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코, 우리는 천생연분 같이 살아요!
에디터 : 이호선

멕시코 도로의 고도가 워낙 높다 보니 산과 산을 건너는 다리의 높이가 끔찍하게 높다.

연일 계속되고 있는 오르막 길에 하루 100km달리기도 힘겹다. 산등성이의 7,8부 능선을 따라 달리는 이 도로들의 중간 중간 다른 산등성이로 건너기 위해 다리가 등장하는데, 한결같이 다리의 높이가 수 십m에 이른다. 다리 밑을 내려다 보면 정말 오금이 저린다.
다리가 통과하는 구간은 상당히 강한 횡단 기류가 있어 아차 하면 수 십m아래로 날아 갈 지경이다. 종종 다리들의 난간이 자전거의 바퀴 높이보다도 훨씬 낮아 난간 가까이의 갓길을 달려야 하는 나는 오로지 아찔아찔할 뿐이다. 정말 힘겨운 코스이지만 주위경관은 또 반복하지만 장대(壯大)!! 산은 똑같은 산이되 한국의 그것들과는 근본적으로 생성지형이 다르다.

4일 동안 468km를 달려 와하카(Oaxaca)州(멕시코는 연방제다)의 주도인 와하카에 도착한다. 이미 어둠 속에 완벽하게 포위되어 있는 와하카 市의 초입에서 170페소의 싼 여관을 발견한다. 어제 저녁에도 도로변의 끊겨진 철망 아래로 기어 내려가 진흙 바닥에 텐트를 쳤으나 왼쪽 어깨의 통증으로 밤새 뒹굴기만 했다. 오늘은 부드러운 침대에서 기필코 잠을 자야만 하는데……



아침 일찌감치 여관을 나와 태평양에 면해 있는 산토 도밍고(Santo Domingo)를 향해 달려간다. 그 동안 넉넉했던 도로가 갓길도 없는 궁색한 국도190으로 바뀌며 나를 괴롭게 한다. 내가 사고를 당한 북부 지역의 도로와 똑같이 좁고 고불고불한 오르막길이 계속되고 있다. 그래도 비는 오지 않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갓길이 없기에 나는 나의 생존을 위해 흰색라인 위, 아니면 흰색라인 안쪽을 달려야 한다. 그러다 보니 차량의 운전자들과 치열한 신경전을 벌이며 달릴 수 밖에 없다.
내리막 길을 달려 내려 갈 때면 거의 목숨까지 거는 모험을 감행해야 한다. 흰색라인 밖으로 나가버리면 벼랑에 쳐 박히기 십상이고 흰색라인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 왔다간 차량에 밟혀 끝내는 앰뷸런스 뿐만 아니라 화장장 행 버스까지 타야 할 판이다.

고속도로 공중화장실 앞에서 나와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나를 무작정 기다리다, 긴 기다림을 이겨내기 위해 끝내 생각지도 않은 자신의 승용차 청소까지 감행 해야 했던 오스카(Oscar)와 그의 아내.
나는 그의 기다림을 전혀 모른 채 화장실에서 큰 일을 본 후, 머리를 감고 면도를 하고 빨래까지 하고 있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며 나를 기다렸을까?!
"이 사람이 똥통에 빠졌나?!"




수 십km를 달려도 인가 한 채 보이지 않는 오지산골이다. 도로변에는 비록 철조망은 쳐져 있지 않지만 모두 낭떠러지의 비탈이라 야영지 물색이 쉽지 않다. 필사적으로 낭떠러지 위의 선인장 숲에서 작은 공간을 빌려 텐트를 친다. 어둠 속에서 텐트를 치다가 무심코 잡은 나뭇가지마다 수 많은 가시들이 눈물이 찔금 나올 정도로 따갑다.
발 밑의 한 참 아래로 계곡을 흐르고 있는 물소리는 정겹지만, 소리 없이 다가와 나를 들볶고 있는 '하루살이'급의 작은 모기들은 정말 지겹고 신물이 난다. 모기 뿐 아니고 점 같이 작은 무수한 날벌레도 나의 피를 귀신같이 뽑아 간다. 어둠의 숲 속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든 상관없이 장승같이 서 있는 선인장 위로 총총한 별들이 아름답기만 하다.

산토 도밍고(Santo Domingo)를 향해 다가 갈 수록 정말 뜨겁다. 온 몸을 태워 버릴 듯 태양은 이글거리는데, 바람은 나와 '엘파마'의 멱살을 휘어잡고 흔들다 도로변 골챙이에 업어치기로 집어 던질 기세다.
동쪽의 멕시코 산악지대의 공기와 서쪽의 태평양의 공기가 분명 사이 안 좋게 만나고 있음이다. 어쨌거나 수 많은 풍력발전용 바람개비가 겹겹으로 서 있다. 이젠 낮이나 밤이나 더워서 텐트를 치고 잘 수가 없으니 이곳의 일상적인 풍경처럼 해먹(Hammock)을 치고 자는 수 밖에 없는데, 해먹을 쳐도 역시 숲 속으로 들어가 두 나무 사이에 쳐야 하니 결국 모기의 포위망에 걸려 들겠지. 그럴 바엔 역시 다리 밑이다.
다리 밑에서는 하늘의 심술에 신경 쓸 필요가 없으며 자연 욕조에 오랫동안 내 몸을 푹 담글 수 있고 빨래도 가능하다. 또한 다리 밑에는 보통 다리를 가로지르는 강한 바람이 있어 모기들이 맥을 못 추곤 한다. 한 마디로 일석사조다.

도로를 달리면서 도로를 가로질러 흐르는 아주 맑은 작은 강들을 수 차례 넘었다. 강에는 많은 이들이 민물고기들을 잡기 위해 모여 있곤 해서 그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어두운 시간에 맞추어 다리로 들어가는 수 밖에 없다.
물은 똑 같은 물인데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물과 대지 위를 흐르고 있는 강물은 악마와 천사, 지옥과 천국의 두 극단적인 모습으로 나에게 다가온다. 대자연의 자연욕조 속에 몸을 던지는 순간, 몸과 마음 속에 잔뜩 엉겨 붙어있던 땀과 먼지들이 일순에 씻겨 나가며 나의 온 몸은 비로소 생존의 기쁨에 치를 떤다.
물속에 온 몸을 담그고 하늘의 '저 별과 달'을 바라보고 있으면 결코 움직이거나 물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은 심각한 상황에 직면하고 만다. 그저 물 속에 수박이나 던져 놓고, 그것을 깨 먹으며 푹 퍼져 버리고 싶을 뿐으로 생각 만으로 이미 마른 침만 안타깝게 삼킬 뿐이다.
아침에 일어나 자연욕조 속의 달콤함이 못내 아쉬워, 다리 위로 달리고 있는 많은 출근 차량 들 속의 의아한 많은 시선들을 완벽하게 무시한 채, 나는 또 다시 강물 속에 몸을 던진다.

멕시코의 전통술인 메스칼(Mezcal) 주조공장.

기계가 아닌 전통적인 방법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이 술은 도수가 우리 소주의 3배, 즉 60도라고 하는데 뒷맛이 깔끔하다.
대외적으론 '테킬라(Tequila)'가 유명하지만 국내적으론 역시 '메스칼'이라고 한다.



또 다른 영세 '메스칼' 주조공장. 사장님은 자나깨나 술에 절어 있는 듯하다.
오전 11시도 안된 이른 시각이건만 눈의 초점은 흩어져 있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되풀이 하고 있다.
사장님의 아드님이 자신들이 만든 '메스칼'을 쬐그만 표주박 잔에 따라 나에게 건네 마셔보니 한 모금에 확 올라온다.
하지만 건네주는 또 한 잔의 메스칼도 냉큼 집어삼켰다.(공짜라잖아?!!)


도로주행 중 자주 만나는 연방경찰(Policia Federal)이나 군인들.
그들은 한결같이 사진 찍히는 것을 경계한다. 그들은 자신의 신분이 노출되어 어떤 테러의 타깃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겨우 그들의 등판을 찍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지구상의 수 많은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자연 그 자체인 멕시코도 쓰레기 공포의 예외가 될 수 없다.
대책 없이 버려지고 태워지고 있다.


땡 볕과 미친 바람 속에 힘겨운 주행을 거듭하고 있는 가운데 산토 도밍고를 얼마 안 남기고 작은 市인 타파나테펙(Tapanatepec)의 외곽 도로변에 있는 작은 식당에 정지한다.
차가운 콜라라도 한 잔하며 땀을 식히고 싶다. 아직 오후 4시로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7시 반경까지 상당한 시간이 남아 있다. 콜라를 마시려 의자에 앉았는데 바로 옆의 테이블에는 중년 남녀와 두 웨이츄레스가 앉아 캔맥주 '모델로(Modelo)'를 마시고 있다.
중년 여자는 이 식당의 사장이고 중년 남자는 이 식당에 식자재를 납품하고 있는 사람이다. 식당이 문을 연지 단지 8일 째라고 하는데, 오늘은 식자재 납품업자가 매상을 올려주려고 작정을 한 날 같아 보인다.

내가 콜라를 다 마시기도 전에 그는 맥주 한 캔을 나에게 건넨다. 나는 맥주를 무척 좋아하지만 이 여행을 시작한 후로 내가 사서 먹은 맥주는 단 한 병, 한 캔도 없다. 오랜만에 삼키는 맥주 한 모금에 나의 온 몸이 벌떡 일어나 앉으며 어리둥절해 하지만 이내 묘한 눈빛과 야릇한 미소와 함께 온 몸을 비튼다.
깡통이 비어질 새 없이 또 다른 깡통이 내 눈 앞에 서 있다.
'어떻게 할까?! 하나 더 삼키고 나면 더 이상 움직이고 싶지 않게 될 텐데…'
다행스럽게도(?), 나에게 주저와 혼란의 시간은 결코 길지 않았다. 욕구의 손은 예외 없이 이성의 손보다 한 수 빨라 나의 뇌가 상황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깡통은 이미 따져 있다.
'에이, 나도 모르겠다. 나는 이미 또 다른 여행을 위한 열차를 타고 말았어. 자, 가 보자구, 달려 가는 거야!'


남자 2명, 여자 3명이 쉴 새 없이 마셔댄다.
식당 주인은 나에게 오늘 밤 자신의 식당 안에서 자면 된다고 하며 허리띠 풀고 먹고 마시기만 하라는 경고 아닌 심각한 경고를 날린다. 나는 하룻밤 여관비 200 페소(2만원 상당) 중, 100페소를 맥주 값으로 또 다른 100페소를 두 여 종업원에게 50 페소씩 내 놓고 본격적으로 술판에 합류한다.
27세의 여 종업원인, 유리코 나카무라(Yuriko Nakamura)는 자신의 할아버지가 일본인으로 토종 멕시코인과의 혼혈이다. 그녀가 아주 어릴 적에 할아버지는 일본으로 돌아가 버려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도 거의 없는 듯하고 일본어는 단 한 글자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동양적인 모습으로 다소 곳 하다가도 순간적으로 다혈질적인 중남미 인으로 돌변한다.
춤 얘기가 나오자 그녀의 온 몸은 이미 아카풀코(Acapulco) 비취의 파도를 타고 때론 부드럽고 때론 격렬하게 흔들린다.
그녀는 나의 왼손의 손금을 보더니 자신의 것과 똑 같다며 서로의 손바닥을 마주치고 "우리는 천생연분, 같이 살아야 한다!"를 소리 높여 힘차게 힘차게 부르짖는다.


'자, 이쯤에서 페달 질 멈추고 패티 김의 "서울이여 안녕"을 불러버려?!'
'나의 외로운 여행이 드디어 여기서 막을 내리는가?!'
'아니, 잠깐만! 그러면 '바이크매거진'은?!  또 앉으나 서나, 그리고 자나 깨나 나를 걱정해주고 손바닥 발바닥이 닳아 피가 나는 것도 모른 채, 한결같이 '삼삼칠(337)' 박수를 쳐 주시고 계시는 나의 독자님들은?!!'
'에이, 골치 아파, 술이나 마시자구!!'

"유리코, 너는 나에게 최고의 여자고 나는 이 세상 최고의 행운아가 되는 거야. 자, 우리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뽀뽀?! 결혼식?! 가만있자,……….그러고 보니 내가 너에게 만취해서 깜박하고 잊은 것이 있었네 그려! 그게 말이야,……뭐냐 하면 말이야…… 내가 이 세계 여행을 끝내기 위해서는 20개월 정도가 더 필요한데 그때까지 나를 기다려 줄 수 있겠어?!!"
"!!!……………………"

일본계 멕시코 여인, '유리코(Yuriko)' 와 술로 굳게 맺어진 술판 동지들.
"마시자, 마셔버리자!!"

우리 두 사람을 비롯해 모두를 숨 가쁘게 했던 긴박한 상황이 의외로 명쾌하게 종료 되었다.
결국 술판은 9시경에 끝나고 납품업자는 자신의 차에 여주인과 두 종업원을 태우고 떠났다. 떠나기 전에 유리코는 나의 노트 위에 스페인어로 "너의 성공적인 여행을 기원하고 하루 빨리 이 곳에 돌아오라!"는 메시지와 더불어 나의 입술 위에 그녀의 것을 확인 도장 찍듯 지긋이 누르고 사라진다.
나는 식당 안의 바닥에 비닐을 깔고 잠을 잤는데 옆의 해먹에는 식당을 청소하고 관리하는 한 노인이 자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테이블주위도, 내 머리 속에도 수 많은 맥주의 잔해들로 어지럽기 짝이 없고 텅 빈 맥주병들과 깡통이 되어 버린 나의 마음 속으로 외로움과 허무함이 노도처럼 밀려 들어온다.
언제나 그렇듯이 술과 함께 떠난 여행의 종착역은 어지러움과 허무함이지. 어제 밤, 남녀 5명이 마신 술 깡통이 50개, 그리고 작은 맥주병이 28개다. 멕시코 인들은 그들의 든든한 의붓 형제인 미국인들처럼 맥주를 엄청 사랑하고 억수로 마신다.
그들의 맥주 '코로나(Corona)', '테카테(Tecate)', 그리고 '모델로(Modelo)'는 그들의 맥주 아닌 음료수가 된지 오래다. 일하는 도중, 음료수로 마시고 있는 것이 바로 맥주인데 맥주를 마시고 태연히 일을 하고, 또 태연히 운전을 하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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