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일 대장 혜진의 활약
에디터 : 최용석

1월 30일 아우랑가바드(Aurangabad)-아흐메다바드(Ahmedabad) : 125km

오늘의 도로는 SH(State Highway)60 이다. 도로 주변으로 사탕수수와 목화 밭이 보인다. 사탕수수를 보니 입에 침이 고인다. 길을 가다 보면 사탕수수 나무를 통째로 잘근잘근 씹어 먹는 사람들이 보이는데, 그렇게 맛있어 보일 수가 없다.
지금까지 도로주변의 작물들을 생각해보니 여행 초반에 내 눈과 코를 즐겁게 해준 유채꽃을 시작으로, 바나나와 옥수수 밭 그리고 구아바 나무들을 볼 수 있었다. 남쪽으로 더 내려오니 사탕수수와 목화, 밀, 콩과 같은 작물이 보인다. 유채꽃은 주로 식물성 기름을 만드는데 사용된다고 한다. 인도에서는 동물성 기름을 잘 안 쓰기 때문에 다양한 종류의 식물성 기름이 만들어진다.
바나나와 구아바는 과일가게에 가면 가장 많이 보이는 과일들. 많이 보이는 만큼 싸기도 하다. 밀밭과 목화밭은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이어서 굉장히 신기했다. 특히 솜 덩어리가 마치 꽃처럼 피어 있는 목화가 나에겐 재미있는 볼거리였다.

오늘의 일일 대장 혜진, 당돌한 그녀다.

얼마 전 혜진이와 대화를 하던 중, 
"아직까지 만리행에 여자 대장은 없었어. 많은 여자 대원들이 있었는데 대장은 안 나오더라고. 니가 한번 해봐라! 너는 천상 남자 같으니까 문제 없을 꺼야. 하하하~"
진담 반, 장난 반 별 생각 없이 말을 던졌다.  
"흥. 내가 오빠랑 여행을 해보니까, 오빠는 정환이만 많이 가르쳐 주려고 하고, 자전거 수리 할 때는 남자들 다 불러놓고 가르치면서 나는 부르지도 않고..... 다른 것도 다 마찬가지야! 여자한테는 가르쳐 주지 않기 때문에 대장이 안 나오는 걸 수도 있어!!"

듣고 보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자전거 수리나 독도법 등 기본적인 내용을 제대로 알고 있는 여성 대원은 없었다. 사실 이런 것들에 대해서 대부분이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지도는 대장과 부대장이 보면 되고, 자전거 수리는 대부분 구조팀에서 한다. 여성 대원들은 일반적으로 총무, 회계등의 임무를 수행해 오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작은 편견에서 시작된 일이 어느새 습관이 되어버린 것일까?'
'여자는 대장으로 팀을 꾸리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할 일이 나눠져 있다는....... 요런 편견!?'

생각을 하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굉장한 오류를 범해온 내 자신을 찾을 수 있었다.
'우리 누나들이 이 사실을 알면 나를 가만 안 두려고 하겠지..(참고로 나는 누나가 셋이다)'

"그럼 나중에 니가 최초 여성 대장 한번 해라! 오빠가 아는 건 다 가르쳐 줄게!!"
"응. 지금 생각으론 그러고 싶어. 생각해 볼게^^"

새벽 5시 기상. 혜진이가 야간주행을 피하기 위해서 출발을 서두른다. 선두에 서서 새벽어둠을 뚫고 앞으로 전진한다. 도시를 빠져나가는 길이 쉽지만은 않았는데, 현지에서 배운 생존 힌디와 영어를 섞어가면서 길 찾기 클리어!
누구에게도 지는 걸 싫어하고, 대담한 행동을 남의 눈치 안보고 실행하는 성격이 한눈에 드러난다. 바로 뒤에서 주행하면서 혜진이를 보고 있으니 든든하다.
'이 자식, 늠름하게 자랐구나! 험..'

도시를 빠져나갈 때쯤 해가 뜨기 시작한다. 쉬는 시간을 갖고, 두 번째 주행부터는 성민이에게 선두를 넘긴다. 객관적으로 체력이 부족한 자신을 대신해서 선두는 성민이에게 맡기고, 쉬는 시간마다 이동 거리와 휴식 장소를 지시하는 시스템이다. 선두가 쳐지면 뒷사람 모두가 힘들어 지기 때문에, 합리적인 판단을 내린 것이다.
하늘도 혜진이를 도와주는 것인가. 길이 좋고, 바람도 좋아서 점심 먹기 전까지 90km를 이동했다. 하지만 너무 일이 쉽게만 풀려서일까. 아흐메다바드까지는 해가 지기 전에 일찍 도착했지만, 20여 곳의 호텔을 둘러본 결과 어디에도 방이 없다. 보통 우리의 평균 숙박비는 더블 룸 두 개에 1000Rs정도가 적당하다. 침대가 넓으면 한방에서 세 명이 자고, 침대가 좁으면 엑스트라베드를 이용한다. 싼 곳은 250Rs에 모두가 머문 적도 있었고, 부득이하게 비싼 곳에 들어가도 맥시멈 2000Rs였다. 하지만 대부분 호텔이 1000Rs에서 조금의 오차범위를 가지고 흥정이 가능했다. 하지만 오늘은 방이 없거나 지나치게 비싸거나.
결국 방을 찾아서 세시간을 헤맸다. 날이 어두워지자 복잡한 도심은 또 다시 지옥으로 변한다. 끊임없이 귀를 찢는 경적소리, 희뿌연 안개, 멍하니 우리를 쳐다 보는 인도인들의 음산한 눈빛(인도에 대해서 위험한 얘기를 많이 들어서 그런지 밤만 되면, 그리고 안개까지 깔린 도시에 들어가면, 밝을 때는 착해 보이던 사람들이 어느새 음산한 기운을 내뿜는 느낌이 든다)까지. 오늘도 느낌이 안 좋다(사실 지금까지 내 느낌이 맞은 적은 없지만).

날이 어두워져서 자연스럽게 주행 속도가 줄어들자, 혜진이는 다시 선두에 서서 호텔을 찾아 이곳 저곳을 누비고 다녔다. 얼마나 헤맨 것인가. 결국은 소름 돋는 교통체증과 갖은 소음공해를 뚫고서 도심 깊숙한 곳에서 저렴하고 깔끔한 방을 찾을 수 있었다.
야간주행은 정말이지 진을 뺀다. 특히 해가지고 9시까지는 퇴근시간과 맞물려서 인도의 무자비한 교통체증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시간이어서 더욱 그렇다.

늦은 시간 짐을 풀고 시장골목을 지나서 '구즈라트 탈리'라는 간판의 식당을 찾았다. 구즈라트는 인도에 속한 주(state)의 한 이름이고, 탈리는 '쟁반'을 의미하는 단어로써 남부인도에서 흔히 먹는 인도 음식의 이름이다.
넓은 쟁반에 밥과, 짜빠띠(화덕에 구운 빵), 달(콩 수프), 싸브지(야채 볶음), 커리등을 고루 맛 볼 수 있는 음식이다. 이를테면 서울에서 맛보는 '전주 비빔밥'이라고나 할까.
일반 탈리는 이전에도 먹어봤지만 이곳의 '구즈라트 탈리'는 무한 리필이 된다는 것이 장점. 배가 고파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맛도 끝내줬다. 게다가 저렴한 가격(45Rs)에 배가 터지도록 먹었다.
평소보다 이른 출발에 이어서 도심 속 야간주행까지 고된 하루였지만, 맛난 탈리 한 접시에 금새 체력이 충전되어 버렸다.

"혜진 대장! 오늘 하루 고생했으니까 양껏 먹도록! 추가 금액은 내가 쏜다!!!"
"우와~ 오빠가 쏘는 거야? 완전 많이 먹어야지!!"
"평소에도 많이 먹는데, 완전 많이 먹으면 아주 식당 거덜 나겄다. 그래도 오늘 수고 했으니까 마음껏 먹어~~ 여긴 무한 리필이거든…ㅋㅋㅋ~"

 

1월 31일 아흐마다바드(Ahmadabad) - 뿌네(Pune)시내 50km 전 : 65km

오늘의 대장 박성광

혜진이가 어제 너무 고생을 했는지 몸이 안 좋다. 오늘의 일일 대장은 성광이다. 시원한 오전시간에는 20km씩 주행하고, 날이 더워지자 15km씩 달리며 유연하게 대원들을 이끌어 간다. 쉬는 시간마다 대원들을 한명한명 찾아 다니며 다음에는 어떻게 할지 보고한다. 정말이지, 친절한 성광씨다.

12시가 조금 지났을 때, 길가 담장너머로 커다란 LG전자 간판이 보인다. 담 너머로 살펴보니 LG전자 공장이다. 계획상으로는 내일쯤 만나야 할 LG전자 공장을 우연히 마주친 것이다. 뿌네에 들어가서 여정을 푼 뒤 LG전자를 방문하려 했었다.
준비 미흡으로 인한 갑작스런 조우에 웃어야 될지, 울어야 될지.

너무 이른 만남, LG전자 뿌네 공장

옷도 깔끔하게 입고, 어차피 늦었지만 사전 연락도 하여 최소한의 여유만은 챙기려 하였다. 하지만 눈앞의 목적지를 뒤로하고 내일을 기약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간단한 회의를 통해서 탐방 내용을 정리하고서, 조금이나마 단정한 모습을 위해 용모를 추스른다.
사전 연락 없이 온 불청객으로 전락할 가능성을 애써 외면하고, 정문으로 향한다. 정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보안실을 지키는 인도인들이의 말은 간단명료했다.
"오늘은 휴일이어서 한국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런. 휴일 없이 자전거만 타다 보니 날짜 감각이 제로다. 오늘은 1월 31일 일요일이었다.
아쉬운 마음에 공장 주변을 기웃기웃. 아쉬움은 불신을 낳고, 불신은 의심에 불씨를 댕겼다.
'보아하니 공장은 가동되고 있는 것 같은데, 한국인이 한 명도 없다는 게 말이 되나?? 하긴.. 나 같이 찾아오는 한국인들이 한두명이 아니었겠지. 그래도 나는 자전거까지 타고 힘들게 왔는데.. 이 자식들을 어떻게 구슬린다..'

이때, 조급함 때문에 의심의 바다를 헤엄치느라 여념 없는 나를 부끄럽게 하는 범인이 있었으니. 그녀의 이름은 최혜진.
나에게는 모르쇠로 일관하던 보안 직원들이 미소로 일관하는 혜진이에게는 친절한 옆집 아저씨로 변신. 급기야 혜진이는 LG전자 박제우 수석님과 전화연결까지 해낸다.
오늘은 주말이어서 공장에 사람이 없고, 바쁘지만 내일 공장 견학을 허락해 주겠다는 답변이다. 내일 12시에 정식으로 LG전자 견학을 허락받은 것이다.
"야호!! 드디어 인도에서 LG전자를 방문하는 구나!!"
옹졸했던 내 자신은 쿨하게 안녕. 오늘은 혜진이를 존경하게 된다.   
보안실에 있던 한 여성분이 친절하게도 주변 게스트하우스까지 소개해 준다. 한국인이 한다는 게스트 하우스. 점심시간이 훌쩍 넘어가 버려서 도착하자마자 일단 식사를 시켰다. 별다른 메뉴판은 없고, 오늘은 닭도리탕이 나온다고 해서 일단 먹기로 했다. 하지만 앞뒤 안 보고 음식을 시켰던 것이 화근.
알고보니 이곳은 장기 체류하는 한국인 직원분들이 주로 이용하는 숙소였다. 원래 게스트하우스라는 개념이 장기 체류 손님을 상대로 식사등 생활 전반의 서비스를 함께 제공하는 장소라는 것을 오늘 알았다. 방값을 알아보니 1인당 1일 70달러. 순간 계산이 안 된다. 매일 루피와 원화간에 계산만 활발했지, 오랜만에 달러가 언급되니 머리가 멈췄다.
'70.. 70....이면 큰 숫자는 아닌데.... 얼마지?'
자그마치 3100Rs가 넘는 금액이다. 우리가 머물만한 곳이 아니다.
우선 식사는 주문했기 때문에 식사를 하면서 생각해 보기로 했다. 야속하게도 비싼 밥이 맛있긴 맛있다. 너무너무 맛있다. 밥값만 지불하면 1인당 300Rs를 내고 밖으로 나가서 다시 숙소를 찾아 헤매야 한다. 어차피 내일 다시 돌아와야 되기 때문에 가까운 곳으로 고르는 것이 좋다. 여기에서 머문다면.. 앞으로 우리의 식사는 2Rs짜리 짜파티, 그리고 잠자리는 묵혀두었던 텐트를 사용해야 되지 않을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사장님과 통화를 시도해 보았다. 우리의 무기는 학생신분과 자전거 여행이다.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지만 사장님께서 5명의 하룻밤 잠자리와 내일 점심 식사까지 6000Rs에 허락해 주셨다. 굉장히 큰 배려지만, 사실 이것마저도 우리에게는 부담되는 돈이다. 잠시 고민을 했지만 이왕 이렇게 된거 맘먹고 쉬기로 한다. 

안영수 이사님과 보안 직원들

타타-피아트 합작사 공장 설비 견학 중

비싼 점심을 눈물을 흘리며 먹는 도중에, 옆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고 계시던 안영수 이사님을 만나게 되었다. 제닉스라고 하는 자동차 생산 설비를 제작하는 회사를 다니신다. 현재는 타타 자동차와 피아트 합작사의 자동차 생산 설비의 수주를 받아서 인도에서 일하고 계신다고 한다.
"공장 한번 구경해 볼래요?"
오히려 먼저 좋은 기회를 주시니 너무 감사했다.
휴일이어서 공장이 가동되고 있지는 않았지만, 공정을 직접 보는 것 이상으로 자세한 설명을 해주셔서 공정의 흐름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한국에 대학교 1, 3학년의 두 아들이 있다고 하시면서, 마치 우리를 아들과 같이 대해 주셨다.
공정 설비가 거의 완료된 시점이어서 현재는 한국인 두분만이 이곳에서 일하고 계신다고 한다. 옛날에 현대자동차에서 일하다가 제닉스로 옮기시고, 이곳에 오신지는 15개월이 됐다고 하신다. 현대자동차에서는 자동차를 1대 생산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1분인데 반해서 이곳은 2분이 걸린다고 한다. 시간을 반으로 단축시킬 만큼 현대자동차의 기술력이 뛰어남을 자랑처럼 말씀해 주신다.
제닉스는 인도의 거대기업이자 국민기업인 타타와 이태리 피아트와의 합작사의 설비 기술을 전담하고 있다. 거대한 두 기업이 공동으로 판매하는 자동차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는 공장 설비를 우리나라 기업이 만들었다고 생각하니 정말 뿌듯했다. 우리나라의 자동차 기술력이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음을 새삼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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