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룡초등학교 농주분교의 스위트룸!
에디터 : 박규동

아침에 정자에 모인 이웃들, 오른쪽이 이장님이다.


며칠 째 폭염경보가 내렸다.
바닷바람과 섞이면서 공기는 수증기처럼 후텁지근하다.
너구리님이 밤새 서울로 올라갔다고 전화가 왔다. 잠자리가 마땅치 않아 차에서 잠을 잤던 모양이다. 너구리님 부인과 또 함께 왔던 강아지가 힘들었을 것이다. 함께 라이딩을 하고 싶었는데 말이다.

아침밥을 먹고 있는데 궁금한 얼굴로 우리가 야영을 했던 정자를 둘러보는 나이든 남자가 있었다.
이장이라고 자기 소개를 하였다. 어제 밤에 있었던 일이 생각나서 속으로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뭐 불편한게 없었습니까?" 하면서 이장님은 애호박에 갓 담은 김치까지 갖다 주셨다. 식사 후에는 커피까지 타 오셔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기도 하고. 진작에 알았으면 노인회관의 방을 써도 좋았을 것이라고도 하였다. 간밤에 섭섭했던 벌교인심이 한꺼번에 날아가 버렸다.

낙안읍성 입구

이런 성곽의 길이는 1,410m이다.

성 안에 있는 큰길





성 안에서 민박도 가능하다.

낙안읍성마을은 이웃이신 휴님이 소개해 주셨다.
낙안읍성은 보기에 좋았다. 우리 시대에 이만큼 원형이 살아있는 전통 성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내 눈에는 앙코르와트보다 아름다웠다. 옹기종기 모여 살았을 선한 백성들의 평화가 한 눈에 다가오는 듯하여 성곽 길을 걷는 내내 가슴이 훈훈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후예가 지금도 성 안에 살고 있었다.
왜구의 잦은 침략에 대비하여 쌓은 성이란다. 조선 태조 6년(1397)에 흙으로 쌓았던 토성을 세종 6년(1424)부터 여러 해에 걸쳐 돌로 다시 쌓으며 규모를 넓혀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일부 무너진 성곽과 성문 등은 복원 되었는데 복원의 손길에 공을 들여서 예전 모습에 가깝도록한 것이 좋아 보였다. 연병장으로 보이는 넓은 마당과 오래된 나무, 대나무 숲이 낙안성을 더 운치있게 보여 주었다. 원형에 가까운 모습으로 오래동안 보존 되었으면 좋겠다.
매력이 넘쳤다.

낙안읍성에서 나와 다시 벌교로 와서 점심을 먹었다.
벌교에서 동쪽으로 3km가량 와서 2번국도가 위로 지나가는 다리 밑에서 순천만 바람을 맞으며 낮잠을 잤다. 폭염경보 중에 이만큼 시원한 데가 있다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들마루가 놓여 있었다. 마을 노인들도 더러 계셨다. 상판 위로 차가 지나 다니는 소리도 자장가처럼 느껴졌다.

아침부터 몸이 온전치 못해 보이던 윤구가 점심을 굶었다.
배탈이 난 것이다. 설사도 했다. 아내가 매실액을 뜨겁게 데워서 마시게 하고 준비했던 위장약도 먹게 하였다. 우리의 기동력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그리고 아프다는 구실이 중도에 여행을 포기하는 데까지 갈까봐 내심 우려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윤구는 잘 버텨냈다. 느리긴 하여도 긴 오르막을 올랐고 불편한 몸에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아들아! 장하다!




순천만에는 빽빽한 갯벌 갈대가 70만 평이나 깔려있었다.
사진이나 TV에서 보던 그대로였다. 갈대 숲 사이로 마루 길을 끝없이 길게 만들어 놓았다. 갈대 숲으로 파고 든 사람들이 울긋불긋 꽃으로 피어났다. 청년이든 노인이든 갈대 숲 속에서는 연인이 된다. 누구나 갈대 바람이 가슴 속으로 파고 들었을 거다. 자전거 바퀴 살에서도 갈대 바람이 일었다.
순천만은 2006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람사협약에 가입된 연안습지이다. 개발이냐 보존이냐 하면서 논쟁이 끓었던 어리석었던 시절이 우리에게 있었지만 순천만은 잘 보존 되었다. 고마운 일이다.

순천만 북단을 홍래교로 건넜다.
홍래교는 농로라 길이 차가 한 대 밖에 다닐 수 없을 만큼 좁았다. 농로를 벗어나 남쪽으로 가는 863번 도로를 타기 직전에 나그네님이 배가 고프다고 한다. 점심을 일찍 먹은 탓이다. 길 가였지만 즉석에서 라면을 끓였다. 나름데로 라면이 맛있었다. 먹지 못하고 바라보는 윤구의 시선이 안타까웠지만 나는 모른 체 했다.

순천만의 석양을 오른쪽으로 바라보며 남으로 달렸다.
피로하기도 하거니와 저무는 해는 귀가 시간이 다 되었음을 알린다. 잠 잘 곳을 찾아야 한다. 지도를 살핀다. 2km 전방에 초등학교가 있다. 윤구가 앞장서서 학교를 찾아간다. 그래도 윤구다! 윤구는 교무실로, 나는 관사로 갔다. 관사에는 직원으로 보이는 가족이 살고 있었다. 내가 먼저 말을 건넸다.

"선생님이세요?"
"아닌데요. 직원입니다. 어쩐 일이세요?"
"자전거 여행자입니다. 운동장에서 하룻밤 텐트를 쳤으면 해서요."
"곤란한데요. 어지럽혔던 사람들이 많았거든요."
" 함께 온 우리 아들도 교사입니다.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거에요."

해룡초등학교 농주분교, 1600명이던 학생이 지금은 6명이란다.

우리에게 스위트룸을 제공해 준 직원(가운데)

교사가 같이 왔다는 말에 그는 안심이 된다는 듯이 긍정으로 변했다. 교무실로 갔던 윤구가 돌아 오고 이야기는 잘 풀렸다. 교실 뒤 켠에서 텐트를 치기로 한 것이다. 잠궈두었던 수도도 풀어주기로 하고 화장실도 쓸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학교 뒤 켠으로 자전거를 옮기는데 그 직원이 "그러지 말고 아예 교무실을 쓰세요!" 한다. 마음 문이 열린 것이다.
그가 교무실 문을 열어 주면서 하는 말이 예전에는 1600명이었던 학생이 지금은 여섯 명이란다. 해룡초등학교 농주분교가 된 것이다. 그 많던 학생은 다 어디로 갔을까? 선생님 한 분에 직원 한 분, 학교는 1600명 분.
복도에서 밥을 짓고 교무실 탁자에서 상을 차렸다. 전기가 들어 왔고 TV도 켜졌다. 에어컨이 돌아가며 우리의 체온을 식혀 주었다. 간이 샤워장이 있어 샤워에 빨래까지 했다. 잠을 자려고 교무실 바닥에 매트리스를 깔고 침낭을 폈으나 모기가 덤벼들었다. 구석 구석에 텐트를 쳤다. 모기장 대용이다. 전화기와 카메라의 배터리도 충전을 하였다. 쇼파에 앉아 커피도 마셨다. 모든 게 안락했다. 신라호텔 스위트룸이었다!
여수반도에서의 첫 밤이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위의 기사는 개인적인 용도 및 비상업적인 용도의 '퍼가기'를 허용하며, 상업적인 용도의 발췌 및 사진 사용은 저작자의 허가를 받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