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이 없는 천국의 화원
에디터 : 이호선


캐이(Kay)의 집에서 경이로움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고 시작에 불과하다.
약 한 시간이 지났을까, 그녀가 음식을 가져온다. 내가 이제껏 경험하지 못했던 대단한 정성이 들어간 요리로 그녀가 사용한 야채들은 모두 자신이 직접 재배하고 있는 자연식 채소들이다. 조미료라든가 일체의 인공가미가 없는 요리인데, 물론 내가 잔뜩 굶주려 있기도 하지만, 음식들은 그대로 꿀맛이다.
단 한가지 심각한 문제는 양이 엄청나다는 것이다. 최소한 2,3인분으로 먹어도 먹어도 반 이상이 남고 만다. 그녀는 자신은 살이 너무 쪄 움직이면서 조금씩만 먹는다고 하면서 전혀 먹지를 않는다.
갑자기 그녀는 전화를 받고 뒤도 안 돌아 보고 황급히 그 흰색 밴을 타고 사라진다. 단지 2-3시간 후에 돌아 올 것이라는 말만 남기고. 나는 잔뜩 불러 오른 배를 진정시키기에 고심을 하며 어슬렁댄다. 그녀의 예상대로 하늘이 그 인내심을 잃고 액션을 시작할 즈음에 그녀는 돌아왔다.

내가 이제껏 경험하지 못했던 대단한 정성이 들어간 요리가 시작된다.



그녀의 직업은 흰색 밴의 문에 써 있듯이, "크루 트랜스포테이션(Crew transportation)", -여기서 크루(Crew)란 철도기관사를 지칭한다.- 철도기관사 운송이다.
헌데 이것이 희한한 직업이다. 내가 이미 말했듯이 미국에서의 철도의 역할은 대단하다. 하루에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수 십 차례 100량 이상의 화물차량을 달고 화물열차가 달린다. 각 화물차량도 단층이 아니고 2층으로 한 개 화물차량이 콘테이너 박스 2개이다. 기관차는 한 대가 아니고 보통 3-4대로 앞에서 서너 대의 기관차가 일렬로 연결되어 끌 때도 있지만 앞에 2대가 끌고 뒤에서 두 대가 밀면서 가기도 한다.
내가 무인지경의 대륙을 달려 왔듯이 그들도 무인지경의 미대륙을 횡단한다. 열차 주행 중,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그 기관사를 구해주러 누군가가 달려가야 한다. 특히 내가 지금 달리고 있는 #2하이웨이와 함께 달리고 있는 북미횡단철로는 겨울철이 되면 엄청난 추위와 눈으로 유명하다. 겨울엔 더욱 빈번히 비상사태가 발생한다. 그 상황에서 그들을 구하기 위해 출동하는 이가 바로 캐이 아줌마인데 그녀는 아무리 눈이 와도 최소한으로 제설된 도로를 달려 그들을 구한다며 이미 8년 경력의 베테랑이다.

기관사들을 구조하는 일을 하고 있는 캐이의 흰색 밴

그녀는 농장과 철공소를 병행하던 부모님 밑에서 외동딸로 태어나 억세게 자랐다고 한다. 여자일 남자일 구별 없이 닥치는 대로 했는데 철공소일에도 천부적인 재질을 보여 자신의 아버지가 두손 들은 동네사람의 망가진 농기구를 자신이 직접 고쳐 본의 아니게 아버지의 뒤통수를 치는 불효를 저지르기도 했다고 한다.
대학에서 그녀는 언어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위한 특수교육학을 전공해 두 개의 석사학위를 딴 후, 수 많은 학교를 전전하며 퇴직할 때까지 36년간을 헌신했고 퇴직하자마자 이 기관사 구조대원이 된 것이다. 그녀는 올해 69세, 한국나이 70이다.
이런 강철녀(鋼鐵女), '캐이'에게도 한가지 아픔 아닌 아픔이 있다. 그녀의 부모는 이미 오래 전에 돌아가셨고, 그녀는 결혼을 결코 하지 않았다. 그녀는 물론 나를 포함한 이 지구상의 모든 다른 이들처럼, 이 지구상에서 60억 이상의 인간들과 함께 살고 있고 미국땅에서 2억 명 이상의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지만 역시 사람이 고픈 것이다. 그것도 아주 처절하게 말이다. 결국 그녀는 수년 전 불우한 두 명의 소녀를 양녀로 받아들였고 그들은 지금 콜로라도, 덴버(Denver)의 대학생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들의 그 누구도 그녀의 집이 있는 이곳을 단 한 번도 방문 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녀가 그들을 보기 위해 콜로라도에 갈 뿐으로…
나에게 내 준 오두막집(Cabin)은 분명 그녀의 두 수양딸을 염두해 두고 직접 지은 것임에 두말의 여지가 없다. 그녀가 온갖 정성을 쏟으며 나에게 만들어 온 그 대단한 요리들은 그녀가 그녀의 두 수양딸들에게 가장 해 주고 싶은 염원의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녀의 미소 속에 숨어 있는 처절한 외로움에 나는 가슴이 찢어진다. 불굴의 강철도 외로움을 이기지는 못하는 걸까?!

캐이는 자신은 조금씩만 먹는다고 내가 먹는 것을 구경만 하고 있다.

이 대량의 음식을 먹은 후가 더욱 문제이다.

집에도 화장실이 없고, 이 넓은 들판만 있을 뿐...

어쨌든 그녀는 엄청나게 바쁘게 살아간다. Emergency Call은 시도 때도 없지만 그녀는 어김없이 출동하고 있으며(그녀는 항상 2대의 무선전화를 휴대하고 있는데 하나는 서부(西部)용, 또 하나는 동부(東部)용 이라고 한다.) 자신의 전원을 가꾸고 또한 부모에게 물려받은 농장까지 관리한다. 그리고 틈틈이 글도 쓰고 있다. 그녀의 심정을 이해하고 있는 나는 그녀가 요리해 온 음식을 무슨 수를 쓰더라도 완벽하게 해 치우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Misson Impossible"이다.
나는 결국 하루를 더 묵기로 하지만, 그저 앉아 엄청난 양의 요리를 소화시키는 일은 정말 곤혹이다. 하지만 진짜 곤혹은 따로 있었다. 이 대량의 음식을 먹은 후가 더욱 문제이다.
한마디로 말해, '먹으면 싸야 한다'.
다른 것은 너무도 자상한 그녀가 나에게 배설에 대한 대책을 전혀 알려주지 않는다.
내가 은근슬쩍 그 대책에 대해 물으니 그녀는 태연하게
"그 문제는 네가 알아서 해결해! 마을 안 쪽으로 가면 공원에 공중변소도 있고 우리 정원도 있고 말이야,………"
정말 매정하고 아리송한 대답이다. 물론 작은 것은 아무 문제 없지만 큰 것이 문제인데,…………. 나는 더 이상 물을 수 없었다.

결국 나는 딜레마에 빠지고 만다. 오직 백인들만 있는 이 작은 마을에 갑자기 새까맣게 그을은 황갈색 인이 얼쩡거린다면,………
결국 나는 삽을 들기로 한다. 문제는 타이밍의 문제다. 그녀가 그녀의 집안에 진득하게 있기만 하면 아무 문제가 없건만 그녀는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집 주위를 돌며 집 안팎을 가꾸기 때문이다. 내가 그녀의 텃밭을 돌며 확인 해본다. 삽질하기에 아주 편하게 부드러운 흑토이다. 그렇다면 구멍을 파고 구멍을 메우는데 시간이 별로 안 걸린다. 문제는 쪼그리고 앉아 일을 보는 시간이 5-10분이다.
분명 대단치 않은 미션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바로 집 옆에 있는 작은 텃밭이라 키가 큰 그녀에게는 쉽게 포착될 수가 있다. 물론 내가 생각하기에 최악의 상황에 접하더라도 별 것 아닐 수 있다고 생각 되지만 그녀의 반응이 어떨지는 결코 예상할 수 없는 일이기에 귀신같이 해치우는 일이 상책이다.

드디어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첫 삽질을 산뜻하게 마무리졌다. 첫 삽질을 깔끔하게 해 치운 후부터는 조금은 여유가 생겼다. 참 묘한 것은 그녀는 내가 그녀와 만난 어제 이른 오후까지 왕복 3시간의 출동을 2번이나 했는데 오늘은 Call이 안 온다. 그녀가 출동을 하면 보통 서너 시간 걸리니까 혹시라도 음식 소나기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는 변수를 기대를 해 보겠는데,………
하여간 오늘도 아침부터 대량의, 하지만 끔찍하게 맛있는 요리가 줄지어 나온다. 그녀는 뒷 뜰의 테이블 위에 예쁜 테이블보를 펼치고 아페타이저, 메인, 후식 순으로 정확하게 서빙을 한다. 사용된 소고기 돼지고기도 제일 맛있는 부위였다. 그녀는 그저 앉아 맛있게 먹고 있는 나를 바라보며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그녀는 나를 위해 하루 종일 체리나무 장작을 뜰에 있는 화덕에서 태웠다. 나는 타고 있는 장작을 바라보며 평화와 아늑함을 느낄 수 있었다. 작년에는 시카고에서 밴쿠버를 향해 달리고 있던 80세 할머니 바이커가 이곳에서 이틀간을 묵었다고 하는데, 그녀는 혼자서 자신의 80번째 생일을 자축하며 캠핑장비를 자전거에 매 단 채 달렸다고 한다. 물론 그녀는 완주했다.
결국 오늘 캐이에게 Call은 없었고, 덕분에 하루 세끼 막대한 양의 음식과 치열한 씨름을 해야 했다. 무엇보다 나의 전천후 위가 정말 잘 견뎌주어 기뻤다. 구덩이 작업도 순조롭게 이어졌다.
두 밤을 자고 3일째 아침까지 그녀에게 Call은 없었고, 그 덕에 그녀는 떠나는 나를 위해 바리바리 싸준다. 너무 많아 내가 거절한 종목이 부지기수다. 나는 그녀에게 반드시 또 올 것을 약속하며 정말 꿈 같은 그녀의 오두막을 떠난다. 총 4개의 구멍을 파고 떠난다.

오늘 캐이에게 Call은 없었고,
덕분에 하루 세끼 막대한 양의 음식과 치열한 씨름을 해야 했다.



"Good Bye"라는 말에 눈시울을 붉혔던 캐이

"잘 있어요!"를 말하고 돌아서려는 순간, 안경너머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진다. 나의 가슴이 너무 아파 그녀의 볼을 살짝 쓰다듬는다. 금방 눈물이 굴러 떨어질 것 같은 그녀를 차마 더 이상 볼 수 없어 나는 단호히 뒤 돌아 선다.
맹렬히 달리던 나는 깜짝 놀란다. 갑자기 흰색 밴이 나의 앞을 가로지르며 갓길에 선다. 캐이다!
그녀는 내가 출발하자마자 Call을 받아 내가 곧 지날 하베이(Harvey)로 출동한다고 한다. 그녀는 마치 어린애처럼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나에게 "Good-bye!" 대신에 "See You again!"을 외치며 그녀의 길을 달려간다. 그러나 나는 결코 그녀를 다시 만나지 못했다.

나는 미국으로 들어오기 전 만났던 캐나다인 구급대원인 매트(Matt)가 준 앰뷸런스 마크를 나의 반바지 주머니에 항상 부적처럼 넣고 다닌다. 내가 행여나 무슨 사고를 당한다면, 그가 아니면 그 누군가가 나를 위해, 매트(Matt)가 나를 위해 불러 준 노래, 'Against the wind'의 가사처럼 바람을 가르며 달려와 나를 구해 줄 것 같은 믿음, 그리고 희망으로서 말이다.
나는 도로를 달리고 있는 동안 종종, 짙은 청색의 전투복과 전투화를 신고 출동태세를 갖춘 채 나를 위해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고 있는, 하지만 강도 높은 긴장감을 달래기 위해 줄담배를 피우고 있는 그의 모습이 나의 눈앞을 가로 막는다. 삶이란 때때로 이렇게 고강도의 긴장감과 심각한 상태에서 찬란하게 피어나기도 한다. 마치 고비사막의 모래 바닥 위에서 피어나는 찬란한 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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