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끝전복마을, 양식장 주인의 인심
에디터 : 박규동


진도에서는 개를 만나지 못했다.
모기만 극성이었다. 주민들이 전해주는 이야기를 들으면 그 모기가 "소모기"란다. 소가죽도 뚫고 들어가는 강력한 침을 가진 모기라는 뜻이다. 모기조차 이렇게 억척인데 우리가 만약에 진도개를 만났으면 어쩔뻔 했을까?! 자전거의 천적이 개가 아니던가!

한편에서는 펑크를 수리하고 한편에서는 비를 피해 정자에 들었다.


진도를 돌아 나올 때에는 헌 다리를 건넜다.
날은 흐렸고 간간이 비도 내렸다. 공룡이 살았다는 황산을 향해 동쪽으로 달렸다. 어느 땐 소나기를 피해 주유소의 차양 아래로 피신 하기도 하였다.
공룡화석자연유적지에 도착하니 휴가철이 겹쳐서 관람객이 넘쳤다. 마침 나그네님의 자전거 뒷바퀴가 펑크났다. 이번 여행에서 첫 펑크를 나그네님이 기록한 것이다. 한편에서는 펑크를 수리하고 한편에서는 비를 피해 정자에 들었다. 매표소에서 유적지까지는 1.5km나 되었고 자전거 출입이 안된다고 하여 관람은 포기하였다. 황산에서부터 다시 77번 도로를 타고 남으로 페달을 저어 갔다. 아내의 느린 속도를 나그네님이나 트리스탄이 잘 참아 주었다. 오늘은 해남반도의 남단 땅끝마을까지다.

해남반도는 남해안에서도 가장 서쪽에 있는 반도이다.
백두대간의 줄기와 뿌리를 쫓아 남으로 내려오다가 한반도의 남단 끝머리에 해남군이 있다. 땅끝마을에서 북동쪽으로 산줄기를 타고 가면 10km 안에 도솔봉과 달마산을 만난다. 산세가 그저 금강산을 옮겨 놓은 듯하다.

미황사 입구

산세가 그저 금강산을 옮겨 놓은 듯하다.


단청이 지워진 듯한 대웅전 기둥의 나무결이 곱고도 고왔다.

달마산 서쪽에 미황사가 있었다.
미황사로 오르는 ㅓ자 삼거리에서 아내는 트레일러를 지키고 있겠다고 하였다. 트레일러를 떼어낸 남자 셋은 자전거로 미황사를 올랐다. 꾸역꾸역 대웅전 앞 마당까지 오르자니 숨이 턱을 넘어 머리까지 들썩였다. 숨을 고르고 난 다음 차근차근 경내를 둘러보았다.
단청이 지워진 듯한 대웅전 기둥의 나무결이 곱고도 고왔다. 아낙이 열심히 경배를 올리고 있었다. 대웅전 마당에서 면경같은 바다를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앉은 자리가 풍수지리에 보태어 경관이 마음을 맑게 이끌어 주는 미묘함이 있었다. 석간수의 물맛 또한 한맛이었다. 염라대왕을 만나서 나도 할 말이 생겼다. "나도 미황사 다녀왔수!"

미황사는 이웃이신 "숲길님"께서 추천해 주셨다. 
1,300년이나 오래 된 고찰이다. 신라경덕왕 8년(749년)에 창건하였다고 한다. 조선 숙종 18년(1,692년) 당시 병조판서 민암 이지은의 사적비에 미황사 창건 설화가 적혀 있었다.
<이 설화에 의하면, 경덕왕 8년에 돌로 만든 배가 달마산 아래 사자포구에 이르렀다고 한다. 의조화상이 두 사미승과 100여명의 제자들과 함께 맞이하니 금으로 된 함에는 많은 불경이, 그리고 검은 바위가 있었는데 깨어보니 검은 소 한 마리가 나왔단다. 그날 밤, 의조화상의 꿈에 금인이 나타나 "나는 우전국(인도) 왕으로 금강산에 봉안하고자 경전과 불상을 가지고 왔으나 이미 금강산에 절이 가득하여 돌아가던 중 이 곳 지형이 금강산과 버금이라 이에 이르렀으니, 소에 경전을 싣고 가다가 소가 머무는 곳에 절을 지으라"고 했단다. 소가 가다가 마지막으로 멈춘 곳에 미황사를 지었다>라고 전했다.

불교가 4세기 말부터 중국을 통해 북쪽으로 대륙을 통해 유입되었다는 통설에 반하여 남해안에는 바닷길을 통해서도 불교가 전해졌다는 것을 알려주는 의미있는 대목이다.
미황사에서는 템플스테이를 한다고 하니 착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다.

미황사에서 내리막을 기가 막힐만큼 신나게 달려서 내려왔다.
아내는 트레일러를 세워두었던 마당 넓은 집 안에서 홀로 사시는 할머니와 친구가 되어 있었다. 인절미도 얻어 먹었다. 물도 얻어 마시고 인심도 얻었다. 나그네 사정에 우리는 줄 것이 없었다. 아내 불근늑대가 잠시 나누어 준 수다가 전부였다.

오후에는 구름 사이로 해가 비치며 젖은 바람이 불었다.
중리해수욕장과 송호리해수욕장을 지나 달마산 마지막 산줄기를 넘는 고갯길을 올랐다. 젖은 바람이 땀을 흐르게 했다. 후텁지근한 가운데 제법 긴 오르막이다. 나그네님과 트리스탄은 앞서 갔고 아내를 따라 나는 뒤로 처졌다. 오르막 중간 쯤에 가고 있는데 지나가던 차에서 "형님!" 하고 외친다. 며칠 전에 서울을 떠난 산악회 후배들이다. 보라매와 꺼실이 여름이 영식이 규필이 순왕이 등이다. 길이 좁아 차 카니발은 지나쳐 갔다. 오르막 8부 쯤에서 자전거를 잔뜩 싣고 가던 소형 트럭이 또 "형님! 파이팅!!" 한다. 보라매와 같은 일행이다. 땅끝에 도착한 다음 서로 캠프를 치고나서 다시 만나자고 하였다.


땅끝은 초입에서부터 발디딜 틈이 없었다.
차량은 수 백m 씩 동서로 밀려있어서 도로가 주차장이 돼 버렸다. 땅끝마을 동쪽에 빈 땅이 눈에 들어왔다. 야영을 하기에 마땅해 보였다. 자전거 네 대가 깃발을 달고 골목을 들어 서는데 마당에서 저녁 식사를 하던 가족 중에서 으뜸인 사람이 우리를 불러 세웠다.

"어디로 가세요? 그 쪽에는 길이 없어요."
"텐트를 치려고 합니다."
"그 안쪽에 가면 빈 집이 있는데 거기서 치시든지 아니면 우리집 뒷 마당에 치시든지요?"

트리스탄이 뒷마당을 정찰하고 오더니 양식장 모터 소리가 장난이 아니라고 한다. 다시 아래쪽으로 내려가겠다고 하니

"그럼, 우리 집에서 주무세요. 오늘 밤에 비가 내린다고 하니 그러는 게 좋겠어요."

수백 평이 넘는 대형 전복양식장을 운영하는 주인이 우리의 처지를 미리 염려해 준 인심인 것이다. 자전거는 백 평이 넘을 것 같은 창고에 세우고 열 평이 넘을 것 같은 넓은 방을 얻어 자게 된 것이다. 전복 양식장에 해수를 공급하는 대형 모터가 쉴세 없이 돌았지만 방 문의 밀폐성이 좋아 조용한 잠을 잘 수 있었다. 창고 옆에서 저녁을 지어 먹고 수돗물을 틀어 빨래도 하였다. 주인 아낙이 열환풍장치를 알려 주면서 그 곳에서 빨래를 말리면 금방이라고 하였다. 별 네 개짜리 호텔이 이만할까?!

"땅끝전복마을"이다.

보라매와 그 일행은 보길도로 떠났다고 하였다.
보통 때에는 배가 끊긴 시간인데 승객이 많아서 임시 증편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아쉽게 헤어졌다.

새로 얻은 네째 아들 윤구(트리스탄)의 효성이 지극하다.

새로 얻은 네째 아들 윤구(트리스탄)의 효성이 지극하다.
나보다 두 배나 큰 허벅지로 일행의 앞 뒤를 오가며 팀의 분위기를 돋으기도 하고 내가 필요한 정보를 알뜰하게 구해 온다. 팀의 기동성이 엄청나게 커진 것이다. 기운이 다 빠진 저녁에는 야영장을 알아보러 다니는 것도 힘이 들었는데 그 일을 윤구가 다 해결하는 것이다. 조리시간에는 물을 떠 나르고 무거운 짐(예를 들면 수박이나 대형 음료수 병)도 속셈 없이 그의 트레일러에 얼른 싣는 모습이 꼭 친아들 같다. 즐거움도 여행의 기쁨도 윤구를 통해 두 배, 세 배로 늘어난 것이다.

어제 오후에는 42.5km, 오늘은 75.17km를 달렸다.

왼쪽으로 보이는 산과 바다가 만나는 곳이 한반도의 남쪽 땅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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