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에 점령된 아시아 최빈국 네팔
에디터 : 이호선
홍콩을 방문하면서 3개월짜리 중국비자가 공중분해 되어 날아가고 홍콩에서 재 발급받은 '오직 한 달'의 비자를 받고, 비자일정에 쫓기며 숨 가쁜 주행과 히말라야 산속에서의 길을 잃고 헤맨 끝에 간신히 히말라야를 넘어-결국 비자만료일을 하루 넘겨 국경을 넘었다.
티베트, 장무의 중국인국경관리는 "하루 지체는 용서한다!"며 "You just go!(그냥 가세요!)"를 외친다. -아시아 최빈국인 네팔로 달린다.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를 지나면 도로변 곳곳에서 이런 빈민가의 초가집이 줄을 잇는다.
풍요의 그린(green)은 이곳, 네팔에서는 그 의미를 잃는다.

네팔 국민의 대부분은 숲 속에 널려있는 나무와 나뭇가지를 주워 난방과 취사문제를 해결한다. 모든 식당들조차 나무 화로에서 요리를 한다.
이들은 지게라는 최소한의 도구조차 없이 그저 땔감들을 끈으로 묶고 띠를 맨 후, 등에 지고 그 띠를 머리에 걸어 버티면서 운반한다.

국경에서 네팔로 가는 길 또한 결코 만만치 않은 완전 비포장의 산길의 내리막이다. 접경지대에는 수많은 양국의 상인들로 걸을 수가 없을 정도이다. 줄지어 서있는 가게마다 물건들로 가득한데 거의 모두가 중국산(産) 상품이다. 아시아 최빈국, 네팔인들에겐 꿈같은 물건들이다.
다리를 넘자 큰 철문과 함께 네팔국경 검문소가 나를 맞는다. 국경에서 수도, 카트만두까지 120km! 차선도 없는 내리막길이 계속되나 아스팔트길이라 달리기엔 좋다. 곳곳에 비포장도로와 물에 무너져버린 도로를 뚫고 달린다.

히말라야를 경계로 티베트와 네팔의 풍경은 극단적으로 변한다. 건조하고 녹색이라고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메마른 티베트에 비해 네팔의 풍경은 티베트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생명의 색, 녹색이다. 녹색의 숲과 지천으로 흐르는 물, 생명의 땅인 것이다.
하지만 빈곤에 관해선 두 나라는 완벽하게 일치한다.
네팔의 시골엔 전기가 없어 해가 짐과 동시에 두껍고 무거운 어둠으로 뒤덮인다. 오직 호롱불하나, 촛불 하나로 삶을 이어간다. 식당조차 촛불 한 개로 태연하게 요리하고 먹고 마신다.
하늘엔 별이 가득하지만 티베트의 하늘에서 흐르고 있던 그 은하수는 네팔의 하늘엔 없다. 기온이 티베트보다 상당히 높고, 이곳의 습한 공기가 결국 시야를 방해하는 듯하다.

네팔인의 주요 이동 수단인 버스가 자주 다니지만 항상 미여 터질 지경이다. 버스의 지붕에도 항상 많은 사람들이 타고 있다. 버스 지붕 위에 앉아있는 이들의 승차요금이 버스 안의 승객들의 그것의 반값이라지만 지붕 위의 승차는 정말 위험한 게임(!)
커브와 경사길이 많은 산속의 도로를 달릴 동안 지붕 위의 그들은 치열한 서바이벌 게임을 벌어야 한다. 비가 오면 그대로 맞고 간다.
트럭과 버스의 운전사들은 경적을 무차별로 눌러댈 뿐 아니라, 그것을 즐기듯이 박자와 리듬에 맞추어 울려댄다.  많은 이들이 도보로 몇 십리씩 걸어 다니기 일쑤이다.

가게에는, 물건은 별로 없고 먹을 거리도 아주 단순하다. 그저 라면이나 조잡한 비스킷이 고작이고 식당의 주요 메뉴는 인스턴트라면에 콩을 이용한 요리나 질긴 버펄로의 고기 정도이다.
화폐가치는 중국의 10분의 1정도임에도 불구하고 물건값은 중국에 비해 결코 싸지 않다.

도로변엔, 할일 없이 멍하니 앉아 있는 많은 혈기왕성한 네팔의 젊은이들이 목격된다. 그들 또한 모이기만 하면 도박이다. 이곳에선 거의 여자들이 모든 일을 한다. 남자들은 노소 없이 겉돈다. 여자들은 꼴 베기, 벼 베기, 그리고 가축 떼까지 몰고 다닌다.
빈곤은 죄가 아니지만 빈곤을 만드는 게으름은 죄다. 또한 국민들을 겉돌게 하고 게으르게 만드는 정부의 무능은 제일로 큰 죄다. 겉도는 정부, 겉도는 국민!

중국 9개 성(省)을 지나며 각 성의 맥주를 마시는 것이 하루 최고의 희망이며 기쁨이었다.
덕분에 매일 밤 음주운전을 하며 어둠을 달렸다.
마신 맥주의 레이블을 종류대로 간직해서 가져왔다.


재미있는 광경이(!) 많은 남자들이 남자들끼리 팔짱을 끼고 손을 잡고 다니는 데, 여자들은 결코 그런 광경을 연출하고 있지 않다(?!).
한 식당에 들어가 화장실을 물으니 뒤를 가리킨다. 뒤에 가니 온통 쓰레기더미이다. 적당히 해치우라는 얘기다. 아무리 시골의 식당이라 한들 화장실이 없다니?! 그들은 너무도 아름다운 곳, 히말라야의 산기슭에서 살다 보니 환경의 중요성을 잊을 만도 하리라.(티베트에서 히말라야를 넘어 네팔로 오던 중 히말라야의 산속에선 수 없이 유실된 좁은 산길을 보수하기 위한 공사가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데 수많은 인부가 몇 달 동안 사용하는 화장실은 다름 아닌 그저 푸대로 가려진 네 기둥 구조물! 히말라야의 계곡물 위로 인분이 그대로 여과 없이 떨어져 흘러 내려간다.)

50대 초반의 부부가 하는 한 식당에서 인스턴트 라면에 삶은 계란 두 개를 시킨다. 이곳의 라면은 우리 것에 비해 작고, 면발이 가늘며 스프 맛이 밍밍하다.
장래 여자우주비행사가 꿈인 중학생 딸, '모니카'와 고등학교 졸업반인 아들, '애쉬옥'은 영재 중학교와 영재 고등학교를 다니며, 방과 후엔 식당에서 그들의 부모를 돕는다. 그들 모두는 나를 기절시킬 정도로 유창한 영어를 구사한다. 학교에서 영어를 철저히 교육시키고 있는 듯한데, 그들의 영어회화 실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아들 '애쉬옥'은 네팔의 빈곤과 네팔정부의 부패와 무능에 대해 거품을 흘리며 토로한다. 그는 네팔은 변화가 아닌 혁명이 필요하다며 분개한다.
네팔엔 어떤 산업도, 상품도 없다. 히말라야 산속의 많은 천연 자원마저 모두 외국의 회사에게 소유권이 넘어가 있다고 한다. 유일한 자원이 관광자원이고, 외국어는 거의 생존수단인 셈이다. 미래가 전혀 없는 그들의 조국, 네팔에 절망하는 수많은 젊은이들은 필사적으로 그들의 나라를 탈출하려 한다. 외국인 관광객을 만나면 어떻게든 인연을 만들고 엮어 조국탈출의 기회를 만들려 한다.

카트만두에 들어서자 수많은 오토바이가 좁은 이 차선 도로를 꽉 메우고 달리고 있어, 도저히 자전거를 달릴 수가 없고, 수많은 소형 삼륜 버스까지 끼어들며 길을 막는다. 자전거를 달리다 갑자기 서면 어김없이 뒤따르던 오토바이가 내 자전거의 뒷바퀴를 친다.
시(市)외곽에 있는 한 여관 앞에서 자전거를 세운다. 여관 요금이 하룻밤 200루피로, 중국보다 오히려 이곳이 비싸다.

한 식당에 가보니 우리의 막걸리와 똑같은 '찬(Chan)'이라는 술이 있다. 한 주전자(보통 컵 3잔)에 10루피이고, '초일라(Zhoila)'라고 불리는 단단하고 질긴 버펄로 고기 열점에 10루피, '짜오멘(Zhaomen)'이라 불리는 '야키 소바'가 40루피이다. 티베트와 정반대로 풍요로운 녹색의 땅인 네팔이지만 먹을 것은 티베트만큼이나 없다.
여관에 돌아오니 여관 주인이 나에게 보드카를 권한다. 그는 나와 함께 히말라야의 물을 한국에 수출하자며 끈질기게 나를 종용한다. 나는 '찬'과 보드카(Vodka)에 정신을 잃고 곧 꿈의 나라로 나가 떨어졌다.

네팔은 동물의 왕국이다. 곳곳에 야생 동물공원(사파리 공원)이 있다.
특히 사방에서 떼로 몰려다니는 야생원숭이는 사납고 위협적이다.
숲 속에서 야영할 때 그들이 제일 무서웠다.

카트만두는 완전히 UN에 점령당한 듯, 유엔 산하에 있는 많은 부서들의 오피스건물과 외국공관관저들이 줄을 잇는다. 이들 건물 주위엔 바리게이트와 포대를 쌓고 수많은 무장군인들이 경비를 서고 있다. 카트만두의 전 시가는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거리의 모든 상가의 간판은 영어이고 많은 외국 계 은행과 사무실도 보인다. 많은 외국인 관광객들과 유엔, 대사관직원들과 그들의 가족들로 서양의 한 도시를 방불케 한다.
불행하게도, 이곳에 살고 있는 이 땅 주인인 네팔주민들의 삶이란 정말 보잘것없고 한심하다.

다운타운인 타멜(Thamel)은 히말라야 등반을 위한 전초기지로 등산장비점(店), 여행사, 호텔, 그리고 식당들이 몰려 있다. 이곳에선 정해진 물건값이 없다. 잘 흥정하면 아주 싼 값에, 잘못하면 큰 바가지를 쓴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나는 타멜에 있는 인도영사관에서 비자신청을 한다.(5일이나 걸린다.)

조그만 구멍가게들만이 간간히 문을 열 뿐, 모든 상점들이 문을 닫고 있다. 2주(!)나 계속되는 페스티벌로 모든 업무가 올 스톱(!) 무슨 축제가 이렇게 길까? 없는 나라가 오래도 논다.
이마에 붉은 칠을 하고 차량을 비롯해 건물, 건물 앞 길거리, 여기저기 붉은 액체에 물든 노란 꽃과 음식물들이 지저분하고, 기분 나쁘게 뿌려져 있다. 마치 우리나라의 성황당 근처에서 보았던 그 꺼림직한 분위기와 비슷하다. 힌두교의 의식이라고 하나 우리나라 무당들의 그것과 다를 것이 없다.

인도비자를 찾자마자, 나는 가까운 파키스탄 영사관을 향한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사이가 별로 안 좋아 인도에서 파키스탄 비자를 받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에 카트만두에 있는 파키스탄 영사관에 가서 파키스탄 비자를 미리 받아놓을 참이다.
비자신청을 위해 한국 영사관의 추천서가 필요하단다. 버스로 약 20분 정도 떨어진 한국영사관의 문이 잠겨있다. 축제기간이라 휴무라고 하지만 게시판에 적혀있는 비상 연락 전화번호로 영사에게 전화를 하자, 그는 고맙게도 나를 위해 출근해 추천서를 써 준다.
추천서 덕에 별 문제 없이 비자문제를 해결하고 카트만두를 떠난다. 수많은 유엔(UN) 산하 빌딩들로 점령당한 수도, 카트만두 시내를 벗어나자마자 다시 암흑의 세상으로(!)
다시 시작되는 빈곤과 암흑의 땅, 네팔의 도로를 UN의 흰색 도요타 4륜차량은 위풍 당당, 그리고 무자비한 속도로 달린다. 아직도 미류 나무에선 매미가 울고 있고 계단식 논에는 누렇게 익기는 했지만, 아직 추수를 하지 않은 벼들이 보인다.

이 나라엔 보통사람들보다 군인과 경찰이 더욱 많아 보인다. 마을엔 수많은 지역 경찰들이, 그리고 도로변의 곳곳에는 군인부대와 초소들이 보이며 가는 곳마다 검문소다.
이곳에서 어깨에 힘주고 다니는 사람들은 그들뿐이다.

네팔에는 그들의 물건이 없다. 있어봐야 몇 가지 안 되는 조잡한 먹거리뿐으로 상점의 물건들 대부분은 중국과 인도에서 수입한 것들이다. 그나마 카트만두만 벗어나면 정말 없다.

드디어 부트왈(Butwal)과 맞부딪치며 길은 둘로 갈라진다. 인도와의 국경을 따라 계속 달리면 네팔의 국경을 넘어 곧바로 인도의 델리로 연결되고, 또 하나의 길은 바로 석가모니의 탄생지, 룸비니(Lumbini)를 지나 인도의 국경을 넘어 인도의 북동부로 연결된다. 나는 정글 속의 도로를 따라 그대로 달려 바로 델리로 연결되는 길을 택한다. 아직 네팔의 '루피'가 많이 남아있다.
시골의 마을 곳곳에선 생우유를 판다. 모든 사람들은 함석으로 만든 밀크 통을 들고 가게로 향한다. 1리터에 20루피인데 냉장고가 전혀 없는 이곳이기에 오전 중에 다 팔린다. 네팔인들은 하루 종일 수도 없이 '밀크 티'(밀크를 넣은 홍차)를 마시기에 우유는 네팔인들 모두에게 대단히 중요한 품목이다.
이들은 우유의 변질을 막기 위해 수도 없이 끓여 댄다. 밀크티를 끓여 팔고 있는 식당의 아궁이 옆에는 반드시 밀크가 들어 있는 냄비와 티를 끓이는 '양은' 용기가 있는데 한결같이 새까맣다. 수십 수백의 파리가 그 용기를 뒤덮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결국, 내 위의 저항력결핍으로 복통을 일으켜 일주일간 죽음 같은 설사를 계속했다.)

네팔은 중국과 티베트에 비해, 비록 똑같이 지저분하고 불결해도 자기 몸 씻는 것하고 깨끗한 화장실 문화는 '발군'이다. 화장실만큼은 깨끗하게 물로 씻어 내릴 수 있는 타일의 흰색변기가 설치돼있다. 네팔사람들은 주로 해가 있는 낮에 물이 흐르는 도로변에서 남녀노소 불문하고 목욕을 한다. 여자들도 거리낌 없이, 비록 주요부분은 옷을 입고 있지만, 목욕을 한다. 그래서 이곳의 사람들은 비교적 깨끗해 보인다.

길가에서 학교에 가고 있는 많은 아이들을 보는데, 그들 모두는 가방이 없어 책을 손에 들고 간다. 두 손만으로는 주체하기가 벅찬 듯 책을 가지고 어쩔 줄을 모르며 걸어간다.
재미있는 사실이 있다. 도로를 달리다 보면 많은 아이들이 도로변에서 손을 흔들며 소리친다. 티베트의 아이들은 "헬로!"일색이고 네팔의 아이들은 "빠이 빠이!"일색이다. 나는 그 이유를 전혀 알 길이 없다.

나는 바르디야 국립공원(Bardiya national Park) 전 1km지점에서, 도로에서 100여m 안쪽에 있는 드문드문 큰 나무가 있는 넓은 초지에 텐트를 치려 하는데 플래시 불빛이 나를 향한다.
바르디야 국립공원의 4명의 사파리 가이드들이다. 이곳은 동물들이 많아 야영을 하는 것이 위험하단다. 가끔씩 코끼리 떼들이 질주하기도 한다고. 아주 가깝게 코끼리를 비롯해 많은 다른 동물들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이곳엔 호랑이들도 있다고 한다.
그 가이드들은 여태껏 위험한 초지(草地) 위에서 야영하려 했던 여행객들 중 많은 일본인들을 기억하며 한국인으로선 내가 처음이라고 한다.
나는 마을에 있는 그들의 숙소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새벽 한 시경 무언가 큰 동물이 질주하는 소리가 들리고 근처의 검문소에 있는 군인들의 고함소리와 함께 한 발의 총성이 허공을 뚫는다. 분명 울타리를 넘은 코끼리일 것이다.

나는 수많은 야생 원숭이들의 삶터에서 그들과 함께 밤을 보내며 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무겁디무거운 어둠의 커튼을 들치며 네팔의 도로를 맹렬히 달려 인도로 향한다. 국경, 고다 쵸키(Gadda Chauki)를 지나, 1km정도 떨어진 곳에 인도 측 국경검문소가 있다. 긴 철제다리가 이 두 나라의 경계를 이루며 걸려있다.

인도의 국경과 면하며 네팔을 횡단하는 하이웨이(고속도로, 국도, 지방도로를 겸함)를 타고 달린다. 네팔의 도로표지판은 모두 이처럼 돌비석이다.


힌두계 네팔 여고생 세명이 학교 가는 길에 "Uncle(아저씨)!"를 연발하며 끈질기게 나를 쫓아온다. 학교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학교주소와 이름을 써주며 꼭 사진을 보내달라며 재롱을 떤다. (오른쪽 아가씨는 유부녀임)


우리의 기업 전사들은 종횡무진 세계를 누빈다.
곳곳에서 보는 '강한 한국'은 고독한 여행자인 나에게 천군만마의 원병이 된다.

네팔의 국경 가까이를 달리는 중, 비록 화끈하고 볼륨있는 한국의 라면은 아니지만, 네팔인들의 자랑이며 주식(主食)이다시피한 부드럽고 가느다란 면발의 밍밍한 라면으로 나의 간절한 속을 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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