는 그대로 로마의 시내곳곳에서 현재가 되어 살아 움직이고 있다. 나는 여태껏 역사를 이렇게 리얼하게 느껴 본적이 없다. 역시 로마는 위대하다.

유럽은 소형차가 대세(大勢)다. 특히 이태리, 그리고 로마는 오토바이(主로 BMW)의 천국이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오토바이 출퇴근이다.

남부유럽의 겨울장마는 우리나라의 장마철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예측불허의 날씨가 계속된다. 끔찍한 것은 겨울의 장마이기에 정말 차다.
도로를 달리는 도중, 두터운 구름을 가르고 겨우 나온 햇빛에, 흠뻑 젖어있는 나의 살림살이를 말리는 일은 먹는 일만큼이나 심각한 일이다. 뽀송뽀송한 침낭을 느끼는 순간, 정말 행복함을 느낀다.


어느 덧 피사까지 왔다. 멀리 어둠 속 도로변에 버려진 듯한 집이 나의 눈을 확 잡아끈다. 드디어 걸렸어! 두 개의 집이 있다. 한 개는 완전히 지붕까지 폭삭한 건물이고, 또 한 건물은 지붕이 '쬐끔' 살아있다. 하지만, 그나마도 조그만 방 하나의 공간을 빼놓고는 완전 분쇄되어있다.
폐허의 방 속은 아주 퀴퀴하고 더럽지만 썩은 침대가 하나 놓여있고 그 위엔 빗물에 잔뜩 얼룩진 매트리스도 얌전하게 올려져 있다. 썩은 의자 한 개와 조그만 냉장고까지 있다. 냉장고 위를 레이스로 덮어 놓은 것을 보면 이 방의 현재 주인은 여자다! 냉장고가 있으나, 전기선이 제거된 상태로 냉장고의 기능은 없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공(空).
나는 호텔 급의 집을 발견 한 것엔 틀림없으나, 문제는 플라스틱 통 안에 들어있는 티슈조각들로 얼마 전에 버려진 듯 새롭고 향기도 여전히 나의 코를 찌른다. 수북이 쌓인 티슈들을 뒤집어보니 역시 신었다 벗어 버린 많은 '라텍스 장화(?)'들이 있다. 순간, 나는 여기에 오던 중 도로변의 어두운 가로수 아래에 간간히 서 있던 짙은 화장과 향수냄새의 여자들이 나의 머리를 친다. 그녀들이 고객들과 일을 치르는 곳이 바로 이곳?!!

해안을 따라 계속되는 오르막 내리막의 길이 프랑스령에 가까워오면서 더욱 숨 가쁘게 전개된다. 가파른 언덕 위에 줄을 잇는 마을을 보며 산이 많은 유럽을 실감한다.
피날리 리그라(Finale Ligura)를 지나서 임페리아(Imperia)로 가는 가파른 산길의 등반을 하던 중, 길 옆 작은 숲 속에 세워져 있는 ‘산레모 음악제(SanRemo Music Festival)’의 기념비를 만난다. 그 앞에는 조그만 공터가 있고 벤치가 있다. 절벽아래, 지중해의 해안선을 따라 펼쳐지는 도시의 불빛은 반짝이는 수많은 별빛들과 함께 환상적인 조화를 이루며 완벽한 그림을 만든다. 절벽에 서있는 소나무 밑에 텐트를 치고 앉아있으니, 아득히 먼 그곳에서부터 ‘고요’를 뚫고‘ 적막의 부르스(Il Silenzio)’가 나의 가슴을 찢는다.

숨 가쁜 언덕의 해안도로를 따라 수많은 자전거 라이더들이 달려간다. 헬멧을 벗어보니 대부분이 60, 70대의 은퇴노인들이다. 모두 몸들이 탱크다. 유럽의 노인들은 상당히 건강해 보인다.
끝없이 높낮이를 계속하며 이어지던 이태리의 해안도로는 어느 새 프랑스로 이어진다.

오랜만에 비가 그쳐 로마시내를 유유자적하며 로마를 만끽한다. 
민박집의 룸메이트인 28세의 임 성렬군(君)은 아주 조용한 성격에 곱상하게 생긴 친구다. 캐나다의 캘거리(Calgary)에 사는 교포로 프랑스요리의 요리사이다.
독일의 쾰른시(市)의 한 식당에서 프랑스요리사로 1년여 일을 하다가 다시 캐나다로 돌아가는 길에 로마관광차 온 것이다.


밤늦게 입성한 제네바(Geneva)는 대단히 큰 도시였다. 야영지를 찾기 위해 시(市)를 빠져나가려고 속력을 내나, 지친 몸에 너무 힘겨워 바람이 억척스레 불어대는 해변 가의 한 어린이놀이터에서 바람을 막아주는 삼각형의 구조물을 발견하고 하룻밤신세를 졌다.
새벽에 누군가 들여다보는 눈길을 감지, 벌떡 일어나 보니 산책길에 주인과 함께 나온 개(닥스훈트) 한 마리!


세계최소독립국이며 가톨릭의 총본산인 바티칸시국의 주 건물인 성 베드로 대 성당과 베드로광장 앞에서, 나는 비록 가톨릭신자는 아니지만 건물과 광장 그 자체로 감동이다. 많은 관광객들로 줄을 잇는다. 대성당에 들어가자 임 성렬군(君)은 정신없이 사진을 찍어댄다.(사진 찍는 것이 허용된다.) 그의 어머니가 독실한 가톨릭신자로 어머니에게 대성당의 모습을 자세히 보여드리고 싶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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