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금과 이영애, 한국을 좋아하는 나라, 이란
에디터 : 이호선

야즈드(Yazd)가기 전, 라프산잔(Rafsanjan)시 입구에서 나를 환영하는 이란의 사나이, 모쉬테라(Moshitera)!
그는 대만제자전거,’자이언트(Giant)‘를 타고, 미국의 사이클 영웅, '랜스 암스트롱(Lance Armstrong)'처럼 노란 사이클 셔츠를 입고 있으며, 검은 썬 그라스를 낀 채 그가 휴대한 휴대폰의 음악을 틀어, 나에게 들려주며 시내를 함께 달린다. 그가 들려준 노래는 로라 브래니건(Laura Branigan)의 노래들이다. 달리는 도중, 나에게 미친척하며 위협주행(走行)을 한 이란인운전수를 향해 주먹을 호호 불더니, 엄중한 옐로카드를 펼쳐 보인다.


파키스탄의 국경을 넘고 이란의 땅에 들어섰을 때, 나는 브라질의 상 파울로 출신의 자전거여행자 아더(Arthur)를 만난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는 그였으나 나에게 담배를 청한다. 나 또한 담배를 끊은 지가 10년 가까이 되지만 이 여행을 하고부터 가끔 한두 대 정도 피웠던 담배를 파키스탄을 지나는 동안엔 수도 없이 피워댔다. 정말로 '뻑뻑' 소리를 내며 담배를 피워대면서 그는 외친다.
"나는 살았다!" 나 또한 담배를 피워가며, "나도 역시 살았어! 우리는 분명히 살아있어!"를 외친다. 우리는 우리의 무사한 생존에 하늘에 감사하고 우리를 아는 모두에게 감사했다. 우리는 죽지도 않고 털리지도 않고 무사히 숨 막히는 파키스탄에서 살아 나왔다. 그는 어떤 도적들도 만나지 않은 듯하다.(그는 우회하는 고속도로만 달림.)

테헤란의 한 복판인 아자디 스퀘어(Azadi Sq.)바로 옆에는 간이 싸구려 책방이 있다. 내가 공원에서 하루 밤을 지새고 나와 만난, 그는(알리, Ali)-전직 레슬러- 아주 착하다.
우리는 잘 통하지 않는 영어로 어려운 대화를 이어가지만, 금방 오랜 친구처럼 친해진다. 그는 29 세로 크지 않은 키에 배는 나오고 얼굴의 수염도 깍지 않은 채 지저분한 망나니로 보이지만 외모와는 전혀 다르게 엄청 자상하다. 결국, 나는 그의 집에서 열흘 가까이 홈스테이를 한다.


또 다른 이슬람국가인 이란의 국경지대는 파키스탄에서의 그것만큼 나와 다른 2명의 관광객을 긴장시킨다.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그리고 이란의 삼각(三角)국경지대는 빈번한 마약밀매와 인질사건으로 최고의 위험지구로 알려져 있다. 수많은, 그리고 철저한 검문이 여행자의 앞을 막는다. 한 이란인이 소지한 자루모양의 소지품을 검문하는 군인은 대검으로 찔러 확인할 정도로 무지막지한 검문이다.

하지만 이 검문들이 끝나는 지역에서부터 이란은 전혀 다른 놀라움으로 나를 감동시킨다. 자전거 여행자를 최고로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바로 차량들의 경적소리이다. 중국 땅에 발을 딛자마자 시달려야 했던 잔인한 '경적의 고문'이 이란에 들어와서 비로소 끝이 난다. 중국은 경적뿐만 아니라, 아주 심각한 차량의 과적문제로 도로가 난장판이고 수도 없이 트럭이 도로변에 나자빠져있다. 네팔과 인디아, 그리고 파키스탄은 차량 뒤에 "경적을 울려주세요!(Please blow a horn!)"라고 써 붙일 정도로 태연자약하게 무자비한 대(對)국민 고문을 자행한다.

나는, 테헤란 북부의 카즈빈(Qazvin)시에 있는 '알리'의 집에서 열흘가까이 '페르시아 왕'이 되어 머물렀다.
가운데 줄의 한가운데가 알리의 어머니이고, 좌측과 우측아가씨들이 딸이다. 앞줄은 둘째 사위로 전직 복서이고 뒷줄은 막내 동생. 왼쪽에서 두 번째 딸, 사미라(Samira)는 나의 속옷을 직접 손으로 빨았고, 새벽녘에는 살그머니 와서 담요를 꼭 덮어준다. 한국가정과 완벽하게 같은 분위기로서, 남녀 공히, 가정에 헌신적이고 뜨거운 가족애로 똘똘 뭉쳐있다.


길 가에서 우연히 만난 세 사람의 이란인 집에서 2주일동안 홈 스테이를 한다. 열흘간 홈 스테이를 한 이란인 알리의 집에서는 딸들이 나의 속옷까지 빨아주는 꿈같은 대우를 받기도 하며, 온 동네 집집에 초대되어 수면 부족에 엄청 먹어대기만 한다. 다행스럽게도 동네에는 한두 명의 대학생이 있어 그들이 통역을 위해 영어사전을 들고 나를 따라 다녔다.

이란인들은 우리 한국인들과 너무도 흡사하다, 끈끈한 정(情)이 있고 어른을 공경하며, 손님을 왕처럼 모신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우리처럼 가무(歌舞)의 민족이다. 모이면 춤추고, 노래하며, '띵까띵까'한다.

테헤란시내를 들어서자마자 '아자디 스퀘어'(Azadi Sq.)의 한 노상책방에서 만난 '알리'와 공원의 화장실을 다녀오던 중, 공원의 콘크리트 울타리 위에 히잡을 한 대여섯 명의 이란 여대생들이(참고: 이란여성은 흰 피부에 아주 예쁘다.) 나란히 앉아있다.
'외국인보기가 별 따기'인 이 곳에서 나를 보자 그들은 말을 건다.
"어데서 왔어, 중국? 아니면 일본??" 떨떠름한 그들의 물음에, 나는 "아냐, 한국에서 왔다!" 갑자기, 그들의 눈이 모두 커지며 활짝 웃는다. "정말 '코레에'에서 왔어?!" 그들 모두는 두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야단법석에 호들갑이다.
'알리'가 신났다!! 그들 앞에서 그의 볼록한 배를 더욱 힘차게 내밀며 뭔지 몰라도 신나게 떠들며 으스댄다. 내가 자전거를 타고 한국에서 이 먼 곳까지 왔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듯. 
갑자기, 50대 후반의 한 사내가 분노한 얼굴로 우리들 앞에 나타난다. 공원의 관리인인 듯한 그는 우리를 향해 전혀 알 수 없는 말과 함께 빨리 이곳에서 꺼지라는 제스처를 날린다. '알리' 또한 악마의 얼굴로 그를 되받아친다.
우리가 알리의 가게로 돌아 온 지 몇 분 되지 않아 정복과 사복의 두 경찰이 내 앞에 나타나더니, 나에게 영어로 간략한 프로필을 묻는다. 나는 가게 앞에 세워 놓은 내 자전거를 가리키며 내 모든 것을 까발린다. 알리는 흥분한 채 입에 거품을 물며 나를 옹호한다. 
이란에선 외국인은 현지 여성과 교제가 금지돼있고 이란인조차 자유연애가 금지되어 있다. 조선시대를 방불케 하는 유치하고 어이없는 이 해프닝은 결국 모두에게 한 숨과 실소만을  남기며 끝났다. 두 경찰은 아무 말도 없이 씩 웃으며 사라지고, 잠시 후 공원에 앉아있던 그 여대생들은 알리의 가게 앞에 와서 미소와 강렬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유유히 지나간다.

또 하나의 희한한 광경이 눈앞에 연출된다. 시내버스는 버스의 내부를 가로지르는 플라스틱 봉으로 정확히 이 등분되어있다. 앞에는 남자, 그리고 뒤에는 여자!

아버지가 전 올림픽 국가대표 레슬링선수였던 대학생, 쿠샨(Kooshan)-그는 영어를 아주 잘 한다-을 만나 그가 다니는 테헤란 근교에 있는 부유층 자제들만이 다닌다는 유명 사립대학교(Roodehen Univ.)를 방문했을 때는 전교가 발칵 뒤집혔다. 대학교엔 단 한명의 외국인 학생도, 단 한명의 외국인 교수도 없다. 결국, 쿠샨의 학부인, 컴퓨터 앤드 엔지니어링(Computer & Engineering Dept.) 학장의 초대를 받는 영광을 누리기도 한다. 학생들은 교실에 들어가 강단에 서서 얘기를 해달라고 난리를 칠 정도다.

나는 알리의 '일당'들과 종종 어울렸다. 이란은 다른 여느 이슬람 국가처럼 '금주국(禁酒國)'이기에 공식적인 즐거움이란 남녀불문하고 '차이'-밀크를 넣지 않고, 설탕만을 듬뿍 넣은 홍차-를 마시며 '허벌 버블(Herbal Bubble)'이라는 물 담배를 피우는 것이다. (물론, 은밀한 곳에서는 다른 강력한 것을 함. 동네마다, 공식 비공식적으로 그 '강력한 풀(草)'을 취급하는 곳이 있음.)


쿠샨의 방에는 그의 엄마, 투란(Turan)씨가 직접 담근 와인이 엄청 큰 독에 담겨 있다. 너무 달지도 않고 쓰지도 않은 그 와인을 나와 쿠샨은 줄기차게 마셔댄다. 알다시피 다른 모슬렘 국가들에서처럼 이란에서도 공식적으로 음주는 '불가'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비공식적으로 은밀히 음주를 즐기고 있는 듯하다.
그들은 획일적이고 재미없는 이란 국영방송대신 아랍을 비롯한 많은 해외채널을 즐기고 있다. 이층의 베란다에는 위성방송용 대형 접시가 있는데 비닐커버로 밖에서는 보이지 않게 가려져 있다.
'쿠샨'은 스포츠맨 아버지의 아들답게 만능 스포츠맨으로 겨울에는 이란의 설산에서 스키를 즐기며 여름에는 수영을 즐긴다고 한다.

쿠샨의 집 근처에는 수영장이 있다. 저녁시간 우리는 이미 상당량의 와인을 마셨다.
그는 빈 플라스틱의 음료수 병에 와인을 꾹꾹 밟아 채워 넣더니 다짜고짜 수영장에 가자고 한다. 이미 나를 위한 수영복도 챙겨놓은 상태였다. 우리는 천천히 걸어 수영장으로 향한다. 또 한 번의 놀라움이 나를 기다린다. 오직 남자만의 수영장이다. 남자와 여자가 수영하는 요일이 다르다고한다. 불행하게도(!) 남녀혼영불가(男女混泳不可)!!
낯선 외계인의 출현에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은 상당히 놀란 듯하다. 그들의 탈의실에는 낮은 높이의 탈의용 벽이 따로 설치되어 있다. 우리처럼 자유롭게 옷을 벗고 입지 않는다. 최후의 그것을 갈아입을 때는 허리높이의 탈의 벽에 들어가 갈아입는다.
이란인의 체모는 가히 엄청나다. 앞과 뒤 양면이 빽빽하게 검은 털로 덮여 있다. 야생동물 수준으로 혐오감을 느낄 정도이다.
이런 주변 환경을 완벽하게 일축하며 정반대의 모습을 한 나의 출현은 그들에겐 거의 쇼크, 그 자체인 듯하다. 쿠샨은 나에게 심각하게 묻는다.
"너는 왜 몸에 우리처럼 털이 없이 그렇게 반지르르하냐?"

쿠샨은 수영장을 들여다보더니 갑자기 환희의 환호성을 허공에 내지른다. 오늘 저녁 수영장엔, 아주 매력적인 인사(人士)가 계신다고 한다. 그는 다름 아닌 이 지역 담당 경찰 서장과 그의 어린 아들이다. 그는 결코 크지 않은 키에 대단히 큰 배를 가지고 있다. 수영을 못하는 그는 단지 너 댓 살 먹은 그의 아들에게 수영을 시키기 위해 온 것이다.
쿠샨은 그에게 보란 듯이 더욱 뻔질나게 수영장과 탈의실 사이를 왕래하며 와인 마시기와 다이빙을 계속한다.
같이 뒤섞여 수영을 하면서 그들의 특별했던 시선도 친근한 그것으로 변해간다. 역시 우리는 똑 같은 인간이란 것을 몸으로 확인한 듯하다.
쿠샨은 20세의 젊은이답게 스릴을 탐내고 있는 듯, 옷을 갈아입고 있는 그 경찰서장으로부터 5m도 떨어져 있지 않은 지점에서 음료수 병 안에 들어있는 와인을 태연히 마시고 그것을 나에게 돌린다. 쿠샨의 집요한 권유에 못 이겨 나 또한 이란의 '공공장소에서의 금주 법'을 철저히 깨 부시는 범법자가 되고 말았다. 쿠샨은 아주 통쾌한 듯하다. 이란에서 힘이 제일 센 사람이 경찰이다. 유신체제하에서의 우리나라처럼 경찰은 이란인 삶의 전반을 통제하고 있다.

이란에는 외국인 방문객이 거의 없다. 길거리의 모든 것은 완벽하게 이란어로만 쓰여 있기에 상점 문을 열고 들여다보기 전엔 무엇을 팔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 이란은 한국을 사랑한다, 그것도 아주 많이.
그들의 국민차는 기아(Kia)의 구 모델 '프라이드'이고 그들 각 가정의 실내에는 삼성과 엘지(LG)로 실내장식이 되어있다. 그들은 '대장금'을, 그리고 대장금의 주인공 '이영애'를 끔찍이 사랑한다. 젊은 이란인의 휴대폰 안에는 이영애가 있다. 이영애를 모르면 그는 간첩이다. 나는 이란의 가정집에서 한국의 드라마를 보고 있다. 이란인들 또한 파키스탄인들 뺨 칠정도로 마약과 마리화나에 절어있지만, 이상하게도 파키스탄인들처럼 눈이 벌겋거나 하지 않다.

왼쪽에 보이는 '넌'으로 불리는 이 빵은 -파키스탄에서는 '짜빠티'로 불린다.-중동지역의 대다수 국가들의 사람들이 주식으로 애용하는 것으로 이스트를 넣지 않아 부풀리지 않고 2, 3mm정도의 얇은 빵으로, 흙으로 만든 가마의 안벽에 반죽한 것을 손으로 붙여놓아 익힌다. 특별한 맛은 없으나, 뜨거운 이것에 버터를 발라 먹으면 맛이 아주 좋다.
점심과 저녁은 푸짐하게 먹는데, 주로 끈기 없는 쌀밥에 꼬치구이의 양고기나 닭고기, 그리고 주로 콩과 야채를 이용한 수프가 주를 이룬다. 식초에 절인 많은 종류의 야채 피클도 보인다. 보통 스프는 카레를 먹을 때처럼 밥 위에 부어 섞어먹는다. 파키스탄에서도 그랬지만 밥상은 없고, 그저 보자기나 비닐종이를 깔고 그 위에 음식을 올려놓는다.


놀랍게도, 미국의 상극(相剋)으로 알려진 이란의 사람들이 실제로는 미국 달러를 좋아하고, 미국의 문화를 아주 많이 동경하고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아주 폐쇄적으로 보이는 사회 전반의 정서와는 정반대로 그들의 대부분은, 심지어 차도르를 한 여인들까지 그들 이외의 문화에 엄청난 관심과 배우려는 열의로 가득 차 있다.
아주 건조해 보이는 그들의 외적인 삶의 모습과는 달리, 그들은 찬란한 페르시안 제국의 후예답게 먹는 것에서부터 전반에 걸쳐 자부심 있고,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다. 내가 열흘간 묵었던 알리의 집을 떠나는 날, 식구들 모두는 문 앞에서 눈물을 글썽거리고 많은 동네 사람들조차도 슬픈 표정을 지으며 이별을 아쉬워한다.
한걸음의 발길을 떼어놓기 위해 나는 필사의 노력을 해야 했다. 그들이 내 눈에 한점으로 보일 때까지 그들은 나를 향해 '살람마티(건강해요)!'를 외친다. 12월 말의 이란은 무척 추웠다. 이란북부와 터키는 이미 동토의 땅이었다.

국경을 지나면 나무 하나 없이 메마른 모래와 '산'이 이어지며, 또 하나의 '무(無)의 세계'가 펼쳐진다. 이란에 들어오자마자 철제 송전탑과 송전선이 몇 겹으로 달리고 있는데, 전력이 풍부하다는 얘기가 된다.
이란도 파키스탄처럼 어김없이 도로 밑에 수로(水路)가 일정주기로 통과한다. 어둠과 함께 나는 그 곳으로 운명처럼 기어들어간다. 사막의 바람이 의외로 세다. 수로 안에서 텐트를 쳐도 그 수로를 통과하는 강한 바람은 밤새도록 나의 텐트를 두들기고 사막을 떠도는 많은 가시 덤불들이 바람과 함께 날아 들어와 텐트를 흔들어 댄다.


도로변에 있는 한 쓰러져가는 식당. 그는 평생 결혼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지나가는 많은 트럭 운전사들에게 최소한의 식사, 그리고 뜨거운 티와 잠시나마 휴식의 공간을 제공하고 그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그의 처절한 고독을 새기며 살고 있다. 돈을 내려는 나에게 정색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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