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완벽한 제주 일주 자전거 도로
에디터 : 박규동

2008년 8월 13일

정자 위에서 캠핑

제주도 바다는 목포 바다보다 크다.
바람도 더 많이 만들어 낸다. 여자와 돌과 바람이 많아 삼다도(三多島)라 하였건만 여자는 보이지 않고 바람만 남아있는 것 같다. 그래도 성산포까지는 순풍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순풍이 그리 고맙지 않다. 후텁지근한 더위를 몰고 왔기 때문이다. 그 습한 바람은 한라산에 부딪혀 상승기류를 만들고 상승기류는 구름으로 변하더니 제주도 북동쪽 지방에 폭우를 퍼부은 것이다. 한라산을 중심으로 남쪽과 서쪽에서는 찌는 듯한 땡볕 더위에 시달리고 북쪽과 동쪽은 폭우로 시달린 하루였다.
더울 때 자전거여행을 하면 역풍과 순풍의 고마움은 반 반이다.
역풍인 경우엔 체력손실이 많아진 만큼 바람으로 체온을 식힐 수 있는 시원함이 있다. 순풍인 경우에는 페달을 같은 힘으로 밟아도 바람의 도움으로 속도가 다소 빨라진다. 그러나, 시속 17km로 달릴 때에 시속 17km의 바람이 불면 느낌으로는 무풍지대에 든 것과 같아서 체감 더위는 훨씬 높아진다. 오늘이 그런 날이다. 사막보다 더 더운 나라에 온 것이다.
땀으로 목욕을 했다.



제주도에 있는 도로는 올 때마다 변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제주도를 국제수준의 다목적 자치도로 만들겠다는 정부의 의욕과 제주도민들의 성의로 그런 변화를 만드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12번 국도, 제주일주도로는 거의 완벽하게 자전거도로를 함께 만들어 놓았다. 왕복 4차선 도로 좌우에 폭 2m 가량의 자전거 전용도로가 경계석으로 분리 되어 있어서 안전을 보장 받을 수 있다.
아직 공사가 마무리 되지 않았거나 시공을 하지 못한 구역이 있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렇게도 잘 만들어진 자전거도로를 보면서도 흡족하지 않은 것이 눈에 띈다. 차도와 자전거도로를 구분하는 경계석이 페인트로 처리 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다. 말하자면 담을 없애 달라는 부탁이다.
다음으로 지적하고 싶은 게 자전거 전용도로의 표준이 없다는 것이다. 이 것은 우리나라 전역에 있는 자전거도로의 문제이기도 하다. 후진국 체질을 면하지 못하는 일례이다. 하다못해 중량천이나 한강의 자전거 도로도 관할 구청마다 모양새나 포장재, 도로 폭, 기존 도로와의 연계성, 안전표지 등등이 제 각각이다.
제주도에서도 같은 사례가 연속이다. 자전거 교통 분담율을 15% 이상 끌어 올리겠다는 정부의 의지를 의심하는 대목이다.
제일 눈살을 찌푸리게 한 것은 관리 소홀이다. 청소는 아예 하지 않은 것 같다. 경계석 때문에 물리적으로도 청소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쌓인 쓰레기에서 나쁜 냄새가 역겹다. 때때로 농민들이 곡식을 말리거나 주차를 해 두어서 도로를 점령 당한 것이 아쉬움이다.
그리고, 제주도에 자전거 관광이 매년 기하급수로 성장하고 있는데 반해 자전거여행자를 위한 안내표지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12번 국도와 해안도로를 번갈아 타면서 바람에 밀려 동쪽으로 나아갔다. 오른쪽 어깨 너머로 푸른 파도가 출렁이며 아내를 푸르게 물들인다.
나도 푸르게 닮아 간다. 흐르는 땀도 푸른 바다가 된다.


산방산을 힘겹게 올랐다.
여흘이 넘도록 누적된 피로와 체력손실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오르막을 쉼 없이 꾸준하게 올라온다. 나는 내심으로 놀라면서도 칭찬을 아꼈다. 60대의 아내가 자전거 경력도 많지 않은 데 어디서 이런 오기가 솟는지 궁금하다.
부부가 40년을 함께 하면서 서로 서로 닮아진 것인가!

높은 데서 바라보는 바다는 푸른 초록이다.
해안도로 한 모퉁이는 절벽이 높았다. 바다까지는 한 20m 쯤 될 것 같았다.
내륙 쪽에는 화산암으로 만들어진 돌담들이 요리 조리 길고 짧게 칸막이 된 제주도 농경지가 펼쳐저 있었다.
이 풍경은 "밀레의 만종"보다 아름답다. "만종"에서 밭일을 끝내고 바로 나온 것 같은 차림새의 할머니가 수박을 밭 바로 앞에 차려 놓고 팔고 있었다. 수박이래야 모두 네 개, 크기도 보통 수박의 반만하다.
길 건너 솔밭 아래 자전거를 세우고 수박을 좋아하는 아내가 흥정을 한다. 여행을 떠나 온 이래로 우리는 수박을 한 번도 먹지 못했다. 수박 한 통을 한꺼번에 다 먹을 수 없으니 남은 수박을 트레일러에 싣고 다닐 엄두를 못 낸 것이다. 이번에는 수박의 크기도 작고 쉴 자리도 알맞아 먹고 가기로 한 것이다.
주름살이 얼굴 가득 페인 할머니의 구수한 인상처럼, 밭에서 바로 따서 아직도 뜨뜻한 수박 맛이 기가 막히게 좋았다.
3분의 2를 먹고 나머지는 비닐로 된 지퍼백에 넣었다. 아내는 도중에서 산 얼음물을 지퍼백으로 감싸서 냉장효과를 노리며 트래일러 위에 덮인 메트리스 속으로 밀어 넣었다.

서귀포 월드컵 경기장

서귀포 2002 월드컵 경기장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2002년, 그 해는 참 아름다웠다. 국가와 민족의 집단 이기심은 축구 공 하나에 집착 되었고 우리는 그 대가로 기쁨을 누렸다. 아름답고 착한 기쁨이었다. 지금도 2002월드컵 축구선수들에게 보내는 고마운 마음은 한이 없다.

자동차가 늘면서 변한 게 있다면 작은 마을에도 쉽게 찾을 수 있었던 식당이 사라진 것이다. 개인교통이 편해지면서 작은 마을 식당도 큰 도시의 식당과 경쟁을 해야 하고 이 경쟁에서 밀린 것이다.
남원까지 와서 하나로마트에 들어갔다. 도저히 배가 고파서 갈 수 없는 지경이다. 밥 지을 생수를 두 통 사고 나서 토마토주스를 집어 드는데 병목에 줄이 매여서 하나가 더 따라 온다. 아내가 점원에게 묻는다.
 "이게 왜 이래요?"
 "원 플러스 원 이예요"
 "헉!"
점원의 대답이 반갑지 않다. 졸지에 페트 병이 네 개나 늘어 났으니 그 짐 무게를 걱정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이후로 여행이 끝날 때까지 나는 "원 플러스 원"에 대한 공포가 있었는데, 그 공포는 아내가 마트에 들어 갈 때마다 되살아 나서 전설이 되었다.

길가에서 라면을 끓이고 아침에 먹다 남은 밥을 말아 먹었다.
밥으로 배가 차고 물을 실컷 마셨으니 가는 길이 평화로워졌다. "원 플러스 원"만 제하고는 다 좋아진 것이다.

일출봉으로 가는 길

성산포를 10km 남겨 놓고 다시 해안도로로 접어 들었다. 파래 바람이 불어왔다.
멀리 섭지코지와 일출봉이 오버랩 되면서 아파트가 유령처럼 나타났다. 섭지코지에 아파트가 들어선 것이다. 길가에 나붙은 "해군기지 결사반대"라는 현수막도 길을 묻고 있다.
갑자기 길을 잃은 것 같다. 어쩌면 좋단 말인가?

일출봉을 1km 남겨 놓고 풀밭에 앉아 쉬었다.
태양은 한라산을 넘어가고 석양을 받은 일출봉은 일몰봉으로 색이 바뀌고 있었다.
오늘에야 비로소 우리나라가 아름답다!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 그리고 그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아름다운 것이다.
아내도 아름답다!

오래 전에 아내와 둘이서 제주도를 여행했던 기억이 되 살아 났다. 자동차를 빌려서 제주도 구석 구석을 찾아 다녔던 것이다. 일출봉을 오르기 전에 승마를 하게 되었다. 사진사가 연출을 하라고 하기에 아내를 안아서 말에 태우고 마상에서 키스를 하고......

일출봉 주차장

일출봉 주차장까지 밀고 올라갔다가 기념사진을 찍고 내려오면서 잠 잘 곳을 찾았다. 민박을 안내하는 호객이 여기 저기서 들린다.
관광지 한 복판에서 텐트를 치기가 뭐해서 민박을 잡았다. 3만원을 달라기에 2만5천원에 흥정하고 할머니의 뒤를 따라 민박집으로 갔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거처하던 안방을 내주었다. 두 분은 건넌방으로 가신다. 우리는 부엌을 빌려 저녁을 만들어 먹고 샤워도 했다.
방 안에는 가족사진이 걸려 있었다. 아들, 딸, 며느리, 사위 그리고 손자들의 화목한 모습에 나도 모르게 반하고 말았다. 나는 슬그머니 할머니에게로 가서 아까 거슬러 받은 5천 원을 다시 쥐어 드렸다. 고마워 하시는 모습 또한 고맙다.

내일 저녁에 배를 타고 제주도를 떠나게 되니 이 밤이 제주도에서는 마지막인 셈이다.
젊었을 때처럼 밤거리를 나대지 않아도 좋은 나이다. TV에서 올림픽 소식을 들으며 씻은 몸을 에어컨으로 말리고 나니 그만이다.
안방 주인 내외를 쫓아낸 송구스런 마음을 안고 제주도에서의 마지막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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