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천진, 미친 천사의 가이드
에디터 : 이호선

깊고도 험해 도무지 그 시커먼 속을 알길 없으며 뻔뻔스럽고 가증스런 서해바다를 건너 중국의 천진을 향해 달리는 진천해운(인천-천진)의 페리를 타기 위해선 반드시 거쳐야 하는 체력과 인내심 테스트가 있다.
"짧고 완만하게, 짧고 격하게, 그리고 길고 완만하게" 모든 승객들은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그들의 짐을 비장하게 부여잡고 높은 삼단의 계단을 심각한 그들의 호흡마저 까맣게 잊은 채 치열하게 오른다. 다행스럽게 단 한 명의 탈락자도 없이 통과절차가 끝이 난다.
많은 이들이 진한 담배연기와 함께 긴 한 숨을 토해내며 비로소 하늘을 우러러 미소 짓는다. 승객 중 많은 이가 보따리 장수들이다. 내가 북반구 세계일주 때 탔던 부관(부산-시모노세키)페리나 지중해를 건너는 페리는 이렇게 비인간적인 대접이 결코 아니었다. 승객들은 모두 에스컬레이터에 올라 정상적인 호흡과 느긋한 대화라는 여행자의 특권을 만끽하며 오를 수 있었다.

반갑고 정겨운 모습들이 점점 작아지더니 점이 되고 이내 나의 시야에서 완전히 잊혀지고 말았다. 끝내는 사랑스런 그들을 품고 있던 대지, 대한민국마저 나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며 잊혀진 전설이 되어 버렸다. 막무가내로 드리워지는 어둠의 장막과 함께 하늘과 대지는 하나가 되며 깊고도 넓은 우주의 공간이 되어버렸고 나는 아주 느긋한 스피드로 우주를 항해하는 '은하페리 999'의 승객이 되어 이만치 그만치, 그리고 저만치 우주의 또 다른 정거장의 불빛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진천 페리 안에서

페리의 객실에서 시작한 나의 심각하고 시급한 첫 일과는 바로 '버림'이었다. 나는 모든 가방을 열어 한 개 한 개 물품을 꺼내 살 빼기(무게 줄임)를 위한 '버림'의 철학을 비장하게 실행하기 시작한다.
얇은 두 권의 빈 노트와 세계지도의 조금은 두꺼운 겉장을 찢어 버리기도 하고 나에게 아주 소중한 품목인 약 보따리(설사약, 아스피린, 그리고 정로환)를 꺼내 4개의 병으로 들어있는 정로환을 쥐어 짜며 3병으로 만들고 한 개의 병을 휴지통에,……….
집착과 버림의 운명적인 치고 받음은 결코 끝나지 않고 계속된다.

24시간의 결코 짧지 않은 항해 끝에 5월 8일 저녁 8시 반경 내가 제 1번으로 하강하게 된다. 자전거가 여러 사람 피해를 줄 수 있기에.
승선 때 부적절하게 무리가 가해져 질려있던 근육을 조금씩 풀어 놓으며 마(魔)의 삼단계단을 필사적으로 기어 내려 와 나는 드디어 아시아 유럽대륙의 시발점인 천진의 땅 위에 엘파마와 함께 두 발을 내 딛었다. 약 3년 만에 다시 밟는 땅이다.

3년 만에 다시 밟은 천진의 땅

썰렁한 입국장으로 들어가니 역시 입국관리 모두가 우리 둘의 출현에 호기심 가득한 표정이다. 아니나 달라?! 자전거에서 분리된 나의 짐들과 자전거가 X선 투시대를 넘자마자 나의 자전거를 줄곳 쫓고 있던 스포츠 머리의 입국관리가 나의 자전거에 잽싸게 올라타더니 결코 넓지 않은 홀 안을 한 바퀴 돈다. 고개를 갸우뚱 하더니 또 다시 한 바퀴를 돌고 난 후에야 고개를 시원스럽게 상하로 흔들며 순순히 나에게 건네준다. 마치 통행세를 만족하게 받은 듯……. 어쨌거나 그의 흡족한 표정에 나도 덩달아 흐믓해 진다. 3년 전 북반구를 돈 세계일주를 위해 이곳으로 입국 했을 때도 한 입국관리가 나의 자전거에 막무가내로 올라 앉아 뭉그적대지 않았던가.

밖은 이미 어둠의 커튼이 내려져 있는 상태이기에 항구 근처에서 어슬렁거려 봐야 좋을 것 하나 없으니 이곳을 빨리 빠져 나가야 한다.
자, 나의 애창곡이자 앞으로의 대장정 동안 심각한 나의 행진곡이 될 '행진-전인권'으로 시작하는 거야.

[전인권의 행진 바로가기]

쿵쿵 짝, 쿵쿵 짝,............
나의 과거는 어두웠지만 나의 과거..............
그러나 나의.............
행진 행진 행진 하는 거야
행진 행진.......
............................
............................
............................
행진 행진 행진 하는 거야
동 서 남 해 물과 白頭山이 마르고 닳도록.......
오 대양과 안나푸르나가 마르고 닳도록.......
행진 행진 행진 하는 거야
행진 행진 행진 하는 거야

자, 나는 이미 대륙의 지도 위에 가늘지만 아주 선명한 나만의 선(線)을 긋기 시작했어!
나, 이 호선은 또 다시 이 세상을 향해 단독 선전포고를 감행 한 것이지.
나의 상대는 이 나의 상대는 이 지구, 이 세계이면서 결국 나 자신이 되지 않겠어?!!

그저 천진 시(天津 市) 방향만을 묻고 물으며 어둠을 박차고 달려간다. 중국의 모든 도시는 도로가 원심 형과 방사형이 뒤 섞여 있어 졸지에 미아가 되어 버리기 십상이다. 정신을 바짝 차려도 후들대는 곳이 바로 중국의 도시이다.
무엇보다 무차별로 쏴 대는 그들의 말을 도저히 알아 들을 수가 없다. 물론 영어는 단 한 마디도 통하지 않는 것이고. 나는 이번이 이미 두 번째이나 여전히 혼돈의 강속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다.
밤 10시가 넘은 시각, 길을 묻는 나에게 한대의 소형 SUV가 섰다. 30대 초반의 안경을 낀 청년이 아주 씩씩하게 내리며 나에게 달려 온다. 그는 그의 휴대폰에 내장되어 있는 자이언트(Giant) 자전거의 셔츠를 입고 있는 자신의 사진을 나에게 보여주며 자신도 바이크 족 임을 선언하고 나를 돕기로 작정을 한 듯 흥분하고 있지만 정작 단 한 치의 진도도 나가지를 못하고 있다.
그의 숨가쁜 설명도 나에겐 그저 공허한 웅웅거림일 뿐으로 우리는 그저 불통(不通)의 비통함에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다. 영어를 단 한마디도 하지 못하는 그가 갑자기 휴대폰의 숫자를 두들긴다. 영어를 조금 할 줄 아는 그의 친구와 영어로 대화를 해보지만 우리에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아 우리의 '불통의 골'만 깊어간다.

전혀 대화가 통하지 않자 미친 듯이 운전하며 길을 안내해준 미친 천사

미친 천사 운전자와 함께

갑자기 나를 따르라는 그의 손짓과 함께 그는 분연히 운전대를 잡는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그의 차를 뒤따른다. 얼마를 달린 후에 그가 갑자기 인도로 달리더니 구름다리, 육교 앞에 서는 것이 아닌가?!
마침 주변은 차량도 사람도 뜸하다. 기어를 1단에 놓는가 싶더니 육교의 계단을 타고 그의 SUV가 암벽 등반을 시작한다. 마침 계단의 높이가 얕다. 출렁출렁 삐걱 삐걱거리며 숨가쁘게 육교를 기어올라간다. 나도 씩씩 거리며 자전거를 등에 지다시피 힘겹게 끌고 올라간다. 그는 육교 위를 유유히 주행하더니 다시 반대편의 계단을 쿵쾅쿵쾅 덜컹덜컹 하면서 내려가 이윽고 그의 미친 쇼가 막을 내린다. 인도를 지나던 많지 않은 행인들은 지상 최대의 쇼를 숨 죽이며 관람하고 있다.

"크레이지!"
이건 또 뭐야?!
영어를 한마디도 못하던 그가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며 완벽한 영어로 '크레이지'를 연발하고 있지 않는가!
나는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만 하는가?! 그는 분명 이런 미친 짓의 초범이 결코 아니고 상습범이기에 '크레이지'가 자연스레 발음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는 나에게 길을 확실하게 알려주기 위하여 돌고 돌아야 할 길을 이렇게 마치 영화를 찍듯이 영화의 주인공처럼 가로지른 것이다. 이세상에는 수 많은 유형(類型)의 미친 이들이 있지만 이렇게 착하게 미친 이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종종 김빠지고 싱거워져 가는 세상에 때론 활력이 될 수도 있겠어.
나는 그 미치광이 천사덕분에 천진 시로 가는 메인 로드를 발견하고 도로변의 숲속에서 중국에서의 첫밤을 보낸다.
참고로 그의 이-메일주소는 Art-Armstrong@...   Armstrong은 바로 투르 드 프랑스의 7연패의 영웅, 랜스 암스트롱이다.

나는 그 미치광이 천사덕분에 천진 시로 가는 메인 로드를 발견했다.

도로변의 숲속에서 중국에서의 첫밤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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