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성곽 돌아보기 - 흥인지문, 남산
에디터 : 쇠말패

흥인지문, 동대문 앞에서

"혼자 달리면 빨리 갈 수 있지만 멀리 가려면 함께 가야 한다."

자전거여행에 딱 어울리는 말이다. 여행에 참가하면 누구나 소임이 생긴다. 길을 안내하는 사람, 자전거 수리를 하는 사람, 먹거리를 챙기는 사람, 잔꾀가 많은 사람, 역사에 밝은 사람, 입담이 좋은 사람, 후미를 맡는 사람, 술 맛을 아는 사람, 힘이 달려 뒤처지는 사람, 어리버리한 사람, 어리석은 줄 모르는 사람,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 그림에 해박한 사람, 어학에 능통한 사람, 사람을 잘 사귀는 사람, 거추장스러운 사람.... 등등이 우리가 함께 지니고 나누는 소임이다.
혼자 달리지 않는 사람이 많이 모인 데가 쇠말패이다. 느리지만 함께 달리면서 콩알같은 행복을 쪼개어 나누는 사람들이다.

서울성곽  따라가는 자전거여행이다.
서울성곽은 조선 태조가 도읍을 서울로 옮기고 궁궐과 종묘, 사직단을 짓고 난 다음 쌓기 시작한 도성의 둘레이다.
풍수지리에 따라 왕족의 안위 뿐 아니라 도성에 기거하는 백성에 이르기까지 평화를 보장하고자 하는 염원이 서린 우리 전통의 성곽이다. 우리의 성이 다른 나라와 다른 점은 성의 규모가 엄청 크다는 것이다. 다른 나라의 성이 대체로 왕족과 귀족을 위한 규모가 큰 저택 수준이라면 우리의 성은 마을과 도시를 포함하여 만든 것이라 그 규모가 훨씬 넓다.
둘레 약 18km의 성곽을 자전거로 둘러보자고 나섰지만 도중에 자전거사고가 있어서 남산에서 그만둘 수 밖에 없었다.

동대문에서 북쪽으로 난 성곽의 모습


서울역사공원에 복원된 성곽의 일부


살곶이다리에서 10시 반에 모두 모였다.
안내에 첼로님, 후미에 오장군님, 늙은이에 흰늑대, 패기에 트리스탄, 홍일점에 바람개비님 그리고 새 손님에 인디고님.
인디고님은 인천에서 트리스탄과 함께 온 새 식구이다. 얘기를 나누다 보니 나와 쇠말패에 대한 내막을 속속들이 꿰고 있어서 오래 전에 만난 사람처럼 편안했다. 내 블로그와 카페를 반 년이나 숙독했다고 했다. 50대 중반의 튼튼한 다리와 준수한 외모가 그만이다.
살곶이다리에서 동대문으로 온 다음 차근차근 성곽을 따라 달렸다.

흥인지문(興仁之問)은 성의 동쪽에 있다하여 우리는 흔히 동대문이라 부른다.
동대문에서 남으로 시작하며 시계방향으로 성곽을 둘러볼 참이었다. 동대문운동장을 없애고 그 자리를 복원하여 땅에 묻혀있던 성곽의 일부를 복원한 모습이 보기에 좋았다. 광희문까지는 성곽 위에 어지럽게 주택들이 세워져 있었다.
성벽을 기초처럼 깔고 앉은 낡은 집들은 보기에 민망하였다. 광희문에서 장충동을 넘어가는 신라호텔 인근에는 보존이 잘 돼 있어 보였지만 아직도 뭔가 어설픈 게 많았다. 장충동에서 암문을 통과하여 남산을 올랐다. 동서로 난 산줄기에는 성곽이 그대로 살아 있었다. 남산 꼭대기에 있는 팔각정과 봉수대, 성곽은 일부 복원된 것이긴 하여도 그럴싸 한 것이 경관과 어울렸다.

광희문이 보이는 풍경





경고판이 붙은 벽은 성곽의 일부이다.

바람개비님이 장난삼아 솜사탕을 건네주었다.
첼로님의 안내를 받으며 서울을 배우는 낙도 만만찮은 데, 이 나이에 솜사탕을 깨물어 먹을 수 있는 허영은 어디서 온 것일까?
자전거 때문이다. 자전거는 내 혈관을 흐르는 또 하나의 기쁨인 것을 어쪄랴!
북창동에서 점심을 먹기로 하고 다운힐이 시작되었다.

다운힐에서는 내가 앞장을 섰다.
남산길 서쪽 출구를 벗어난 자리에서 뒤따르는 사람들을 기다렸다. 첼로, 트리스탄, 인디고님, 바람개비님까지 내려왔는데 오장군이 보이지 않는다. 그때 트리스탄에게로 전화가 걸려왔다. 오장군이 넘어졌다고 지나던 행인이 대신 전화를 해 준것이다. 되돌아 다시 남산을 올랐다. 급한 마음 때문인지 자전거의 속도 느리다.

신라호텔이 보이는 성곽 풍경


장충동고개에서 남산으로 올라오는 성곽


남산 중턱에 있는 성곽

남산 꼭대기로 오르는 서울 성곽



 이 나이에 솜사탕을 깨물어 먹을 수 있는 허영은 어디서 온 것일까?

내리막길 첫 번째 과속방지턱 옆에 오장군이 앉아 있었다. 안면에 피가 범벅이다. 그 잘 생긴 얼굴에 피가 묻어 있었다. 다리에 힘이 쫙 빠져 나도 털썩 마주 앉았다. 복받히는 감정을 추스리고 보니 다행히 염려한 것보다 가벼워 보였다. 119로 오장군을 태워 보내고 우리는 자전거로 한양대병원으로 갔다.
응급실에서는 봉합수술을 하고 있었다. 그의 아내가 옆에서 오장군의 손을 잡아주고 있었다.

봉합수술이 끝나고 오장군은 두툼하게 부은 입술에 모자라는 발음으로
다음 라이딩을 약속했다.

오장군이 아내를 보여주지 않는 것은 아내가 너무 예뻐서라고 우리에게 뻥을 쳤었다.
뻥인 줄 알았던 뻥이 뻥이 아니고 짱이었다. 아내가 평화를 몰고왔나 보다. 봉합수술이 끝나고 오장군은 두툼하게 부은 입술에 모자라는 발음으로 다음 라이딩을 약속했다. 오늘 못 먹은 왕돈까스를 그 때에 먹자는 것이다.
옆에서 그의 아내가 웃고 있었다.

머지않아 오장군과 이 여행을 마무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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