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B가 풀리고, 스포크가 부러지고
에디터 : 박규동

1996년 9월 8일(日) 쉼터에서 야영(윌캐니아 142km전)
                     야영 → 야영(윌캐니아 142km전)

06:30 4℃ 맑음
아침식사 식빵,스테이크,계란후라이,야채,우유
07:30야영지에서 출발
08:30휴식 13℃ 맑음
09:30휴식 오렌지쥬스 15.5℃
10:40-11:45식사 도로옆 윌캐니아 205km전방 식빵,계란후라이,스테이크,야채
12:33휴식 19℃
13:25휴식 파워바 21.5℃
14:25휴식 오렌지쥬스 22℃
15:10휴식 오렌지쥬스,식빵
15:50-16:20박규동 자전거의 B.B나사가 풀림.수리 후 출발
17:05휴식 파워바
17:55쉼터에서 야영
윌캐니아 142km전방 남위:31°33.5′동경:144°37.6′
저녁식사 된장국,스테이크,밥, 짱아치,야채

최고속도27.8
평균속도13.1
운행시간7.39.12
주행거리100.96
누적거리1333.8

별똥별.
새벽에 일어나 무심코 하늘을 보다가 꼬리를 길게 불 태우며 북쪽으로 사라져 버리는 별똥별을 보았다. 어렸을 때에는 그 별똥별에 얼마나 많은 꿈들을 실어 보냈는지. 여름이면 낮이 6개월, 겨울이면 밤이 6개월이 계속 된다는 북극을 꼭 가 보고 싶다는 소원도, 어른이 되면 새 각시에게 색동 저고리를 사 입힐 수 있도록 돈을 많이 벌게 해 달라고 그렇게 소원을 실어서 하늘나라로 보냈던 것이다. 그런데 얼마 만에 별똥별을 다시 보게 된 것인가! 한 40년은 된 것 같다. 세파에 부대끼며 사노라고 그 동안 꿈이란 꿈은 모조리 잊고 살았단 말인가.

새들은 새벽에 큰소리로 서로를 깨우며 장난을 친다. 운다는 표현은 우리 쪽 생각이고 새들은 지저귀며 대화하는 것이다. 새벽마다 닭이 소리치듯이 호주의 모든 야생 새들은 동이 터 오는 새벽이면 서로 다투어 나 보란 듯이 지저귄다. 새마다 몇 마디 안 되는 소리 짓으로 자기 생각을 표현하자니 얼마나 간드러지고 애절한지. 기쁨을 나누는 소리도, 공포와 무서움을 알리는 소리도, 짝을 찾는 소리도 모두 간드러지게 최선을 다해 지저귄다.
새벽, 해가 뜨기 직전에 우리는 그들 새들의 노래소리에 깨어난다.


야영이 연 3일째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사람을 만나는 일은 거의 없다. 지나가는 차량에서 손을 흔들어 주는 정도. 보이고 만나는 것은 야생동물들과 꽃들이다.

멧돼지 시체를 보았다. 돼지과 동물이 전 세계에 분포되어 있다고 들었지만, 그래도 호주 사막 한 가운데에서 멧돼지를 만날 줄이야.

꽃이 피어 있었다. 눈꽃(雪花)처럼 생긴 꽃이다. 10cm쯤 자란 풀잎 끝에 하얀 눈송이같이 몽실몽실한 꽃들이 군락을 이루어 잔잔하게 들판을 덮고 있다. 멀리서 보면 꼭 눈이 내린 듯 하다. 사막에 내린 신의 축복이다. 우리는 눈꽃이라 이름을 불렀다.
어제 오후부터 보이기 시작하더니 계속하여 앞길을 밝혀 준다. 그 옆에 동양 난같은 난초꽃이 누가 일부러 심어 놓은 듯 피어 있다. 눈꽃과 난초 꽃의 가운데 길로 우리는 달린다. 그 길이 몇 백리,몇 천리 이어지고 있다.



오늘 101km를 달려왔다.
어찌하다 보니 그랬다. 15km 전방에서 캠프를 할려고 했는데, 바로 그 직전에 자전거가 고장이 났었다. 페달을 연결하는 크랭크축, 그 축을 지탱하는 바텀브라켓(B.B, botom bracket)의 조임 나사가 크랭크 회전방향을 따라 왼쪽으로 풀려 나왔던 것이다. 다행이 빨리 발견하여 곧 수리가 되었고, 다행이라는 생각에 다음 쉼터까지 가자고 한 것이 어렵지 않게 이 곳 쉼터까지 온 게 된 것이다.
18시에 캠프하였다. 쉼터에는 물이 있고 콩크리트로 만든 탁자와 의자가 있었다. 의자가 있는 것만으로 얼마나 흐믓하고 행복한지.

창민이 대장은 벌써 브로큰힐 도착 계획까지 다 짜 놓았다.
기상변화를 가늠할 수 없어서 계획된 데로 움직여 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침에는 기온이 2℃까지 내려가고 낮에는 24℃까지 올라갔다. 해가 지면 바로 추워지고 해가 나면 달구듯 날이 뜨거워진다.

먹는 양도 엄청나다. 매일,스테이크가 1.5kg, 밥 4공기, 식빵 1봉지, 계란 4-6개, 파워바 2개, 쥬스 1ℓ, 요구르트, 커피, 음료수, 간식 햄버거,물... 그래도 배는 계속 고프다.
저녁에는 된장국에 쌀밥을 해 먹는다. 얼마나 맛있는지! 서울에서 싸 준 장아치, 멸치조림, 된장깻잎 그리고 고추장에 샐러리를 찍어 먹고 양파도 잘라서 고추장에 찍어 먹는다. 가장 맛있는 음식은 된장배추국이다. 그래야만 갈증과 염분 부족도 해소되고, 소화도 잘 된다. 된장을 아껴 먹어서 눌라보 지역에서도 계속 된장배추국을 만들어 먹어야 할 텐데.

엔진에 휘발유 넣듯이 음식을 쏟아 넣고 소화시키고 그 힘으로 자전거의 크랭크를 돌린다. 소화기 기능이 좋아야 한다.
호흡기도 좋아야 한다. 이 곳의 공기는 무척 건조하다. 건조한 조건에서 남보다 3~10배 가량 호흡량이 많다 보니 처음에는 허파까지 말라 버리는 느낌이었다. 호흡기 적응 오케이, 소화기 관리 오케이, 다리의 지구력도 보완되고 자외선에 노출된 피부가 적응되어진다면 다행이겠다.


9월 9일(月)     쉼터에서 야영(윌캐니아 55km전)
               야영 → 임데일 → 야영

06:20 5.5℃ 아침식사 베이컨,식빵,계란후라이,커피,오렌지쥬스
07:25야영지에서 출발 12℃
08:35휴식 오렌지쥬스 17℃
09:25휴식 바나나,커피
10:20-11:05 임데일(Emmdale)로드하우스 도착
스테이크샌드위치,콜라 식사비 $11.60
11:10-11:40박창민 자전거 뒷바퀴 스포크가 부러짐 수리후 출발
12:35-13:10 점심식사 쉼터 윌캐니아 93km전방 식빵,베이컨,오렌지쥬스,커피 27℃ 맑음
13:45휴식 강한 맞바람
14:30휴식 30℃ 강한 맞바람
15:10휴식 파워바,오렌지쥬스
15:50휴식 요구르트
16:40휴식 파워바
17:20휴식 오렌지쥬스
18:00쉼터에서 야영 윌캐니아 55km전
남위:31°41.7′동경:143°48.9′
저녁식사 된장국,스테이크,밥,짱아치,야채,계란후라이


최고속도22.9
평균속도12.2
운행시간7.20.28
주행거리90.00
누적거리1423.8

오후부터 새로 불기 시작한 강한 맞바람을 받았다. 정말 어렵게 운행하였다. 산맥을 넘을 때보다 더 어렵다. 한 시간에 5km를 주행하기가 힘이 든다. 18시가 다 되어서 쉼터에 와 닿고 저녁을 해 먹었다.
또 창민이 대장 자전거 뒷바퀴의 살(spoke)이 하나 부러져서 도중에 수리했다. 자전거나 트레일러가 하나씩 고장이 나기 시작한다. 언제 더 어려운 문제가 생길지 모르겠다. 내일 윌캐니아에 도착되면 자전거점에서 예비 부품을 더 준비해야 겠다.
자전거점이나 있을런지?
10시40분에 모처럼 로드하우스(road house)가 있어서 들렸다. 150여Km만에 처음 만나는 집이다. 주유소, 스낵, 음료수 등을 파는 곳이다. 로드하우스에서 만나는 트럭 기사들이 농담을 걸어온다.
"나는 그런 미친 짓을 절대로 하지 않을 거야!"
그러면서도 꼭 성공하라고 격려를 해 준다.


물을 구할 수 있는 곳은 언제나 까마득하다. 150km 만에 닿은 임데일 로드하우스에는 주유기 한 대와 의자 네 개가 있는 스낵바가 전부였다.

누가 묻는다면, 왜 이런 짓을 하느냐고 묻는다면?
종일 그런 생각에 붙잡혔다. 허허벌판,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똑 같은 풍경. 하루에도 몇 번씩 스스로 묻기를 해 본다. 지나가는 트럭을 빌려 타고 몇 백킬로미터를 앞당겨 갔으면 하는 생각, 모질게 힘이 들고 고통스러울 땐 다음 도시에서 랜트카로 갈아타고 가야지.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그냥 지워 버리고 싶을 때도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데 왜 가고 있을까? 나도 모른다.

창민이 아들을 앞세워 놓고 그가 가니까 나도 따라간다. 그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고 말겠다는 생각으로 가고 또 가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 그런 모든 어려움과 갈등과 낭패를 이겨내는 게 도전이 아닌가. 그것이 아버지일 것이다. 호주에 묻어 둔 땅도 없고, 숨겨 둔 여자도 없다. 그저, 호주는 큰 섬 대륙이니까,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금을 그어 보아도 표가 확실하게 나니까, 그렇게 지도에 동서로 길게 금 하나 그어 놓고 자동차로도 가기 어렵다는 길을 자전거를 타고 가고 있는 것이다.
아내 앞에서 남자가 되긴 쉽지만, 아들 앞에서는 아버지 되기가 쉽지 않다.
남자가 남자를 만드는 것이다.



여우가 물 탱크에서 흘러내린 물을 마시러 와서 사람을 힐끔힐끔 보면서 조심스럽게 쩝쩝 물을 마신다.
"걱정 말고 많이 마셔! 나눠 먹고 살아야지. 여우야!"

낮에 큰아들 성민이와 통화했다. 로드하우스에 마침 공중전화가 있었다. 백두산에 MTB로 함께 올랐던 회원들이 일요일에 강원도로 투어를 가기로 했다고 한다.
멋진 사내들! 대우의 차백성 이사, 대우그룹에 이사 되는 사람이 MTB를 타고 다니며 젊게 살고 있다. 그들을 빨리 만나고 싶다.

간밤에 합궁하는 꿈을 꾸었다. 진입할 때의 황홀감과 촉촉하게 받아 주는 아프로디테의 포근함이 있었다. 절정에까지 이르지 못하고 꿈이 깨었지만. 텐트 밖을 나와 보니 초승달이 동쪽에서 막 떠오르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미소같은 달빛이다.
하늘엔 별이 가득하였다.


어제 BB가 풀려서 하마터면 원정에 큰 문제가 생길 뻔 했던 일이나 오늘 바퀴의 살(spoke)이 부러진 사건 등은 평소에는 전혀 일어 날 일이 아닌 게 일어 난 것이다. BB를 고정 시켜 주는 나사는 지름이 5cm나 되는 특별한 장치로, 조이고 풀때에는 그 나사 만을 위해 만들어 진 특수 공구를 사용해야 할 만큼 정밀한 부품이다.
한 번 조이면 자전거를 해체할 때에나 풀어내는 요지부동의 장치인데 어떤 힘이 그 나사를 풀어낸 것일까? 스포크가 부러지는 사고는 미리 예상을 했기에 스포크렌치를 준비 했었지만 BB 렌치는 준비하지 않았다.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고 망치와 드라이버를 이용하여 응급 조치를 했던 것이다. BB는 페달에서 발생한 기초 동력을 회전에너지로 변환 시켜주는 중심축이나 다름 아니다. 무리하게 망치질을 하다가 삐끗하는 경우에는 나사가 망가져 어쩔 수 없는 경우가 될 수도 있었다. 스포크는 렌치뿐 아니라 스포크도 5개를 예비로 준비했다.

우리 아들 셋은 자전거를 무척 좋아 한다. 세발자전거 이후로 중학교 때에 형제들이 돈을 모아서 로드싸이클을 장만하여 임진각을 다녀 오곤 하였다. 고장 수리도 어디서 배웠는지 뚝딱이다. 자전거 관련 서적도 어떻게 구했는지 이론에도 빠삭하다. 나의 자전거 사랑은 아들에게서 배운 게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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