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만에 돌아온 뉴욕, 인간애의 불모지
에디터 : 이호선

대단한 건물 아트

9년 만의 친구 스티브를 만나다
오늘 나는 약 50여 마일을 달려 혼스데일(Hornsdale)에 도착할 것이고, 그곳에서 나는 9년 만에 나의 친구, 스티브(Steve)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는 67세(한국나이68세)로 유태계 미국인이다.
나는 맨해튼에서 우연히 그를 처음 만났다. 18년 전 일이다. 그의 이력은 참 특이하다. 그는 보스톤의 한 대학에서 'Greek(그리스)'과 클래식 음악을 전공했고 그의 주특기는 작곡이다. 그는 유태인임에도 불구하고 수도원에서 10년 이상을 수도승 생활을 했고 이제는 선불교(Zen Buddhism)에 심취해 혼스데일(Hornsdale)의 집에 자신만의 선방을 만들어 놓고 수행을 하고 있다.
평생 결혼도 하지 않고 혼자 살아 오던 그는 맨해튼의 길에서 우연히 한국의 유학생, 준희를 만나 그의 스폰서가 되었다. 준희는 한국의 음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가난한 청년이었는데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혈혈단신 뉴-욕에 건너 와 힘겨운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스티브(Steve)는 그를 자신의 아들 이상으로 전폭적으로 뉴욕의 유명 사립음대인 메내스(Menace)음대와 대학원까지 밀어 주었다. 그는 스티브의 기대를 져버리지 않고 열심히 공부를 해서 지금은 2개의 석사학위를 가지고 피아니스트로서 많은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으며 주기적으로 맨해튼의 카네기홀에서 스티브가 작곡한 곡을 연주하고 있다.
스티브와 그는 부자지간처럼 사제지간처럼 벌써 20년 가까이 그렇게 살아 왔다. 내가 8년 전, 10년 간의 뉴욕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으로 들어 갈 때, 내가 그렸던 그림들의 대부분을 다 분쇄시키고 남은 작은 것들을 지금 내가 향하고 있는 펜실베니아의 혼스데일에 있는 스티브의 집에 남겨 두고 몸만 달랑 들어갔다.

혼스데일(Hornsdale)을 향해 달리 던 중, 갑자기 도로 앞을 가로 막으며 나를 세우는 거한의 제프(Jeff).
순간 나는 몽고의 울란바타르에 입성하기 전 만났던 거한의 몽골경찰을 떠 올렸다. 2m 가까이의 거한인 제프는 최근에 읽은 소설에 감동해서 자전거타기를 시작했다고 하는데……
그 소설의 내용은 결혼도 하지 않고 부모님과 살고 있던 40대 청년이 갑작스런 부모의 죽음에 슬픔과 무기력으로 일관하다가 오랜 세월 그저 벽에 걸려 있던 자전거(그가 청소년 때 열렬히 탔던)를 내려 뉴욕의 로드 아일랜드에서 시작해 미국대륙을 횡단 해 L.A에 도착한다는 이야기.
그는 나의 손을 잡고 있는 엄청난 크기의 그의 손에 잔뜩 힘을 주며, "당신 대단해(You're great!)"를 연발했다.



스티브의 집이 있는 혼스데일 입구

이른 아침 태미(Tammy)의 식당에서 노닥거리다가 많이 지체 되었지만 쉬지 않고 달린 덕에 오후 4시경에 혼스데일에 도착한다. 도로변 벤치에 앉아 있는 이에게 전화를 빌려 통화를 했다. 약 30분 정도 기다리니 스티브가 소형 SUV를 끌고 달려온다.
8년 만에 보는 그에게서 이젠 부정할 수 없는 세월의 비정함을 확인한다. 그 또한 나에게서 똑 같은 것을 확인하고 있을 것이다. 비록 만나지는 못했지만 준희의 최근 사진을 보니 시간은 정말 자전거를 타고 달린다. 20대 초반의 청년이 40세의 중년아저씨가 되어있었다.
8년 만에 돌아 온 그의 집은 변함없이 그곳에 서 있지만 여자도 없고 가꾸는 이도 없어 쇠락일변도의 길을 걷고 있다. 집안에 들어가니 집안 여기저기에 나의 그림이 걸려 있다. 8년 만에 나의 그림 앞에 섰으나 별다른 감회는 없다. 저것들을 그리고 있었을 때는 저것만이 인생의 모두라고 생각하며 살았었는데………

스티브의 집에 걸려 있는 내가 그린 유화

스티브와 나

내 인생의 10년을 책임졌던 뉴욕!
스티브와의 짧은 재회를 뒤로하고 나는 뉴욕 행을 서두른다. '엘파마'를 다그치며 동으로 그리고 동으로. 드디어 펜실베니아의 마지막 시티, 밀포드 타운(Milford town)에 작별을 고하고 길지 않은 철제 다리를 건너자 뉴저지(New Jersey)! 정말 힘겨운 코스였다.
주경계를 넘어 또 한 개의 언덕배기를 넘자 정말 오랜만에 평지가 눈앞에 펼쳐진다. 얼마 만에 달려보는 평지인가?! 하지만 가파른 언덕배기가 다시 나타나며 이미 겉돌고 있는 나의 다리를 춤추게 한다.
하지만 뉴저지는 작고 짧아.
냅다 밀어 부치면 끝나 버릴 거야.
뉴저지의 가운데인 모리스(Morris)에 들어서니 그 동안 줄 곳 백색으로 일관 해 왔던 주위풍경이 노랑, 갈색, 검정의 다양한 그것이 된다. 곧 도로변에 나에게 충분히 익숙한 한글 간판들이 나타나며 나를 감탄시킨다.
"아, 드디어 올 때까지 왔구나!"
동으로 달려가면 달려 갈 수록 도로들의 차선이 늘어나고 그 위를 달리는 차량은 더블, 트리플로 많아지며 '엘파마'의 혼을 뺀다.
세카우커스(Secaucus)를 지나자 멀리 지평선 위로 맨해튼의 긴 빌딩숲이 아련히 이어진다. 내 인생의 10년을 책임졌던 뉴욕! Secaucus에서 전철을 타고 허드슨 강을 건너기 위해 어둠 속의 허드슨 강 속으로 잠수를 한다. 어둠 속의 항해는 결코 길지 않았다. 곧 맨해튼이 눈부신 태양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다.

웰컴투 뉴저지

드디어 뉴욕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어

뉴저지의 시카우커스에서 멀리 지평선상에 가물거리는 맨해튼의 마천루

허드슨 강을 넘어 맨해튼의 32번가 펜역(Penn station)

뉴욕에 있었을 때, 2년 반 몸담았던 SUNY(State University of New York)의 하나인 FIT(Fashion Institute of Technology)-26th ST & 7th Ave에 소재.
이 주립대학을 가기위해서는 옛날 Tofel 점수로 550이상을 받아야 한다. 다른 사립미대인 Parsons나 Pratt, 그리고 SVA는 500이면 충분했다.
주립대는 사립대 등록금의 절반이었기에 나는 FIT에 목을 걸었다. Tofel의 의미조차 몰랐던 나는 4개월간 매일 New York Times를 사서 하루 종일 사전 없이 소리 내어 읽기를 계속한 끝에 경이로운 숫자 557 점을 얻어 FIT의 미술학부에 입학했다.



뉴욕은 그야말로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
32번가 펜(Penn)역의 출구를 나오자마자 하늘이 안 보이게 빽빽하게 늘어서 있는 야자수 나무아래 수 많은 사람들과 차량들이 사나운 파도처럼 나를 덮친다.
"Welcome to New York City!"
오늘은 토요일이라 도시는 수많은 관광객들과 더불어 말 그대로 '인산인해(人山人海)'. 정말 발 디딜 곳을 한참 찾아야 할 판이다. 그 동안 인적도 없는 숲 속과 밀밭, 그리고 옥수수와 콩밭을 헤매고 고작해야 수 백 명, 수 천명에 불과한 타운, 시티를 전전하던 나에게 뉴욕은 그야말로 '아비규환(阿鼻叫喚)' 그 자체였다.
나는 잠시 가로등에 의지한 채, 어지러움과 혼돈 속에 곧 잃어 버릴 것만 같은 나의 정신을 두 손으로 단단히 붙들고 있어야 했다. 그래도 나는 지금 내가 뉴욕에 다시 돌아 와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즐겁다. 이곳은 내가 결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아주 심각하게 살았던 곳이 아닌가!

'인간애'의 불모지 뉴욕
우선 맨해튼을 장악하고 있는 많은 한국인 식료품 가게에 발을 멈추며 그 동안 까맣게 있고 있었던 한국과 한국인을 재발견하고 재확인한다. 하지만 밴쿠버에서부터 미국대륙을 건너는 동안 대륙횡단 바이커인 나에게 따스한 마음과 뜨거운 포옹을 아끼지 않았던 많은 이들이 보여 준 뜨거운 관심과 인간애의 불꽃은 이곳에선 더 이상 타고 있지 않다.
삭막하고 텅 빈 불모의 고비에서도 인간애의 꽃은 찬란하게 피고 있었지만, 풍요로 넘치고 꽉 찬 도시에서 인간애의 꽃의 씨가 움틀 땅은 없는 듯하다. 모두가 그 콘크리트와 아스팔트 때문이다.

뉴욕에 오면 어쩔 수가 없어. 이곳에 와선 한번 눌러야...



나는 수 많은 인파와 차량, 그리고 살인적인 뉴욕의 소음을 뚫고 42번가의 타임스퀘어(Times Sq.) 전철역을 향해 터덜터덜 걸어간다.
'엘파마'도 어깨가 축 늘어진 채 헐떡거린다.
"그래, 우리는 너무 지쳤어. 서울을 떠난 지 벌써 4달 가까이 되잖아. 그 동안 중국과 고비를 넘었고, 밴쿠버 아일랜드를 일주하고 미국까지 횡단해 버렸으니,…"
"나의 몸이 강철이 아닌 것처럼 '엘파마', 느그 몸도 순(純) 무쇠가 아니잖아?!! 우리에겐 휴식이 필요 해!"
우리는 퀸즈(Queens)행 7번 전철을 타고 내가 10년 동안 살던 61번가 우드사이드(Woodside)로 향한다. 하늘을 달리는 7번 열차를 타고 철도 주변의 풍경을 내려다 본다. 8년 만이지만 전혀 변함이 없는 모습이다. 61번가 우드사이드 역과 주변의 풍경도 전혀 변함이 없고, 심지어 가게 주인들까지 변함이 없다.
적지 않은 수의 '아이리쉬 펍(Irish Pub)'들도 여전히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아이리쉬 흑맥주인 '기네스(Guinness)'의 진한 향기가 나의 코를 요동시킨다. 내가 자주 가던 한국인 슈퍼의 사장님도 여전하다.
세상의 시계바늘이 숨가쁘게 돌아가는 동안, 이곳의 시계는 오래 전에 그 움직임을 멈춘 듯하다. 나는 서둘러 내가 10년 동안 살았던 지하 방이 있는 한국인 소유의 이층집으로 향한다. 지하실에는 3개의 작은 방과 공동 화장실, 그리고 부엌이 있었다. 그 집의 현관은 도로변에 있었지만 지하실 방으로 통하는 입구는 건물의 뒤편에 있었다.
그 지하실은 완전 지하로 하루 종일 거의 빛이 들어 오지 않았고 무슨 일이 바깥에서 일어나고 있는 지 결코 알 수가 없었다. 하루 종일 잠자기에는 지상 최고의 장소였다. 나는 학교와 일터에서 돌아와 집 건물을 돌아 지하실 입구의 깊은 계단을 걸어 내려가 두터운 나무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갈 때마다 무덤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는 착각을 종종 했다.

저를 기억하시겠어요? 네, 그런데요?
나는 그 지하실의 주방 앞에 있던 테이블과 긴 소파를 기억해 내고 당장 2,3일 동안만이라도 신세를 질 수 만 있다면?! 하는 생각으로 이렇게 걸음을 재촉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일본 뿐만 아니라 뉴욕에서도 오랫동안 굴렀지만 나에게 그 어떤 친척이나 가족은 어디에도 없었다.
어쨌거나 10년이나 살아 정이 든 그 집의 주인 아저씨와 아주머니를 8년 만에, 그것도 49일 동안 미국을 횡단해서 다시 만난다는 기쁨에 나는 그저 가슴이 벅차다. 비가 뿌리기 시작하지만 아무러면 어떠랴!! 나는 익숙하기 짝이 없는 그 집의 문을 두드린다.
그 집에는 2개의 문이 있다. 한 개는 바깥 쪽의 철문이고 또 한 개는 일상적인 현관문이다. 문을 열고 나오는 주인 아줌마는 언뜻 보기에도 예전과 별 다름이 없다. 나의 얼굴이 햇볕에 새까맣게 그을러 있기 때문에 그녀가 혹시 나를 식별 못할 것을 염려해 간단한 나의 소개와 함께 내가 여기 지금 서 있는 경위를 설명했다. 그녀는 나를 가로 막고 있는 철문을 열어 줄 일말의 의지도 없이 나와 최대한의 거리를 유지하며 나를 노려보듯 바라보고 있다.
"아주머니, 저를 기억하시겠지요??!"
"예, 그렇군요, 그런데요?!"
"………………………………………"
나는 얼굴의 표정이 전혀 없이 유령처럼 서서 말하고 있는 철문건너 그녀 앞에서 마치 예리한 면도날이 나의 심장을 가르며 지나가는 듯 온 몸을 떨고 있다.

가는 빗 속에 천천히 걷다가 나의 발이 멈춘 곳은 한국인이 사장인 야채과일가게. 내가 있었던 10년 동안 2,3일에 한 번씩 야채 과일은 물론 맥주까지 사 갔던 곳인데, 내가 올 때마다 주인아저씨와 아주머니, 그리고 20대 후반의 아들 딸들과 긴 대화를 나누었던 가게이다.
내가 10년 간의 뉴욕 체류를 마치고 한국에 귀국한 지 얼마 안되어 나는 부산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이 야채가게의 아들이 한 전화로 결혼식을 부산에서 하는데 와서 축하해 주지 않겠냐는 내용이었다.
나는 뉴욕에서의 10년간의 정 하나로 전날 밤 친구와 밤새도록 술을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에 맞추려 새마을 호를 타고 서울에서 부산까지 내려가서 그를 축하했다.
남매 중 유일한 아들의 결혼식에 너무도 기쁘고 흐믓한 표정으로 손님들을 맞이하던 그의 아버지, 어머니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나는 전날 밤 마신 대량의 술과 열차 안에서의 수면부족으로 산 송장이 되어 결혼식이 끝남과 동시에 피로연조차 참가하지 않고 그대로 서울행을 서둘렀다.

도대체 누가 그곳에 자전거를 두라고 했어?
역시 그들은 여전히 이곳을 지키고 있었다. 주인아저씨와 아주머니는 일찍 퇴근하시고 그의 아들과 며느리가 가게를 지키고 있었다. 며느리조차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알아보고 놀란다. 며느리는 나에게 맥주 한 통을 건네 주었고, 비록 누추하지만 오늘 밤은 우리 집에서 자라며 나를 감동시킨다.
나는 그 아들에게 가게 창고 구석에 며칠 자전거를 놓고 들락일 수 있을까 하고 부탁을 해 본다. 아들은 자신의 어머니와 전화통화를 하더니 '불가하답니다'라고 하며 오늘은 어쩔 수 없으니 창고 안에 자전거를 들여놓고 가게 뒷 편에 있는 대형 쓰레기통들이 놓여 있는 곳에서 박스종이를 깔던지 해서 주무시든지 할 수는 있지만 가게 안은 안 된다고 못을 박고 퇴근한다.
내가 그곳에 가 보자 명당자리는 이미 노숙자 3명이 선점해서 잠을 자고 있다. 간간히 비까지 뿌린다. 이리저리 뭉게 보려 하지만 대형냉장고용 대형송풍기까지 있어 뜨거운 열기가 나의 숨을 가로 막는다.

야간에 가게를 보는 한국인 유학생과 시간 죽이기를 계속했다.

결국 나는 잠을 포기하고 가게 안에 들어가 야간 캐셔인 한국인 유학생과 시간 죽이기를 계속해 보지만 하루 종일 페달 질을 한 나에게 밤을 꼬박 새운다는 것은 거의 고문에 가깝다. 결국 나는 새벽 4시 반경에 창고 안의 '엘파마'옆에 쪼그리고 앉아 졸다 깨다를 계속하던 중, 캐셔가 나를 흔든다. 주인아저씨와 아주머니가 출근하셨다고 한다.
나는 서둘러 '엘파마'를 창고에서 끌어 내 밖으로 나온다. 오랜만의 재회에 웃음을 지으며 인사하는 전혀 무방비의 나에게 그녀는 강력한 라이트 훅을 정확히 나의 명치끝에 찍는다.

"당신 도대체 누구냐?!! 도대체 누가 그곳에 자전거를 두라고 했느냐?!!" 그녀는 펄펄 뛰며 절규하듯 소리친다.
전날 밤, 그의 아들이 그의 어머니와 전화통화를 할 당시 아들은 나의 이력과 자초지종을 이미 다 기술한 상태였다.
"……………………………………"
나는 무방비로 허용한 그녀의 강력한 라이트 훅에 나의 내장이 꼬이면서 거의 인사불성의 상태로 숨을 헐떡거리며 링 위를 구르고 있을 뿐이다.
"지금 당장 여기서 나가요, 내 아들놈은 마음이 참으로 약해서 큰 탈이야. 내가 그렇게 다짐을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
내가 서둘러 나가면서 그녀의 건너 편에 서 있는 주인아저씨를 바라다 본다.
"빨리 나가요!"
"……………………"
서둘러 나오는 데 그녀가 카운터에서 뛰어나오면서 소리친다.
"잠깐 거기 서 봐요!"
그녀는 나에게 달려 오더니 자전거 옆에 달려 있는 가방을 열어보며 가방 안을 체크한다. 창고 안에 있는 것이라곤 맥주 박스 뿐이었다. 그녀는 이미 제 정신을 잃고 헐떡거리고 있는 나를 향해 최후의 일격을 가한다. 가물가물해져 가는 나의 의식 속에 그의 아들 결혼식장 앞에서 기쁨과 흐뭇함의 흐드러진 웃음을 보이던 두 분의 모습이 어지럽게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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