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경찰과의 악연과 인연
에디터 : 이호선

밤새 비 속에서의 샤워
하늘은 잔뜩 인상을 쓰고 푹푹 찌던 날씨가 저녁이 되어 비가 오락가락한다. 주 경계를 30여 마일 남겨 놓은 지점에서 나를 가로 막는 작은 시, 마클(Markle)에서 주저 앉았다.
오늘 밤을 보낼 공원의 자리를 미리 봐 놓고 다시 시내로 나와 주유소 뒤의 지붕이 있는 휴식처에 앉아 있다가 건너편에 있는 리쿼스토아에 가서 캔맥주 한 통을 산다.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주인아저씨가 나에게 신분증을 보자고 해서 나는 실로 오랜만에 '파안대소'를 한다.
나를 '파안대소'하게 한 그에게 몇 번이고 감사를 하면서 맥주를 마셨다. 어둠 속에 공원으로 돌아 오자마자 하늘에 구멍이 뚫리듯 비가 사정없이 쏟아진다. 나는 공원 구조물의 지붕아래에서 비를 즐기고 있다가 화장실에 갈 필요도 없이 비속으로 뛰어나가 비로 샤워를 한다. 쏟아지는 빗속에 얼럴뚱땅 빨래까지 해버리고 텅 빈 공원에서 밤새 빗소리를 자장가 삼아 한 여름 밤을 보낸다.
평소와 다름없이 이른 아침에 눈을 떴지만 여전히 비가 쏟아진다. 아침에 한 번 눈을 뜨면 더 이상 잠을 못 이어가는 나는 결국 일어나 구조물 아래서 약 1시간 온몸에 땀 범벅이 되도록 운동을 하고 다시 비속으로 걸어나가 비의 샤워를 한다.
노곤한 몸이 되어 의자에 앉아 있다가 또 다시 잠이 들었다.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에 깨어 내다보니 날씨는 감쪽같이 활짝 개어 햇볕이 쨍쨍하다. 시계를 보니 12시다.

비 속의 샤워를 거듭했던 공원

웰컴투 오하이오

서둘러 구조물을 나와 눈을 부비며 태양의 세상으로 뛰어든다. 거의 일직선으로 동서를 달리는 224번 하이웨이를 달려 4시경 오하이오(Ohio)의 주경계를 넘는다. 첫 눈에 보이는 풍경은 여전히 '옥수수와 콩밭'!
하지만 길은 다르다. 포장된 갓길이 있다. 이것 하나로 충분하다. 몇 갈래의 길이 묘하게 엉켜있는 반워트(Van wert)에서 뺑뺑이를 치며 시간을 허비하는 동안 이미 어둠이 무섭게 대지를 뒤덮었다. 어둠 속을 무섭게 질주한 끝에 오토빌(Ottoville)시에 진입한다. 어둠 속에 발견한 공원이 영 시원치 않다.
동네 야구장 한 개가 고작인 공원의 구석에 작은 지붕이 있는 구조물 한 개와 화장실이 있는데 화장실의 바로 앞에 가로등 불빛이 너무 강력해서 내가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어쨌거나 화장실에서 평소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나의 은밀한 미션을 해 치우고 벤치 위에 누워 있는데 조용히 나를 향해 다가오는 순찰차.

당장 우리 마을을 떠나야 하겠어!
나는 벤치에서 일어나 앉아 담담히 그를 기다린다. 오하이오 경찰이다. 그저 의례적이고 통상적인 일이라고 간주하고 있던 나에게 의외로 신분증 제시를 요구한다. 여태껏 여러 번 경찰과 부닥쳤지만 결코 없던 일이다. 영 찝찝한 기분이지만 거역할 수 없는 일.
나는 가방 속 깊이 들어가 있는 여권을 꺼내어 건네준다.
'허어, 그저 그가 확인하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는 그것을 세워 놓은 순찰차로 가지고 가서 본국에 조회까지 한다!'
상당한 시간이 흘러서야 그는 나의 여권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돌려준다. 시각은 이미 새벽1시를 훌쩍 넘어 있다. 나는 서너 시간 벤치에 앉아 있다가 이곳을 떠나겠다며 선수를 친다.
내 주위를 두 어 바퀴 돌던 그가 걸음을 멈추더니,
"나는 네가 우리마을에서 어떤 문제도 일으킬 사람이 아니라고 믿고 싶지만, 너는 지금 당장 우리 마을을 떠나야 하겠어. Leave this town right now!(지금 당장 이곳을 떠나줘!)"
'크린트 이스트우드(Clint Eastwood)' 형님이 석양의 무법자로 나오는 웨스턴영화에서 보안관이 크린트 형님에게 내 뱉던 아주 익숙한 세리프!
"경찰나리, 이미 너무 어둡고 질주하는 트럭들이 무시무시하니 한 두어 시간 여기 앉아 있다가 갈테니 사정 좀 봐줘요!"
"7, 8 마일 더 가면 또 타운이 나오니까 그 마을에 가서 자든지 말든지 하시요!"
7,8 마일이면 약 15km이다. 트럭들이 거리낌 없이 달리고 있는 깜깜한 한밤중의 길을 달리는 것은 위험천만이다. 이런 상태에서 15km는 상당한 거리가 된다. 내가 떠날 때까지 나의 옆을 굳게 지키고 서 있는 그에게 짧게 "Bye!" 한 마디를 남기고 나는 이 타운을 떠난다.
나는 총은 커녕 과도조차 안 차고 있는데……, 물론 나는 미국의 초대손님이 아니지만, 그에게 나는 황야의 무법자임에 틀림이 없어. 까 놓고 얘기를 해서 떠돌이를 환영하는 곳은 이세상 어디에도 없잖아?!
"크린트 형님, 그저 떠나는 것이 상책이지요?!"

오하이오 주의 오토빌에서 보안관에게 추방당한 뒤,
처절한 기분으로 어둠과 안개의 새벽 길을 달리며

1983년 경찰과의 추억
나는 서해안을 따라 걷고 있다. 서울을 떠나 오산, 평택, 아산, 예산, 홍성, 보령을 거쳐 대천을 지났다. 차가운 바닷바람은 나의 얼굴을 할퀴듯 스쳐 지나간다. 귀가 떨어져 나갈 것 같이 춥다. 등에 짊어진 배낭은 쉼 없이 나의 어깨를 짓누르며 나를 고통스럽게 하지만 한 가지 나를 즐겁게 하는 것은 도로변에 간간이 나타나는 조그만 주막집으로 그곳에서 100원하는 막걸리 한 대접을 시키면 김치는 자연스럽게 따라 나오고, 운이 좋으면 밥 한 그릇도 거저 얻어먹는다.
하루 종일 걷다가 보면 몸은 지칠 대로 지쳐있어 막걸리 한 대접에 알딸딸해 진다. 이 추운 12월에 무거운 배낭을 등에 지고 도보 여행을 하려면 맨 정신으로는 못 간다. 조금은 알딸딸해져서 휘파람이라도 부르면서 가야 한다. '나그네'에 대한 '박 목월 님'의 시를 꼭꼭 씹어 삼키고 되새김질하며, 그리고 '윤 복희'씨의 절규에 가까운 노래 '나그네'에 온몸을 떨며 나는 걷고, 또 걷는다.

작자: 박 목월(朴 木月), 1917-1979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南道) 삼 백리
술 익은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막걸리의 약 기운이 서서히 떨어져 가면서 또 다시 통증이 고개를 들며 전신을 압박하기 시작한다. 지칠 대로 지쳐버리는 저녁이 되면 잠 잘 곳을 찾아 다닐 기력조차도 없다. 비록 12월의 날씨이지만 그저 쓰러지는 곳이 나의 방이다. 도로변의 나무 밑에서도, 폐쇄된 노인정에서도, 버려진 흉가인지(?) 폐가에서도, 초등학교의 교실 안에 들어가 자기도 하면서 걷기를 계속 한다.
여행용, 등산용으로 제일 만만한 신발, 군화(제대할 때 신고 나온 '세므워카')를 신고 이 길을 걷는다. 발바닥도 뒤꿈치도 다 까져 있다. 중간 중간 비포장의 도로가 나타나며 나의 발바닥에 끔찍한 고문을 해대지만 나는 운명처럼 걸음을 계속한다.
웅천을 지나고 있을 때 오토바이를 탄 경찰이 나의 행진을 가로 막는다. 나는 그의 앞 장을 서며 근처의 파출소로 직행해서 짧지 않은 검문을 받는다. 시외전화를 통한 본적지 조회만으로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아무 일 없이 끝난 듯하지만 나의 마음은 결코 그렇지 않다. 온 몸의 힘이 빠지고 아무런 의욕도 생기지 않는다. 그래도 또 심기일전해서 힘차게 기합을 넣는다.
울적한 나의 마음을 달래 주려는 듯 지나던 오토바이와 택시가 나의 앞에 서며 고맙게도 나를 위해 작은 자리를 마련 해준다. 마침내 나는 정오경, 파란 하늘과 밝은 햇살의 서천 읍에 도착해서 서천의 중심가를 두리번거리며 통과하고 있다.

M16 자동소총과 권총은 나를 겨누고 있다.
"꼼짝 마!!" 칼날같이 예리하고 단호한 명령이 나의 등을 뚫고 심장을 관통한다. 나는 정말 꼼짝하지 않았고 꼼짝할 수가 없었다. 서서히 그들이 나에게 다가온다. 나를 꼭지 점으로, 90도의 각도로 떨어져 서서 나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정복의 경찰로 M16 자동소총을, 또 한 사람은 사복 경찰로 나에게 권총을 겨누고 있다.
나는 두 손을 확실하게 든 채로 살금살금 움직이며 나의 신분증이 들어 있는 지갑을 그들에게 던진다. 권총을 든 사복의 사나이가 그것을 집어 들고 뒤적이기 시작한다. 한 참을 들여다보고 확인을 거듭한 그이지만, 그는 그 지갑을 나에게 돌려주지 않고 그가 소지 한 채 '따라오라!'는 간결, 명료한 명령을 나에게 툭 집어 던지고는 나의 앞장을 서서 간다.
또 한 명은 나의 뒤에서 자동 소총을 나에게 겨눈 상태로 나의 뒤를 따른다. 바로 길 건너에 서천군 경찰서가 있지 않은가! 경찰서 안에 들어가 나는 아주 철저하고 대대적인 조사를 받는다. 내가 가지고 있던 배낭과 배낭 안에 들어 있던 모든 소지품을 책상과 바닥 위에 적나라한 모습으로 조목조목 펼쳐 놓는다.
간첩이 체포되면 그가 소지했던 온갖 소지품은 조목조목 펼쳐져 품목의 이름표와 함께 전시되고 사진 촬영된다. 나의 모든 소지품은 적나라하게 까발려 진다. 이제부터는 본적지 조회다. 주민등록상의 주소인 서울시 서대문구 현저동의 나의 집과 주민 등록지 관할 동사무소, 그리고 본적지인 경기도 양주군의 면사무소 등 세 곳을 시외전화로 불러 확인을 하는 것이다.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두 시간에 걸친 이 작업으로 나는 이미 초죽음이 되어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똑같은 행색으로 경찰서를 나왔지만 나의 머릿 속은 이미 완벽하게 빈 깡통의 그것이 되어 내가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해야 할지를 전혀 모르는 상태가 되어 있다. 나는 그저 길거리를 하릴없이 왔다 가다 하다가 시장을 지나게 되고, 드디어 나의 심장을 두드리는 것, 노점 판의 막걸리를 발견한다.
한 되의 막걸리를 순식간에 삼키고 나니, 비로소 나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하고 죽은 듯 누워있던 머리의 세포들이 다시 살아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1983년 12월)

미국인들에게 그들을 표현하고, 선전하고, 장식하는데 '성조기' 하나로 너무 충분하다.

밤샘 달림, 알 수 없는 공원을 알려준 청년 커트
깊은 어둠과 자욱한 안개 속의 도로를 달려간다. 짙은 안개에 나와 엘파마는 이미 흠뻑 젖어 있다. 도로를 독차지 하듯 달리는 대형트럭에 진땀이 난다.
8마일을 달린 뒤 겨우 나타난 그랜빌(Granville)이지만 주위가 너무 어두워 동네공원이 어디 있는지 찾을 길이 없다. 열 받아 그대로 어둠 속을 달린다. 또 다시 어둠과 안개 속을 8마일 달리자 상당히 커 보이는 오타와(Ottawa)가 나타난다.
이미 새벽 4시를 넘은 시각이다. 한 잠도 못 자고 온 몸이 흠뻑 젖어 밤새 달려 온 까닭에 온 몸이 천근만근이다. 쥐 죽은 듯 고요한 새벽의 거리를 가로질러 걸어 오는 깡마르고 키가 큰 청년이 있어 그를 불러 세워 공원의 위치를 묻는다. 정말 그로테스크한 얼굴과 표정을 짓고 있는 이 청년, 커트(Kurt)는 30대 초반으로 독일계 미국인이라고 하는데 이 세상의 모든 걱정과 문제를 두 어깨에 가득 짊어지고 두 팔 가득 안고 있는 듯 아주 심각해 보인다.
공원의 위치를 묻는 나에게 너무도 형이상학적으로 설명을 해 나는 곧 혼미해졌다. 짧은 나의 스토리를 심각하게 듣고 있던 그는 엉뚱하게도 남북한 사람들의 생활이 어떤지, 제대로 사람답게 살고 있는지를 심각하게 묻는다.
'이 친구도 범상치 않은 친구야!' 나의 이름을 묻는 그에게 나의 이름을 말하자, 그는 정확한 스펠링을 요구한다. 나의 이름을 적고 있는 상당한 페이지의 메모장에는 깨알 같은 글씨로 무엇인가 빽빽하게 메모 되어 있었다. 그는 분명 '젊은 베르테르'의 초상, 아니면 '젊은 베르테르'의 유령?! 하여간 나는 그가 나에게 준 '형이상학'의 가르침을 증명하기 위해 어둠 속의 미로를 헤맨다.
"자슥, 지칠대로 지친 나를 이렇게 애를 먹일 수 있는 거야?!" 나는 결국 공원을 찾지 못했다. 나는 그저 평범한 것이 좋고 평범한 가르침이 좋다구!!
결국 나는 단 한 숨도 못 자고 달린다. 온 몸은 천근만근이고 온 뼈다구가 아프다. 하지만 '엘파마'는 어김없이, 밟으면 굴러가고 이를 악물고 힘을 주면 달려간다. 나는 결코 죽지 않아!


"아무리 힘들어도 학교 문 박차고 나가지 말거라!"
나이 들어 다시 시작하려면 그것은 허리가 휘는 고통이야!

또 다시 허리춤에서 곤봉을 빼어든 경찰과의 조우
224번 하이웨이위의 행진이 계속되는 가운데 작은 타운, 그린위치(Greenwich)가 애처롭게 나를 맞이 한다.
어쨌거나 오늘도 140km를 달렸어!! 작은 타운이지만 공원이 수준급이다. 나는 화장실에 들어가 나의 은밀한 작업을 하기 위해 화장실 입구 문을 닫고 예비동작을 하던 중,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어 빠른 동작으로 옷을 다시 입고 태연하게 화장실 입구 문을 연 순간, 이미 그의 허리춤에서 곤봉을 빼어 든 경찰이 화장실 입구 문 앞으로 들어 서고 있었다.
'으잉, 이건 또 뭐야?!!' 반드시 개방되어 있어야 할 화장실 입구 문이 닫혀 있다면, 이미 그 안에서 어떤 범죄가 시작되고 있다고 경찰은 믿어 의심치 않고 그 범죄행위를 분쇄하기 위해 곤봉을 빼 들고 뛰어드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누군가가 울부짖었잖아?! "Timing is everything!" 나는 태연하게 나의 전력을 간략하게 그에게 브리핑하고 이 공원에서 하룻밤을 보낼 수 있는가 하고 묻자, 굳게 잠겨져 있던 그의 입이 순식간에 함박 터지고 잡은 곤봉에 너무 힘을 주어 힘줄이 꿈틀거리고 있던 그의 손과 팔이 무안해 어쩔 줄 모른다.
대단한 덩치의 그였으나 정말 잽싼 동작으로 그의 곤봉을 원 위치시키고 천사의 미소로, "두 말의 여지가 없지요! 굿-나잇(Good-night)과 더불어 '굿-추립(Good trip)'하세요!"
그는 정말 나를 구했다. 하마터면 어제 밤, 오토빌(Ottoville)에서의 추방사건으로 이제까지 써놓은 따끈한 미국 이야기를 찰 고무로 사정없이 뭉게 버릴 뻔했기 때문이다. 나는 밤새도록 가느다란 사이렌소리조차 듣지 않고 죽은 듯이 잠을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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