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랭킹 1위 이혜진 선수, 행복하게 자전거를 타는 게 목표
에디터 : 김묘진 기자

지난 3월 1일, 전 세계 사이클리스트들의 눈이 2020년 세계트랙사이클선수권대회(UCI 월드챔피언십)가 열리고 있는 독일 베를린으로 향했다. 그 곳 베를린에서 한국 사이클 역대 최고 성적인 은메달을 목에 건 선수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이혜진 선수였다. 세계선수권대회를 마치고 귀국한 후 짧은 휴가를 보내고 있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우선 축하합니다.
한국 사이클 시니어 세계선수권 역대 최고 성적을 거둔 직후라 하루하루가 다를 것 같습니다.
대회 후에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요?


"현재는 일주일 간 휴가 기간이어서 평소와 달리 조금 여유롭게 지내고 있습니다.
다만 요즘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어디 여행도 못 가고 조금은 따분한 휴가가 되어 버렸어요."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목에 건 메달은 이혜진 선수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지난 10년 엘리트 선수로서 지켜만 보던 자리였습니다. 뭣 모르고 올랐던 주니어와 달리, 엘리트가 된 후 많은 선수들이 시상하고 세레머니 하는 자리를 보며 동경하고 바라왔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 자리에 서는 데까지 10년이 걸리긴 했지만요."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10년의 시간을 노력했던 이혜진 선수. 2020년 3월 1일 베를린 트랙 월드챔피언 경륜종목 시상식.
사진 제공 : 김수현


고마운 사람도 많고, 힘이 된 사람들도 많을 것 같습니다. 한 마디 하자면?

"뭐 먹고 싶어? (웃음)"


세계선수권대회를 치른 후, 본인 SNS에 경기 결과를 공유하며 행운이라고 표현했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자리가 너무 안 좋았고, 예상보다 훨씬 많은 선수들의 기량이 올라왔다고 느꼈어요. 기회만 엿보는 상황이었고 기회가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이혜진 선수는 경기 직전에 시행되는 자리 추첨에서 6번을 뽑아, 선수들 중 가장 뒷자리에서 경기를 시작하였다.)


세계선수권대회 전에 있었던 월드컵 경기 얘기를 안 할 수가 없습니다.
홍콩 월드컵을 비롯해 캠브릿지 월드컵까지 연속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죠. 두 차례의 성적을 통해 본인의 몸 상태를 느끼셨을 것 같은데 어떤 느낌이었나요?


"사실 두 번 다 추입을 하면서 '내가 미쳤나? 이게 넘어가지네??'라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두 번 다 골인하고 이게 맞나 싶을 정도로 어안이 벙벙했어요."
(추입: 그룹 후미에서 따라가며 힘을 아끼다가, 경기 후반부에 강하게 앞으로 나가 추월하는 방식).

2020년 UCI 3차 홍콩 월드컵에서 우승

UCI 4차 캠프릿지 월드컵까지 연속으로 경륜 종목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이혜진 선수.
사진 제공 : 이즈니코리아


늘 해당 종목에서 좋은 결과를 보여줬었지만 올해 그 기량이 폭발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특별한 계기나 이유가 있는지요?

"아무래도 그 전보다 조금 더 행복해서인 것 같습니다!
어느덧 16년째 자전거를 타고 있지만, 제일 어려운 게 마음이 맞는 동료를 갖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여느 때처럼 힘든 순간도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늘 찾아오는데, 그때마다 함께 있는 수현이가 많이 도와준 것 같아요 참 밝은 아이거든요. (웃음)"
(김수현 선수는 이혜진 선수와 함께 부산지방공단스포원 소속인 동시에 단거리 국가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월드컵에서의 성적으로 세계선수권을 비롯해 올림픽까지... 그 다음을 기대하는 시선들이 정말 많았을 텐데, 부담스럽기도 했을 것 같습니다. 부담스러웠다면 어떻게 그 감정을 제어하고 이겨냈는지 궁금합니다.

"부담스럽긴 한데... 제가 좀 걱정도 많은 만큼 약간은 단순한 면도 많아서 부담을 느끼다가도 '아이 근데 못하면 뭐 어쩌겠어 될 거면 뭘 해도 되겠지'라는 생각을 많이 해요.
리우 올림픽이 끝난 후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었었는데, 그때 이런 생각들로 떨쳐낸 것 같아요. 열심히 한다고 해서 다 되는 건 아니구나 어느 정도 운도 필요하구나라는 생각이 컸거든요."
(2016년 리우 올림픽에서 이혜진 선수는 경기 중 바로 앞서 달리는 선수의 낙차에 휘말려 결승에 오르지 못했었다.)

1인자에게 주어지는 기대의 무게 또한 이겨내야 하는 몫임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오른쪽 사진 제공 : 김옥철 선수


주니어 선수 시절부터 지금까지 '최초'라는 타이틀이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최초라는 타이틀은 언제나 가장 빛나지만, 그 자리에 가기까지 감내해야 하는 여정이 결코 쉽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
가장 어려웠던 점이나 힘들었던 순간은 언제였나요?


"사실 리우 올림픽을 준비할 때 많은 분들께서 메달에 대한 기대를 표현하셨는데, 저 역시도 '나 진짜 이러다 사고 치는 거 아니야?' 할 정도로 기대감이 컸어요.
그런데 그때 생각해보면 주변에 올림픽 메달을 획득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간접적으로나마 그 느낌이나 경험을 물어볼 사람이 없더라고요. 그로 인해 처음 하는 일에 대해서 혼자 해결해야 하거나 비슷한 경험을 참고하는 방법 밖에 없을 때가 제일 힘든 것 같아요."

(그녀는 2010년 세계주니어 월드챔피언십 여자 500m 독주 그리고 스프린트 종목에서 1위를 하며 한국 사이클 최초로 세계선수권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성인부로 넘어 온 후 2014년 런던 월드컵에서 경륜 종목 동메달을 차지하며 한국 사이클 역대 첫 월드컵 단거리 메달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여기에 멈추지 않고 지난 2019∼2020시즌 UCI 트랙 월드컵 3차 및 4차 대회에서 여자 경륜 종목에서 1위를 하며, 한국 사이클 최초로 월드컵 2회 연속 금메달을 안겼다)


어느 종목이든, 특히나 비인기 종목의 경우에는 대스타가 나와야 관심이 높아지고, 해당 스포츠의 인프라가 커지는 것이 현실입니다. (사이클은 비인기 종목이라고 생각하는지?)
그런 의미에서 이혜진 선수가 올해 남긴 여러 큰 업적들은 같은 길을 걷고 있는 후배들에게 분명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걸으며 길을 개척하고 있는 선배로서 가지고 있는 책임감이나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저는 사실 사이클이 비인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말 그대로 비인기는 인기가 없고 관심 자체가 낮아야 하는데 사이클 자체 만으로는 정말 많은 분들이 관심 있고 즐기고 계시거든요. 다만 우리나라 사이클 선수나 경기에 대한 관심도가 낮을 뿐이죠.

일단은 제가 갖고 있는 책임감으로는, 제가 좋아하는 글인데 하상욱 시인이 쓴 글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무도 가지 않던 길이 열리면 누구나 가려 하는 길이 되더라' 라는 글이 있어요. 아무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해냄으로써 누군가에게는 길잡이가 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큽니다.
그로 인해 많은 후배들이 이 일에 대해서 높은 벽이라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지난 홍콩 월드컵에서 함께 호흡을 맞추며 경기에 임했던 이혜진 선수(좌)와 김수현 선수(우)
사진 제공 : 이즈니코리아


포스트 이혜진으로 지목하고 싶은 선수는?

"현재 함께 국제대회들을 참가하고 있는 수현이가 되었으면 하고,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좋은 재능도 가지고 있고, 같이 다니면서 다른 선수들보다 많은 것을 경험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다른 선수들보다 더 잘 견뎌내지 않을까 싶습니다."


최고의 성적이 최고의 행복과 비례하지는 않는 경우도 많은데, 그런 의미에서 이혜진 선수에게 '선수로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였는지?

"저는 현재인 것 같아요!
가장 제 마음이 편한 시기가 어쩌면 지금인 것 같아요.(웃음) 마음이 편하면 행복한 거잖아요."

마음이 가장 편한 지금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고 답하는 이혜진 선수(왼쪽 선두)의 경기 모습


단거리 선수로서 택할 수 있는 종목이 여럿 있는데(500m 독주, 스프린트, 단체스프린트, 경륜), 경륜 쪽에 더 집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아무래도 기록 종목은 제일 평가하기 쉽지만 가장 어려워요. 기록 자체가 곧 실력이니까요.
경륜은 비교적 기록 자체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에 경기 중 변수로 더 많은 기회를 만들 수 있어요. 역으로 생각하면 많은 변수로 장담하기도 어렵기는 하지만요. 그 변수를 기대하며 준비했던 게 지난 리우 올림픽이었던 것 같습니다."
(경륜 경기는 일정 스피드로 함께 달리다가 마지막 2바퀴 정도에서 결승 경쟁 후 순위로 결과가 결정된다)


질문 자체가 부담을 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현재 몸 상태나 느낌이 어떤가요?

"현재의 몸 상태가 도쿄 올림픽 때와 비슷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현재는 나쁘지 않아요. (웃음)
사실 좋다는 말을 잘 하지 않기도 해요. 다만 지금보다는 더 좋아지지 않을까 싶어요!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까요."


선수 이혜진으로서의 최종 목표가 무엇인가요?

"선수 이혜진으로서는 가장 가까이 있는 올림픽에서 메달 획득하는 게 목표겠지만, 멀리 생각하면 그만 두는 날까지 건강하게 즐겁게 마무리하는 겁니다. 꿈도 목표도 이루는 게 중요할 수도 있지만 제일 중요한 건 제가 행복한 거더라고요.
행복하게 자전거에서 내리는 게 최종목표입니다."


* 2020년 트랙 월드챔피언십 대회를 마친 후 이혜진 선수는 UCI 여자 경륜 세계랭킹 1위에 올라섰다. 이 또한 한국 선수로서 처음 이룬 쾌거이다. (1위 이혜진-한국 3245점, 2위 리와이즈-홍콩 2837.5점)
내딛는 걸음마다 사이클 역사로 기록되는 그녀의 행보는 이제 도쿄 올림픽을 향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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