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길에 추락, 숨을 쉴 수가 없다.
에디터 : 이호선

노인과 아가씨는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을 뿐
아침 6시경에 비로소 나는 제 정신으로 돌아 와 침대에서 일어나지만 쏟아지고 있는 비에 주춤거리다 8시경이 되서야 비로소 여관을 나온다. 다음에 나타날 시가 Tamazunchale인데 길의 고도가 점점 높아지고 고불고불한 산길이 이어진다.
조그만 마을을 지나다 'Panaderia(빵집)'을 발견하고 발을 멈춘다. 사장님인 듯한 노인이 그저 멍하니 도로를 바라보며 입구에 앉아있다. 안에 들어가니 종업원인 듯한 한 아가씨가 의자에 앉아 입구의 노인과 한 치의 다름도 없이 공허함을 응시한 채 아침인 듯 점심인 듯 식사를 하고 있다.
두명 중 그 어느쪽도 나의 방문을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침묵과 공허만이 실내를 흐른다. 이런 시골에 살고 있는 그들에게 나와 같이 대륙을 횡단하는 국제바이커는 그들의 살아 생전 한 번 볼까 말까 한 희귀한 나그네임에 틀림이 없다는 생각이 충분히 드는데 그들에겐 그 어떤 호기심이나 관심이 전혀 없다.
그 노인은 그가 평생 그래 왔듯이 습관처럼 운명처럼 멍하니 대상 없는 허공를 변함없이 응시하고 있을 뿐이고 그 아가씨 역시 자신의 앞만을 노려 본채 행여 음식을 씹지 않고 넘기는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하며 확실하고 정확한 어금니 운동을 계속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 세상에는 이상주의자들이 많이 있듯 이렇게 감정의 동요, 즉 감동(感動)이 전혀 없는 지독한 현실주의자들 또한 많다. 그들의 사전(事典)에 새로움이나 색다름, 그리고 공상이나 꿈 이야기의 낱말은 결코 들어있지 않다. 그들은 자신만의 원칙의 울타리를 쳐놓고 그 어떤 색다름을 일축하고 냉소하며 독설을 마다 않는다.
인생살이에서 감동이 없다면 이를 악물고 머리 싸 메고 더 오래 살려고 발버둥 칠 필요가 없지 않아?!
오래 산다고 뭔가 더 보고 뭔가 더 느낄게 없지 않아?!!
빵 봉지를 들고 나오는데 두 사람 공(共)히 고맙다는 소리는커녕 시선조차 돌리지 않는다. 그들 대신 나의 입에선 한 숨이 연방 터질 뿐으로………

시골의 한 식당


식당에서 일하고 있는 그들은 두말이 필요없는 멕시코 토종 아가씨들이다.

계속되는 언덕과 비
계속되고 있는 언덕 길이지만 미국의 펜실베니아 州의 그것처럼 직벽의 오르막길이 아니고 완만한 경사의 오르막길이 산중턱을 따라 빙글빙글 돌아가며 계속되고 있다. 갓길이 전혀 없는 여유없는 산악 도로이지만 다행스럽게도 도로경사가 2,3도 정도여서 자전거에서 내릴 필요 없이 계속 오를 수 있다.
문제는 바로 비인데 상당한 고도의 산이라 산 중턱엔 예외 없이 안개가 아닌 비구름이 걸려 있다. 이 비구름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종잡을 수 없이 비를 뿌려 댄다.

이 산악도로에는 커브길이 엄청 많은데 이 커브의 반경이 무시무시할 정도로 짧다. 여유 있는 빙글 빙글이 아닌 숨막히는 뱅글 뱅글로 비까지 합세하면 다리가 후들거린다. 여전히 85번 국도이기에 차량이 끊기지 않고 계속된다. 비에 젖은 55km의 산길을 정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달린 끝에 산 꼭대기에 있는 Tamazunchale 시의 입구를 통과한다.
입구를 통과하자 바로 중심가로 통하는 긴 내리막길이 나를 열렬히 환영한다.




나와 엘파마는 이미 통제력의 한계를 넘어
눈앞에 산 중턱 높이 펼쳐지는 산속의 시가가 너무 신기하고 예뻐 한 장의 사진을 생각하고 이미 상당한 속도로 내리막길을 내달리고 있는 자전거의 브레이크를 잡는 순간, 비에 살짝 젖어 있는 도로 위로 미끄러지며 나와 엘파마는 이미 통제력의 한계를 훌쩍 넘어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며 죽음의 활강을 시작한다.
하지만 자유분방한 활강은 결코 길지 않았다.
내가 이제껏 여러 번에 걸쳐 자전거와 오토바이사고를 당하면서도 번번히 감쪽같이 태연하게 다시 일어섰지만 이번만은………

사이렌 소리가 나의 귀를 심각하게 울린다.
왼쪽 머리와 어깨, 그리고 왼쪽가슴부위 모두를 완벽하게 아스팔트에 부딪혔다.
대단한 충격이었다.
갓길이 없는 도로이었기에 뒤 따르던 여러 대의 차가 놀라 급정거를 했고 나는 도로 위에서 뒹굴었는데 숨을 쉴 수가 없어 헉헉대며 숨 통이 터질 때까지 이리저리 구르고 기었다.
도로변의 사람들이 나에게 달려왔다.
그들에 이끌려 도로변으로 옮겨졌지만 여전히 숨을 쉴 수가 없어 땅 위에서 뒹굴었다.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상황이지만 사이렌 소리가 나의 귀를 심각하게 울린다.

Tamazunchale 시의 입구의 내리막 길을 달려 내려가다가 당한 최악의 사고.
물론 나를 향해 달려 온 많은 사람들이 전화를 했겠지만
앰뷸런스는 정말 놀라울 정도로 빨리 내 옆에 왔다.

구급요원은 병원에 가야 한다며
드디어 나의 눈에 뭔가 보이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앰뷸런스였다. 2명의 구급요원이 나에게 달려와 나를 부축하며 나의 상태를 묻는다. 어깨와 가슴부위를 심하게 부딪쳤고, 왼쪽 머리통엔 비록 작지 않은 산이 생겼지만 비교적 약하게 부딪혀 정신은 말짱하다.
내가 사고의 모든 순간 순간을 모두 기억 가능하니 말이다. 문제는 어깨와 가슴부위의 심각한 통증으로 아직도 숨을 쉴 수가 없다. 두려움이 전신을 엄습한다.
내 자신, 있는 정신 없는 정신 모두 동원해서 찬찬히 나의 몸의 상태를 점검하나 전혀 알 수 없고 자신이 없다. 구급요원 중, 대장 격인 로베르토(Roberto)는 병원에 가야 한다며 나에게 심각하게 묻는다. 내가 선택의 경계선 위에서 망설임에 망설임을 거듭하고 있는 가운데 그가 묻는다.
"너 여행자 보험 있느냐?"
그제서야 모든 것이 명료해지며 나는 단호하게 대답을 한다.
"나는 괜찮으니 그냥 돌아 가세요!"

이제껏의 나의 인생 사전(事典)에 올라 있는 보험이란 '국민 건강보험'뿐이다. 무보험이 나의 선택의 첫 번째 이유이고, 두 번째로 병원에 간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치명적이다. 병원은 어쩌면 나의 이번 세계일주여행에 종지부를 찍음을 의미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없는 병도 생기는 곳이 병원이고 병원에 가면 사람의 마음은 약해지고 무너지기 십상이다. 나의 결정이 옳은 것인지 정신 나간 짓인지는 지금 이 순간부터 차츰차츰 내 자신이 뼈에 사무치도록 알게 될 일이지만, 단 한가지 나 자신에게 냉엄하게 물어야 한다.
"호선아, 너는 네가 죽는 그날까지 지금의 선택을 결코 후회하지 않겠는가?!"
"결국, 너는 너의 최후의 순간까지 어떤 의심 없이 너 자신을 믿어야 한다, 그 어떤 고통의 대가를 지불할지라도 말이다."

나는 엄청난 통증과 더불어 한 동안 숨을 쉴 수가 없어 도로 위에서 뒹굴고 기었지만
앰뷸런스요원의 도움으로 다시 일어섰다.
나는 생존의 환희를 노래했고 모기 눔 스키들을 제외한 이 지구촌의 모든 식구들과
생존의 기쁨을 함께 하고 싶다.

뼈가 금이 가 있을 것 같다
나는 앰뷸런스를 돌려 보내고 길바닥에 앉아 다시 한 번 온 정신을 집중해서 내 몸의 왼쪽부위를 조심스레 체크해본다. 그리고 나의 한계를 심각하게 묻는다. 나의 한계는 어떤, 나의 생각이나 예측만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좀 더 구체적이고 확실한 동물적인 본능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나의 많은 사고 경험으로 미루어, 왼쪽 어깨와 팔에 힘을 줄 수 있다는 것은 비록 금이 갔을 수는 있어도 뼈가 부러지지 않았다는 것이며 아직도 호흡이 힘들고 기침이 불가능한 상태이나 이것은 시간이 해결 해 줄 것이다. 비록 통증의 강도는 심하나 뼈가 부러졌을 때의 통증은 또 다르다. 통증의 정도로 보아 몇 군데의 뼈가 금이 가 있을 것 같다.
이제 모든 것은 나 자신의 의지에 전적으로 달려있다.
내가 가고자 하면 가는 것이고, 내가 주저앉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자, 일어나 가는 거다. 그리고 나를 믿을 것이며 믿는 이상 죽음까지 완벽하게 믿을 것이다."
여태껏 항상 그래 왔듯이 나를 위한 만세 삼창을 하자.
"나는 용가리 통뼈다!"
"나는 강철이다!"
"나는 티타늄이다!"

1989, 자전거 사고의 추억
나는 지금 시간에 쫓기며 나카노(中野)를 지나 니시 신주쿠(西 新宿)를 향해 맹렬한 질주를 하고 있다. 저녁 5시에 호텔에서의 알바를 시작하기 전, 복싱체육관에 가서 '한 스파링(Sparring)'하고 싶기 때문이다. 나카노를 지나면서부터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일본은 좌측통행으로 운전대가 오른쪽이다. 차도를 따라 바람처럼 달려 내려간다. 교통량이 많아 항상 막히는 구간으로 오른쪽엔 차들이 줄줄이 늘어서서 신호 대기 중이다.
"꽝!"
순간, 나는 한 마리 새가 되어 창공을 향해 치솟아 오른다. 나의 기억은 그 곳까지다. 영원처럼 긴 잠에서 비로소 깨어나 눈을 떴을 때, 나는 하늘을 날고 있는 것이 아니고 어이없게도 승용차의 지붕 위에 대자(大字)로 엎어져 있는 게 아닌가?!
"도대체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 난 것일까??!"
어쨌거나 내가 지금 당체 믿기 어려운 차 지붕 위에 엎어져 자고 있을 때가 아니잖은가?!! 내가 어기적 대며 엉금엉금 차 지붕에서 기어 내려 오자, 죽음 같은 얼굴을 한 안경을 낀 30대 후반의 사나이가 유령처럼 서 있다. 이 내리막길에는 조그만 골목길이 있고, 비록 신호등은 없지만 반대차선에서 신호대기 중 우회전을 해 골목길로 달려 들어오는 승용차와 내가 충돌을 한 것이다.
나는 늘어서 있는 차들 때문에 그 차의 진입을 전혀 볼 수가 없었다. 내 자전거가 조수석의 문을 들이받는 순간, 나는 차 지붕으로 날아 올라간 것이다. 차문은 움푹 찌그러져 열리지도 않고, 나의 자전거의 앞 바퀴는 도저히 형체 파악이 안 될 정도로 '니빠빠눌라'가 되어 있다. 대책 없이 부서진 차 문만 보더라도 나의 속도가 어느 정도였다는 것을 충분히 증명하고도 남는다.
'잠깐, 우리가 지금 이 상황에서 부서진 차 문과 '니빠빠눌라'가 된 자전거의 앞 바퀴에 그저 입을 벙긋 벙긋 하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정작 이 상황의 키 포인트는 차 지붕으로 날아 올라 간 조인(鳥人)이잖아?!!!'
정말 놀랍게도 나는 완벽하게 무사하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서술어도 이 상황엔 가당치 않다. 그저 '억세게 운이 좋았다' 하나로 너무 충분할 뿐이다.
누구의 잘잘못을 따질 것도 없이 그는 나에게 그의 지갑을 몽땅 털어 4만 엔을 주고 갔다.(후지 로드용 새 자전거의 가격이 2만 엔이다.) 결국 나는 복싱체육관에 가서 '한 스파링'하려던 나의 심각한 계획을 찰 고무로 싹싹 지워버렸다.(1989의 어느 여름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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