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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자전거의 역사
솔져블루 (hoho141)       2008-11-17 15:11:04       19192
자전거의 역사

인류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이동의 불편함을 보다 빠르고 편리하게 이동하기 위해 바퀴를 고안하게 되었으며,
이 바퀴를 이용하여 무거운 짐이나 사람을 적은 힘으로 쉽게 이동할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수많은 지식인들이 연구의 연구를 거듭하며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자력으로 보다 쉽게 보다 빠르게 달려보고 싶은 인간의 꿈을 실현시켜 준 것이 자전거를 개발하게 되었습니다. 자전거는 이러한 인간의 꿈을 실현 시켜준 편리한 기구이며 그 기원에 대해서도 자동차 보다 오랜 역사를 가지고 지금도 보다 더 나은 연구개발로 다양한 형태의 자전거가 개발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책의 하나로 발해국 시조 대조영의 아우인 대야발이 천통 31년(서기 729년)에 쓴 단기고사(단제조선과 기자조선에 관한 역사책)에 의하면 단제조선의 단군 제11세 도해 재위 56년(기원전 약 18세기)에 송화강변에 기계공장을 설치하였고 국내에 신기계를 현상공모하여 상을 주었다는 내용과 함께 상을 받은 발명품 중 "자행륜거<自行倫車>"가 들어 있다. 이것이 설계도면이나 실물은 없지만 문헌상의 기록에 의한 세계 최초의 자전거가 믿고 싶습니다.
그리고 프랑스의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1490년경 작성한 것으로 보여지는 원고 중에서 페달과 체인이 달려있고 오늘날의 자전거 구조와 비슷한 모양을 스케치한 것이 발견되었고, 1642년경에 건립된 영국 남부의 시골교회의 스테인드 그래스에 자전거를 타고 가는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렇듯 자전거 기원과 관련하여 문헌, 교회의 그림, 스케치 등이 발견되고 있으나 역사적 고증을 할 만한 정확한 자료나 실물이 없으며 독일, 프랑스, 영국 등 각국이 원조라고 할 만큼 정확한 자료와 실물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또한 어떤 형태의 것을 자전거로 볼 것인지 대한 견해도 틀려 연도별로 역사를 따져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다만 현재까지 발견된 여러 자료를 종합해볼 때 1790년 프랑스의 콩트 드 시브락(Conte de Sivrac)이 고안한 자전거는
두 개의 나무바퀴를 앞뒤로 연결하여 지면을 굴러다닐 수 있도록 만든 것을 자전거의 원조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두 바퀴를 이용하여 빨리 달릴 수 있다는 측면에서의 획기적인 발명품이었으나 방향을 바꾸는 조향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조향이 가능한 것으로는 1816년~1818년 사이 프랑스의 조셉 니에프스가 고안한 자전거를 원조라고 보기도 합니다.

1813년 독일의 귀족으로 당시 산림국장으로 있던 칼 폰 드라이스(Karl von Drais) 남작이 발명하고 1818년 프랑스에서 자전거로서는 처음으로 특허를 얻은 <드라이지네>를 세계최초의 자전거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입니다.
<드라이지네>는 같은 크기의 두 개의 나무바퀴를 앞뒤로 나란히 연결시겼으며, 안장 위에 앉아 두발로 땅을 차면서 앞으로 나갈 수 있도록 만들어 마치 달리는 목마와 같이 생겨 "Hobby Horse"라 불리웠다.
<드라이지네>는 당시에는 수작업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비싼 가격으로 거래되었으며 페달, 체인, 타이어 등이 없어 현대의 자전거와는 달랐지만 기록에 의하면 평지에서는 약 15km/hr정도까지 속도를 낼 수 있었다고 한다.

영국에서는 <드라이지네>가 발명된지 20년뒤인 1835년 맥밀란(Kirk Patrick Macmillian)이 자전거에 페달을 부착하여 발로 땅을 차지 않고서도 달릴 수 있게 하므로써 자전거 발전에 획기적인 계기가 되었다. 맥밀란식 자전거는 현대것과 같이 페달을 회전시켜 체인을 통하여 바퀴에 전달하는 것이 아니고 페달을 앞뒤로 저어 뒤바퀴를 움직이게하는 즉 직선운동을 회전운동으로 바뀌는 형식을 채택하였습니다. 맥밀란이 지면에 발을 대지 않고 탈 수 있도록 고안하여 현대식 자전거의 원조로 삼고 있습니다.

이후 현대와 같은 자전거의 원리는 1861년 프랑스의 피에리 미셔(Pierre Michaux)부자가 앞바퀴에 크랭크를 장착하고 페달을 부착, 페달의 회전하는 힘을 직접 앞바퀴에 전달하여 앞바퀴를 굴러가게 하는 전륜구동식의 미셔형 자전거를 개발하였습니다.
프랑스식 이름으로 벨로시페드(Velocipede)라 불리운 미셔형 자전거는 대량으로 생산되어 세계 여러 나라로 수출되었으며, 일부 귀족들이 놀이기구 정도로 이용되던 자전거가 일반서민들에게까지 보급되어, 편리한 이동수단 내지는 운반수단으로 사용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862년 독일에서는 이 원리를 모방하여 142대나 만들어 사용했다고 합니다.
자전거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자전거로 불리우는 <오디너리형 자전거>는 미셔형 자전거의 개량형으로 앞바퀴가 크고 뒤바퀴를 작게하여 앞바퀴가 돌아가는 길이만큼 빨라지게끔 만들어졌으며, 한창 유행할 당시에는 앞바퀴가 1m 60cm, 뒤바퀴가 50cm인 자전거도 등장하였습니다
<오디너리형 자전거>는 아직까지도 멋진 자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고급까페, 쇼윈도우 등에 장식용으로 진열되어 있는 것을 간혹 볼 수 있습니다.
그 뒤 안전하고 편안한 자전거 만들기를 위한 노력이 계속되었으며 1879년 영국의 로슨에 의해 <체인전도식 자전거>가 발명되었다. 이 자전거는 페달의 위치를 바꾸고 크랭크의 회전에너지를 체인을 통하여 기계적효율이 좋은 뒤 바퀴에 전달하는 방법을 시도하므로써 자전거는 물론 산업전반에 큰 영향을 주었다. 현재처럼 고무타이어가 부착되고 어느 정도의 안전성이 고려된 자전거가 등장한 것은 1880년대 후반의 일이다.
이와 같은 자전거의 형태는 1910년대에 이르러서야 오늘날과 같이 핸들, 페달 등 기본적인 구조를 갖추게 되었으며, 자전거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됨에 따라 기술 및 장비도 급진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자전거의 기능이 발전되고 용도가 매우 다양해져 아동용에서부터 생활형, 도로용, 경기용, 산악용, 레저용 등으로 분류의 다양성을 이루며 가공기술의 발달로 하이텐 스틸, 크로몰리, 알루미늄, 카본은 물론 티타늄, 메탈 메트릭스 등 소재부분에서 비약적으로 발전하였으며 또한 브레이크(Brake), 서스펜션포크(Suspension Fork), 기어(Derailleur), 바퀴(Wheel) 등 정밀하고 다양한 기능을 가져 가격면에서 불과 몇만원대에서 몇백만원은 물론 수천만원대의 고급형 자전거들이 생산되고 있으며 지속적인 연구개발로 상상속의 자전거가 나올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산악자전거의 유래
산악자전거를 최초로 고안해낸 사람은 1970년대 미국의 도로 사이클 선수인 개리 피셔 (Gary Fisher)가 일반 사이클에
모터사이클용 바퀴와 자동차 쿠션 등을 달고 산에서 탄 것에서 유래합니다.
산악자전거를 고안한 해는 1975년 정도이며 실제 대중 앞에 선보인해는 1981년 뉴욕 자전거 전시회에서 발표되었습니다.
산악자전거가 처음 등장했을 때 ‘이렇게 둔하게 생긴 자전거가 어떻게 인기를 끌수 있을까’ 하며 생각했던 사람들이
자저거 전시회에 온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대중들의 비아냥을 뒤로 한 채 연구개발되어 불과 몇 년후 1980년대 중반부터 인기를 끌기 시작해 빠른 속도로
보급되었고 기술및 장비의 급진적인 발전으로 충격완화장치인 서스펜션, 차량이나 오토바이등에서 사용되는 디스크 브레이크 시스템을 개발하여 사용되고 있습니다.

한국에는 1980년대 초 도입되었습니다. 1996년 미국 애틀랜타 하계올림픽부터 공식 종목으로 채택되어, 60km급 크로스컨트리 경기에 남녀 각 1개씩의 금메달이 걸려 있다. 산악능선을 질주하기 위해 바퀴의 지름이 20∼27인치로 도로용 사이클보다 작고, 두께는 도로용보다 1.5∼2.5배 두꺼워 모터크로스(오토바이형) 자전거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경사진 길을 쉽게 오르내르기 위해 바퀴에 12∼30단 배율의 기어가 달려 있고, 쿠션장치와 제동장치가 특수 설계되어 있습니다.

대회 종목은 산악능선을 종주하는 20∼100km 크로스컨트리와, 힐클라이밍(언덕오르기), 다운힐(언덕내려가기), 스키의 대회전에 해당하는 듀얼슬라럼, 스키의 점핑에 해당하는 트라이얼 경기 등이 있다. 프로가 활성화된 유럽과 미국, 일본 등에서는 MTB월드컵을 비롯해 각종 오픈대회를 치르며, 한국에는 동호인 단체인 전국 MTB연합회와 대한MTB·BMX연맹이 각종 전국·국제 대회를 유치하고 있다.
2000년 이후 연맹과 협회로 2원화 된 체재에서 각종 대회를 후원하며 자전거 생산업체 회사별로 각종 대회가 매년 열리고 있으며 지방자치단체장의 관심으로 대회가 개최 되는 곳도 많습니다.
2002년 부산 아시안 게임 다운힐 부분에서 정 형래 선수가 금메달을 정 종문 선수가 4위를 하는 기염을 토하며 아시아에서 이젠 선진국인 일본과도 어깨를 견줄 수 있을 만큼 우수선수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자전거의 유래
우리 나라에서 자전거가 처음으로 들어온 것은 대략 개화기였을 것으로 추측되며, 예조시랑 고희성(高羲誠)이 1896년에 장안 거리를 자전거를 타고 다닌 것이 처음이라고도 하며 같은 해 서재필 박사가 독립문 신축헌장에 갈 때 처음으로 탔다고 전해지기도 합니다. 약 2년이 지난 1898년에 윤치호(尹致昊)가 하와이에서 통타이어를 사용한 자전거를 들여왔느데 엉성하였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꽤 인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이후 차츰 한, 두 대씩 자전거를 들어오게 되었는데, 1903년 가을에는 조정의 관리들을 위해 1백대의 자전거를 도입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경술국치년인 1910년 한일한방이후 일본인들에 의해 자전거가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하여 1930년대까지 다소 많은 양의 자저거가 들어와 중산층이상의 교통수단으로, 상인들의 운반수단으로 보급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자전거가 늘고 그 용도도 교통 수단 또는 운반 수단으로 사용하던 자전거에서 오늘날 여가 선용을 위한 레저 및 스포츠용 도구 사용되어지게 되며, 우리나라에서도 수리용 부품생산 위주에서 1950년대 후반에는 본격적인 자전거 생산시대에 이르게 된다. 1994년도에는 118만여대에 이르는 자전거 주요 생산국으로 도약하게 되었지만 1997년 IMF의 진통을 겪으며
생산회사들의 자구책으로 인해 중국으로 생산공장을 이주하거나 제품단가의 하향과 경쟁력 확보를 위해 중국 OEM 으로 생산하여 2000년 이후 국내 제품생산이 사실상 중단되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보다 나은 제품의 성능을 위해 계속된 연구개발과 대만등 해외제품에만 의존하는 고급형 전문 산악자전거의 생산을 위해서라도 신기술을 도입하고 더 나은 제품을 연구 개발 기술력 키우고 또한 경쟁력이 있는 회사가 다시 우리나라에서 나오길 기원합니다.



우리나라의 자전거 경주 역사
우리 나라에서 자전거 경주가 처음 있었던 것은 1906년의 일입니다.
자전거 경주를 처음으로 시도한 사람은 권원식과 일본인 오사카와 였습니다.
서울 운동장 앞 훈련원에서 처음으로 시도된 이 자전거 경주는 사람들에게 한낱 곡예로 밖에 인식되지 않았습니다.
그 후에도 가끔 경주가 있었는데, 자전거를 탈줄 만 알면 출전 자격을 주었으니 그런 경주야말로 진풍경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1913년 4월 용산 연병장에서 대규모의 자전거 경주대회가 개최되었습니다. 일본인 자전거 상인들과 친일계 상인들이 주최한 대회였지만, 많은 관중이 모였고 그 후로 자전거 경주가 볼 만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습니다.

엄 복동 선수는 1920년 ‘경성시민 운동대회’ 자전거 경주에서 우승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의 자전거 선수는 대부분 자전거 매장 직원들이었습니다.
엄 복동 선수도 평택출신으로 평택-서울 간을 다니며 자전거 행상을 했습니다.

후일 ‘엄복동이냐, 조수만이냐’하는 노래까지 유행하였는데, 이 조수만 선수는 이류 선수권에서 2등으로 입상한 사람이다. 당시에는 자전거 선수를 일류, 이류, 삼류로 구분하여 등급을 정하였다. 한편 조수만 선수는 청파동에서 자전거 매장을
운영하며, 은퇴 후 후배 양성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어떤 대회에서는 일본인 심판들의 부당한 판정으로 큰 불상사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일본인 선수를 제치고 엄 복동 선수가 독주하게 되자, 일본인 심판들은 엄 복동 선수에게 우승을 주지 않기 위해서
일몰을 구실로 경주를 중단시켰던 것이다. 이에 불만을 품은 엄 복동 선수는 격분한 나머지 우승기를 꺾어 버렸다.
칼자루를 쥔 일본인들은 엄 복동 선수에게 몰매까지 가하여 한때 관중의 항거에 부딪치기도 했습니다.
그 때 최고의 우승자에게는 우승기와 양복, 금메달을 수여하기로 되어있었습니다.

그 후 엄 복동 선수는 ‘조일 일류 선수권 대회’, ‘조선 일류 선두 책임 경주 대회’ ‘일류 20바퀴 경주’등에서
연승함으로써 그를 추종할 선수가 없었다. 그것은 자전거 경주를 통해 조선 남아가 일본인을 압도한
쾌거였던 것 입니다.

엄 복동은 자전거 선수로서 어린 아이들도 잘 알고 있는 영웅적이 존재였다고 합니다.
이런 일이 있는 뒤부터 지방대회가 성행하였고 엄 복동 선수가 그 대회에 출전한다는 소문만 들어도 관중이 모여들 정도로 인기가 높았습니다. 엄 복동 선수의 인기는 그가 48세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즉 1932년 4월20일에 열린
‘전조선 남녀 자전거 대회’(서울 개최) 1만 미터 경주에서 당당히 우승을 차지하자, 당시 신문들은
‘비장 엄복동 선수 노익장’이라며 대서 특필하였던 것이다. 그 후 엄복동 선수 외에도 괄목할 만한
성적을 거둔 훌륭한 선수들이 많았습니다.

한편 해방이 된 1946년에 자전거 경기 연맹이 부활 발족되었습니다. 대한 자전거 연맹을 1948년에 국제 자전거 경기연맹에 가입 신청, 1949년에 정식으로 승인을 얻고 국제회원이 되었습니다.

그 후 국제 대회에도 참가하게 되었는데, 1948년 8월 14일에 영국 런던에서 개최된 ‘14회 세계올림픽대회’에 사상 처음으로 자전거 선수를 파견했으며, 1982년 7월에 이탈리아에서 거행된 ‘세계 자전거 주니어
선수권 대회’에서는 조건행 선수가 동메달을 획득하기도 했습니다.
근래들어서는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다운힐 부분에서 정형래 선수가 금메달, 정종문 선수가 4위를 기록하는 등 명실상부 이젠 아시아의 탑클래스에 들어가는 시대를 맞이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나라의 자전거 경주는 해방이후에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자전거는 원래
경주보다는 일상생활에 더 가깝기 때문에 오늘에 이르러서 레저 및 취미생활 등의 목적으로 자전거의 생활화에 대한
인식이 더욱 높아져 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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