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의 고통은 리얼하게 시작된다.
에디터 : 이호선
"아 참, 엘파마! 엘파마야, 너는 살아 있는 거야?!"
나는 정신이 번쩍 들며 황급히 일어나 도로변에 그야말로 자유분방 대자(大字)로 뻗어 있는 엘파마를 향해 달려간다. 핸들이 뱅글 돌아가 있고 왼쪽에 매달려 있던 가방이 오른편으로 넘어가 엉켜있어 혼란스럽다.
나는 조심스럽게 '엘파마'의 구석구석을 체크한다.
역시 '엘파마'는 주인을 닮아 용가리 통뼈였다. 체인이 빠져 있을 뿐이다.
"어이, '엘파마'! 너 참 기특하고 대견하다. 하지만 고비사막에서 당나귀 운운하며 투덜대던 그 4개의 가방이 없었다면 너는 그 무엇처럼 두 동강이 났을지 몰라. 4개의 가방이 너에게 확실한 에어백이 되어 준 것이야. 나는 비록 만방으로 깨졌지만 네가 이렇게 건재하니 한 숨 놓이는구만."

내가 사고를 당한 Tamazunchale 시, 물론 산중턱에 있는 고산 도시다.

어깨와 가슴에 통증이 심해 '엘파마'를 움직이기도 벅찬 지경이지만 그래도 가야 한다.
조금도 변함없이 2-3도 경사의 고불고불 오르막 산길이 이어진다. 또 다른 산속의 자그만 시인 차풀후아칸(Chapulhuacan)을 5km정도 남기고 도로변에 서 있는 Seguridad Municipal(市 안전기관)의 순찰차가 서 있다.
아델라이도(Adelaido)라는 40대 후반의 사나이는 Policia Municipal(시민경찰)로 문제가 있는 시민들을 돕는 시공무원이다. 옆 좌석에 앉아 있는 그의 아내, 프란시스카(Francisca) 또한 시공무원이고 그의 아들, 에마뉴엘(Emanuel)은 영특하게 생긴 10살의 아들이다.
아델라이도(Adelaido)는 집에 돌아 가는 길에 나를 발견하고 시보레 대형 픽업트럭인 순찰차의 짐칸에 나와 나의 자전거를 태워 줄 요량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비록 나는 사고후유증으로 쓰러질 지경이지만 단호히 폼 나게 거절하고 달린다.
단지 5km이지만 경사진 산길이라는 조항이 붙으면 그 내용이 아주 상당히 달라진다.
"어, 이건 또 뭐야?!" 아델라이도의 순찰차가 나를 그냥 지나쳐 가버리지 않고 천천히 나를 따라 온다. 몸은 아프고 지칠 대로 지친 나를 마치 고문이라도 하듯 시시각각 나를 쫓는다. 길 바닥에 쉴 새 없이 욕을 내 뱉으며 이를 악물고 입술을 깨물며 역주한 끝에 시 입구가 나타나고 나는 비로소 안도의 숨을 토해 낸다.

나를 위한 앰뷸런스가 발진했던 시 소속 응급센터.


시민경찰, 아델라이도와 그의 아내 프란체스카, 그리고 그의 아들, 엠마뉴엘.
뒤엔 그의 시보레 대형픽업 순찰차.

오늘 우리집에서 묵지 않을래요?
갑자기 아델라이도와 그의 아내, 프란체스카가 나에게 다가오며 오늘 저녁 자신의 집에 묵지 않겠냐는 꿈 같은 제안을 한다. 나의 고집스런 5km 역주에 그들이 감동을 먹은 걸까?!
그 누가 감동을 먹지 않겠어?!
잘 생각해 봐 봐!!
지구가 쪼개지는 그 날까지 이 멕시코 산골 마을에 글쎄,…
몇 명의 나 같은 대륙횡단 바이커가 지나 가겠는가?!
그들의 호의를 일축하며 당당하게 달려가는 나를 보고 감동 안 한다면 그눔 스키는 사람도 아니지!!


아델라이도의 장모 집에서의 만찬과 그의 매형의 줄줄이 자녀들(총원 8명).

너 몇 살이냐?
산골에 있는 마을답게 숨이 턱에 차게 가파른 골목길을 엉기면서 오른 끝에 그의 집에 도착한다. 곧 그와 아내, 그리고 그의 아들은 이것 저것 요리에 필요한 재료들을 하나씩 손에 들고 집을 나선다. 그들의 뒤를 따르며 행선지를 물으니 같은 동네에 있는 그의 처가 집이라며, 그 곳에서 저녁을 먹을 거란다. 그 곳에서 또 한 참을 진땀 흘리며 기어 올라 그의 처가 집에 도착한다. 정말 하늘에서 가장 가까운 집들 중에 하나임에 두말이 필요 없다.
그의 매형, 에우세비오(Eusebio)가 장모가 함께 살고 있는데 에우세비오에게는 거의 연년 생인 8명의 아들 딸이 있다. 한마디로 아비규환의 현장이지만 아들 딸 모두가 수려한 용모에 영특하게 생겼다. 당체 뭐가 뭔지 정신이 하나도 없는 상황이지만 나는 예외 없고 어김없이 확실하게 먹고 그들의 집을 나온다.
어깨 가슴의 통증에 합세한 터질 듯이 팽창한 위의 치받음으로 나의 숨쉬기 운동은 거의 한계다. 나는 아델라이도의 순찰차를 타고 문제가 있는 몇 군데의 집을 잠깐씩 방문해 체크-업을 끝낸 뒤 집에 들어온다. 돌아오는 차 속에서 그는 불쑥 나에게 묻는다.
"너 몇 살이냐?"
"51인데………"

일순, 착하고 평화스럽기만 하던 그의 얼굴에 번개가 치며 심각하게 굳어진다.
난데없이 나이는 왜 물어가지고 잘 나가던 좋은 분위기에 찬 물을 끼었는거야?! 비단 너뿐만 아니야, 아델라이도! 이제껏 세계여행을 해 오면서 많은 이들이 꼭 지금의 너처럼 안 물어도 될 질문을 해가지고 서로에게 어색하고 뻑뻑한 분위기를 만들곤 했지.
그래서 나는 그 누구에게도 절대 나이를 안 물어. 그대들 마음 편하게 젊은 시절에 이 짓을 했어야만 했는데 말이야. 그 점에 대해선 참 내 자신이 후회스럽지만 난들 이 나이에 이렇게 외롭고도 험한 세계여행을 하고 싶었겠어?!!
나이 50을 몇 발자국 앞에 두고 나는 내 자신의 인생을 심각하게 생각해 보게 되었지.
"자, 여지껏 내 삶의 모든 것을 미련 없이 뒤집어 까고 털어내 봐 봐! 털리는 것이라곤 별것도 없이 먼지 부스러기들에 불과해. 두 손으로 움켜지고 입으로 물고 흔들 만큼의 대단한 것이 결코 없지 않은가?! 그토록 심각하게 이를 갈며 달려들었던 순간순간들이었는데 말이야……
결국 나는 진정한 '나의 절규'를 듣지 못하고, 진정한 '나'자신을 보지 못하고 주위를 둘러보고 두리번거리며 여태껏 살아오지는 않았는지?!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거나 주저하지 않겠어. 나 자신의 절규, 나 자신의 염원인 자유의 창공으로 이왕이면 난이도가 높은 역모션의 멋진 번지점프를 할 거야. 억세게 운이 없어 로프 끈이 끊어져 대지를 뒤흔드는 강력한 추락사를 한다 할지라도,……"


사고 때 부딪힌 몸은 진정 리얼한 고통이 시작된다
자, 이제 나보다 한 살이라도 젊은 그대들이 나를 너그럽게 이해 해주오!!!
멕시코에 와서 놀란 사실은, 멕시코의 경제수준으로 보아 당치도 않다고 생각됨에도 불구하고, 멕시코인의 대부분이 미국의 대형 픽업트럭을 태연하게 운전하고 다닌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니 미국의 대형픽업트럭을 선호하는 캐나다와 마찬가지로 멕시코도 원유생산국이잖아?!
하지만 물가가 우리나라와 거의 비슷하게 나가니 놀란 만하다. 그 동안 일주일이상 멕시코의 시골을 달려 오면서 겪은 일이지만 중국, 네팔, 인디아의 그것과 별로 다를 바가 없는 풍경임에도 물가는 선진국수준이다. 미국달러 당 멕시코 페소의 환율이 1: 12이다.

아델라이도의 옆 방의 큰 침대를 독차지 하고 누워 있지만 사고 때 부딪힌 머리부터 전신이 아프다. 내일 아침부터 진정 리얼한 고통이 시작될 것이다. 숨통은 터져 숨을 쉴 수는 있어 다행이지만 아직 기침을 할 수 없고 옷을 벗고 입을 수도 없다.
더 큰 문제는 누울 수가 없고 가까스로 누우면 일어날 수가 없어 소변을 보고 싶어도 일어날 수가 없다. 결국 신음 속에 이리저리 뒤척이다 금 쪽 같은 밤을 송두리째 날려 보내고 말았다.

끔찍한 비소리가 다시 시작된다
아침이 되어 침대 위를 요리조리 굴러 겨우 일어나지만 문밖으로 끔찍한 소리가 나를 슬프게 한다. 비가 또 엄청나게 쏟아지고 있다. 망연자실 침대 위에 앉아 있는 동안, 항상 그래 왔듯이 고요가 다시 찾아 왔다.
9시경 정말 웬수처럼 무겁게 느껴지는 엘파마를 겨우 집 밖으로 끌어내고 사랑스런 그들을 뒤로 하지만 나의 앞길이 아득하게 멀기만 하다. 종잡을 수 없이 비가 쏟아지는 이 산속의 도로를 도대체 얼마나 더 달려야 할 것인가?!
첩첩 산중이 내 눈 앞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나의 마음 또한 이미 첩첩 산중이다.
자 가자꾸나! 그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야.

아델라이도가 살고 있는 또 하나의 고산 시티인 차풀후아칸(Chapulhuacan).

터덜터덜 걷는 것조차 만만치 않다
헌데 오늘은 날씨가 최악이다. 비안개가 도로와 도로주변을 완벽하게 뒤 덮고 있다. 갓길도 없이 좁은 산악도로가 짙은 비안개로 뒤덮인다면 그것은 분명 최악이다.
드디어 하늘의 횡포가 시작된다. 쏟아진다, 그것도 줄기차게 쏟아진다. 나의 몸 상태는 이미 욕을 내 뱉을 기력도 없다. 도저히 움치고 튈 수가 없는 함정에 걸려든 느낌이다. 이젠 두통에, 온 몸에 열까지 오른다.
너무 힘이 들어 자전거를 끌고 터덜터덜 걷지만 그것조차 결코 만만치 않다. 또 다른 산골마을인 하카라(Jakala)를 10km정도 남겨놓고 비는 산을 기어코 무너뜨릴 작정인지 세차게 쏟아진다.
어둠은 이미 나의 몇 발자국 앞까지 와 있다. 그래도 운 좋게 산골의 작은 슈퍼의 지붕을 방패 삼아 서서 하늘의 횡포를 묵묵히 응시하고 있을 뿐이다.
도대체 어째야 하는가?! 주위를 둘러보지만 나의 은신처가 될만한 곳은 없고 그저 숲과 사방으로 넘쳐흐르는 진저리 나는 물뿐이다.

또 다른 고산 시티인 하카라(Jakala)를 향해 달리다가 나의 길을 막는 '인자함' 그 자체인 할아버지, 로돌프(Rodolpo)씨.
그는 놀랍게도 음료수라도 사 먹으라며 나에게 20 페소를 건넨다. 내가 그 동안 많은 나라들을 여행하면서 우리나라보다 못사는 나라의 사람으로부터 돈을 받아보기는 이번이 처음으로 상당한 감동이었다.



슈퍼 앞에 한 대의 포드(Ford)픽업트럭이 서고 30대 후반의 사나이가 내려 빠른 걸음으로 뭔가 사가지고 다시 차로 돌아 온다. 그에게 이 주위에 호텔이 있는가를 물으니 역시 10여km 떨어진 하카라까지 가야 한다고 한다.
그가 돌아간 지 얼마 안되어 빗줄기가 약해진다. 여기서 마냥 어물정 대고 있을 상황이 결코 아니지. 나는 다시 우비를 입고 죽기살기로 산길을 달리기 시작한다.
빗속의 산골짝 길 10km는 지옥같은 거리이다.

픽업트럭 뒤에 타세요!
1km정도 달렸을까 말까 한 지점에 조금 전 슈퍼 앞에서 만났던 픽업트럭이 서 있다. 바로 그 지점에 그의 집이 있었다. 바로 그 순간, 그, 아눌포(Anulpo)와 한 여자가 집에서 나와 픽업트럭 안으로 들어가다 나를 발견하고 나를 반긴다.
그는 내가 향하고 있는, 150여 km떨어져 있는 파츄카(Pachuka)의 장인 집에 간다고 한다. 옆의 여성은 그의 부인이고 내일이 장모의 생신이라고 한다. 그는 나만 좋다면 자신의 픽업트럭에 나와 자전거를 태워 우리 공동의 목적지인 파츄카까지 달리겠다고 의기양양이다.
그의 제안은 정말 눈물 나게 고마운 것이지만 지붕도 없는 픽업트럭 위에서 2시간 정도를 비바람에 두들겨 맞았다가는 나는 더 이상 살아남기 힘들어. 나의 몸은 이미 죽음 일보 직전이야.
그는 나를 하카라의 한 여관 앞까지 데려다 주는 은혜를 베풀고는 흘러 넘치는 미소를 남긴 채 사라졌다. 나는 단지 10km의 승차였음에도 비바람에 시달려 이미 초 죽음이 되어 있었다.

하카라(Jakala)를 10km정도 남기고 어둠과 쏟아지는 비의 함정에서
나를 탈출시켜 준 아눌포(Anulp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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